요나1:1-5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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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1:1-5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
요나서에 등장하는 요나는 말 안 듣는 초딩 같다. 얼마나 유치한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니느웨가 멸망해가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의 악독이 상당하니 회개하라, 그리고 하면 회복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요나에게 전하라 말씀하셨다. 그러나 요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당시 정세를 보면 앗수르는 150년 동안 막강한 힘을 과시하다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요나가 속한 북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찌그러져 있다가 이제 좀 형편이 나아지고 있었다. 그동안 아래로는 라이벌 남유다와 위로는 앗수르에 샌드위치 되어 늘 약소국으로 살아왔는데, 왜 앗수르를 다시 살려주어야 하는가? 요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요나는 때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어 가야할 니느웨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하나님은 다른 길 가는 요나의 목적지를 다시 돌리셔야 했다. 왜냐하면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 이것은 곧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이들만 12만 명이 있는데, 이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 풍랑을 일으키시고, 제비를 뽑아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다. 큰 물고기의 뱃속에 3일 동안 갇혔다 나오게 된 요나는 정신차리고 니느웨로 향한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갈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데 니느웨에 가서도 이제는 말 안듣는 초등이 아닌, 미운 4살, 때리고 싶은(차마 죽이고 싶은 이라 말할 수 없어) 6살, 7살 같이 칭얼댄다. 니느웨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려면 3일 정도를 걸어야 하는데, 딱 하루만 다니면서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자 너무나도 놀랍도록 니느웨는 자복하는 심령으로 회개하기에 이른다. 이 모습에 요나는 또 다시 꼬장을 부린다.
“하나님, 내가 이럴 줄 알고 다시스로 간 것입니다. 니느웨는 망해야 할 나라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절 죽이세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선지자들, 백성들에게 위엄 있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뜻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에스겔은 390일 간 왼쪽으로 누워 지내면서 북이스라엘의 죄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40일 동안 오른쪽으로 누워지내면서 남유다의 죄가 이만큼이라는 것을 육체적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런 선지자들의 모습과는 다르게 요나서에서의 요나는 참 부족해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선지자를 큰 물고기 뱃속 경험도 하게 하고, 박넝쿨을 이용하여 시청각 자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고 간절하게 설명하시는 것 같습니다. 요나가 참 성경에 기록될 만한 인물인가 싶기도 합니다, 저 정도라면... 나도 비벼볼 만한데, 그런 생각도 들만큼 요나는 참 별로입니다.
그러나 열왕기하 14장 25절에는 사뭇 다른 요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14: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예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다시 부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 규모는 실로 놀라워 솔로몬 시대의 영토에 맞먹는 정도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나가 북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예언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여로보암 2세와 요나의 콜라보가 큰 효과를 거두어 다시 회복의 모습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요나서에 나타난 부족해보이고 철없어 보이는 선지자가 맞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로 저렇게 위대한 선지였나?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당연해보입니다. 자기 집안 일이 아닌 앗수르 니느웨의 일에 있어서는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인데 이제까지 이스라엘은 굉장히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여로보암 2세에 이르러 이제 살림이 펴진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앗수르의 힘은 약해지고 있고 하나님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다시 회복하게 하라는 말씀을 요나에게 전하라 한 것입니다.
과연 인간적인 마음으로 생각할 때 여러분은 가겠습니까? 요나의 북이스라엘 위쪽에 위치하면서 150년 동안 지역 실세로 군림하며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던 니느웨에 가서 회복의 기회를 주라고 하는 것이 요나의 마음에 들겠습니까? 요나는 알고 있습니다. 니느웨가 회복되면 이제 다시 일어선 북이스라엘이 다시 짓눌리거나 완전하게 멸망하게 될 것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인 요나와 하나님 사이의 엇갈리는 지점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요나가 이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요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요나 1:3a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 했지만 그것을 모두 보고 계신 하나님은 답답한 마음으로 요나를 다시 부르셨습니다.
요나 1: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절대 그렇게는 안된다고 버티고 있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 말씀하시지만 요나는 결국 배 가장 밑으로 내려가 깊은 잠을 청합니다.
요나 1:5b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지자인 요나, 북이스라엘에게 있어 위대한 메신저였던 요나도 어떤 지점에서는 하나님 앞에 끝까지 순종하지 않고 버티는 불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서를 읽으면서 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수많은 설교자들을 통해 말씀을 듣지만, 결국 순종하지 않는, 각자가 넘어서지 않거나, 넘어설 믿음이 부족하거나, 넘어서기에는 너무 아쉬운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각자에게 “니느웨”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는 신앙생활을 처음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또 10년 이상, 아니 모태신앙으로 40년 넘게 교회에서 수많은 말씀을 들었던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어도, 그 자리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멘도 외쳐보았지만 여전히 넘어서지 못하는 요나의 니느웨가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는 끝내 니느웨를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요나서 4장이 마무리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요나서 4장으로 마무리하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아직 요나서 1장 2절에 위치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에 귀를 막고 풍랑을 만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생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냄새 나고 어두운 큰 물고기에 갇힌 인생으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믿음으로 반응하여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 요나의 불순종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나 역시 사람인지라 사람이 흔히 가질 수 있는 학연, 지연, 혈연, 즉 연고주의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보다 사마리아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에도 요나가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 자신과 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함께 식사 한번 한적 없는 사람들이지만, 사마리아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니느웨보다는 훨씬 중요한 사람이 된 것이죠.
