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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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사람을 뽑을 때 기준이 있다. 학교에서 학생을 뽑을 때도 그리 간단한게 아니다. 과목따라 가중치가 있고, 또 외국에서는 어떤 활동을 했는가가 중요하기도 하다.
회사는 더 복잡할 지도 모른다. 대체로 모두 학교나 회사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뽑는다.
그런데, 제자를 부르실 때 예수님은 어떤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 주셨을까? 세상의 기준과는 조금 다르다.
예수님께 압도된 사람들.
예수님께 압도된 사람들.
먼저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다. 오늘 13절에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하나님 나라, 그리고 그 가운데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후에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계속하여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이 계셨다. 그리고 나서 부르실 때, 아무소리 꼼짝 못하고 예수를 쫓는다.
우리는 사도들이니까, 이 제자들의 대단한 헌신이나, 결단에 초점 맞추기가 쉬운데, 사실은 뭐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냥 끌려갔다. 압도되었다. 강조점이 결코 제자들에게 있지 않다. 예수에게 있다.
예수님을 섬기고 싶다고 섬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것은 그를 따르는 제자에게서 어떤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예수님”에게 그 원인이 있고 그의 부르심이다.
장점 때문에 부르지 않으심
장점 때문에 부르지 않으심
믿음과 신앙에 관해서 이야기 하면서 우리는 은근히 자기 자랑을 섞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기준과 방법이다. 은혜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반대 되는 것이 참 많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다음에 작품 이야기가 나온다. 뻔하지 않은 작품. 역전의 역사, 십자가의 역사가 있는 작품이 우리 삶이다.
딱한 것, 불쌍한 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딱한 것, 불쌍한 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베드로·안드레를 부르신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을까, 딱해서. 불쌍해서 어찌 보면 그냥.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또 경제적으로도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자 그런데, 오늘은 더욱 심하다. 레위, 마태복음에는 “마태”라 이름하는 제자를 부르시는데, 그는 세리였다. 로마 정부를 대신해서 세금과 통행료를 징수해야 할 책임이 있던 사람인데, 세리는 더 높은 세금을 뜯어냈다. 유대인 세리는 경멸의 대상. 이 사람을 왜 부르셨을까? 돈 계산 시키려고 그건 또 유다가 하지 않았나, 오늘 본문을 보면 간단하다.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죄인들 부르셔야 하는데, 죄인은 죄인이 잘 데리고 오고 전도하거든.
우리는 왜 부르셨을까? 부르심 받았음을 믿는가?
우리는 왜 부르셨을까? 부르심 받았음을 믿는가?
특별한 능력 때문에 부르셨을까? 크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차분히 자신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는데도, 우리는 착각하고 과시한다.
제자들 처럼,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도리어 딱한 사정, 능력 없음 기타 한계를 불쌍히 여기셔서 부르셨다. 날카로운 이성이나, 넘치는 통장 잔고를 보고 부르시지 않았다.
베드로는? 꼭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 절박함. 여유가 없는 절박함을 보시고, 참 피곤한 그 삶을 보시고 너 거기에 매이지 말고 나와 동행하는게 낫지 않겠니?
레위, 마태는? 세리로서의 한계. 모욕, 손가락질을 넘어서도록.
답이 없고 캄캄한 자들에게 예수님이 나랑 가자고 부르셨다. 예수님이 캄캄해서, 좀 유능한 돕는 사람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계획 세우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예수님이니까.
하나님 나라는 능력있는 사람이 막 노력해서 이루는 것하고 좀 다르다. 연약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영광 돌리며 그걸 전하는 것이다.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자기 고백부터 시작한다.
레위, 마태도.
연약하고 불쌍한 자는 자기와 같이 연약하고 불쌍한 자를 은혜의 자리에 부른다.
연약하고 불쌍한 자는 자기와 같이 연약하고 불쌍한 자를 은혜의 자리에 부른다.
세리는 세리를 부르게 되어있다.
마가복음 2:15 (nkrv)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마가복음 2:15 (NA28)
15 Καὶ γίνεται κατακεῖσθαι αὐτὸν ἐν τῇ οἰκίᾳ αὐτοῦ, καὶ πολλοὶ τελῶναι καὶ ἁμαρτωλοὶ συνανέκειντο τῷ Ἰησοῦ καὶ τοῖς μαθηταῖς αὐτοῦ· ἦσαν γὰρ πολλοὶ καὶ ἠκολούθουν αὐτῷ.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원리
교만하지 말자. 잘난 척하지 말자. 아주 버릇처럼 난 달라~ 고개 처들고 다니려고 한다.
은혜가 필요없었던 자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경험해도 감격스럽지 못하다.
“나는 은혜가 필요한 상황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려고 하지만
정작 내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은혜다.”
17절 말씀을 보라.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2장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여기 나온다.
우리는 믿음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믿음을 저버리고,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순간에 은혜를 거부하려고 하지 않는가?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레위를 왜 부르셨는지 기억하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