2) 또한 요나의 불순종의 이유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마음이 있을 것 같은데, 내게 적대적인 사람은 망해야 내가 행복감을 느끼는 고약한 심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양쪽에 위치한 일본과 중국에 대한 뉴스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일본과 중국이 역사에 걸쳐 우리나라를 많이 괴롭혀 왔고, 지금도 이웃이지만, 또 적대적이기까지는 아니지만 불편한 이웃 아닙니까? 중국은 아직도 우리나라를 소국이라며 자기들 발밑에 있는 것처럼 여기고, 일본은 동일본 대지진 때 우리나라가 그렇게 구호물자를 보내줬건만 일본의 정치인들은 꼭 우리 속을 긁는 행위를 즐겨합니다. 그런 중국과 일본이 경제가 활황이고, 잃어버린 30년에서 벗어나고, 중국 공산당이 이상하게 합리적이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문제를 해결해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반면에 중국과 일본이 계속해서 위기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습니까? 요나와 우리는 같습니다,
3)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 땅에 한정된 시야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시대의 아들이기에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대한 구별이 있던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야 하나님께서 온 민족이 다 주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며 세계에 선교사님들을 파송하셨지만, 요나는 이스라엘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 이스라엘이 잘사는 것이 전부였던 사람입니다. 땅에서의 삶이 전부이고, 하늘에서의 삶이나 상급에 대하여는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성경도 없었고, 주석도 없었고, 유명 설교를 마음껏 들을 유튜브도 없었으니, 자신이 경험한 것이 전부였을테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며,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찰나와 같고 영원한 삶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삶에 대하여 믿으십니까?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믿으십니까?
브루스 윌킨슨 & 데이빗 콥, 「하나님이 상 주시는 삶」
"우리는 열쇠 구멍을 통해 밤하늘을 내다보며 그 구멍으로 보이는 한 조각의 별무리를 붙들려고 하는 어린 아이와 같다. 그런데 열쇠 구멍은 너무 작고 밤하늘은 너무 광대하다. 예수님께서는 문을 열고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신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 원하신다.“
마치 닫힌 문에 달린 열쇠 구멍으로 바깥을 보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 광대한 우주의 밤하늘을 보여주고 싶어하시는데, 요나는 니느웨라는 넘지 못할 벽 속에 갇혀 무한함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 문을 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펼쳐 놓은 아름다운 밤하늘을 함께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요나서 4장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문을 열고 나와 보면 무한하게 펼쳐진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요나는 여전히 니느웨라는 문을 굳게 닫고 갇혀 있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계획에 무지한 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질문합니다. 여러분의 니느웨는 무엇인가요? 아직까지 굳게 닫아놓은 문, 성경 한 권 속에 무한 광대한 하나님의 세계를 기록해두었지만 내 눈커풀에 씌어진 니느웨, 내 골방에 들어가 여러 가지 열쇠로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하고 있는 그 문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문을 열고 나오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펼쳐놓으신 세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베푸신 잔치, 하나님께서 쌓아놓고 함께 누리길 원하시는 하늘의 상급을 맛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열쇠 구멍으로 쳐다만 보지 말고 문을 열고 주님의 세계를 보라고 말씀합니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왜 선한 일을 하십니까? 왜 봉사를 하십니까? 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좋은 일을 하십니까? 요나처럼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내 식구, 내 이웃, 내 나라를 지키고 세우기 위한 도덕적 책무 때문입니까? 아니면 착하게 선하게 살지 않으면 벌 받을까봐 두려워 선한 일을 하십니까? 칸트가 말하는 이상주의 윤리, Duty for duty’s sake(의무는 의무 자체만을 위해서 수행하라) 의무를 행하고 다른 보상을 바라는 것은 윤리적인 불순물이 들어간, 더 이상 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냥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아니면 선한 일을 하면 내 마음이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서 다른 일할 때 새 힘이 생기니까 하는 것인가요? 왜 선한 일을 행하십니까? 왜 착한 일, 왜 봉사를 하고, 왜 내일 홀로 사시는 할머니들 섬기러 갑니까?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위에 대한 동기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알아야 우리는 확신 있게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해야 할까요? 왜 선한 일에 힘써야 하고, 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한 일에 힘써야 할까요?
단순히 법과 도덕에 걸맞게 살아야 성도와 교회가 욕먹지 않게 되기 때문이 아니다. 선한 일을 하는 이유는 먼저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원래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선한 일에 대한 분명한 상급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하나은 위선적인 종교인들이야 말로 세상에서 최고로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나에게 있어 뛰어넘지 못하는 니느웨는 무엇인가?
재정
성품
시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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