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막 6:45-56)

매일성경(마가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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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는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킨 사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그 일 후에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보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왜 이렇게 급히 건너편 벳세다로 보내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셨다는 것은 제자들이 그 자리를 떠나기를 원치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요한 복음 6장 14-15절에 따르면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외치며 억지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권력에 조금이라도 욕심이 있다면 이것은 굉장히 좋은 기회임이 분명합니다. 남자만 오천명이면 만오천에서 이만명이 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인데요,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고 흩어져서 예수님의 소문을 내게 된다면 혁명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역사에 보면 이런 혁명을 통해 정권을 쥐게 된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가장 먼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운 후 건너편 벳세다로 가게 합니다. 이어서 무리들도 직접 돌려보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아니 부활하신 이후에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잔뜩 흥분해 있는 무리들의 분위기에 편승하게 되면, 제자들도 지금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름이 없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무리들이 왕으로 추대하는 것을 만류하는 것을 보기라도 하면, 굉장히 아쉬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먼저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산으로 가십니다.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잔뜩 흥분되어 있는 제자들을 먼저 떠나보내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전율을 느끼며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을 뒤로하고 예수님은 아무도 없는 산으로 가셨습니다.
왜 산으로 가셨을까요? 예수님은 완전한 인성도 가지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즉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도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분명한 유혹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본분, 즉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새 출애굽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할 사명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이 본분을 추구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지금 자신에게 닥쳐온 유혹을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제자들도 보내고, 무리들도 다 돌려 보내며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유혹은 우리를 유혹하는 사람과 유혹하는 장소를 떠나면 됩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신을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도망쳤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목욕하는 밧세바를 바라보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해서 유혹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살면서 이런 저런 유혹에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사람과 장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일단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면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유혹이 밀려오면 일단 그 자리를 떠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나와 마주하십시오! 그렇게 될 때 오늘도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리 출발한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예수님이 지금 있는 곳에서 벳세다까지는 대략 3킬로 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배를 타고 가도 오래 걸리지 않는 거리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본문에 보면 날이 저물어도 배가 계속 바다 가운데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맞바람이 너무 강해서요 앞으로 전진할 수 없고,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어서 노를 저으며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그들은 밤 사경 즉 새벽 3-4시까지 사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위기에 처한 제자들을 보시고 바다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바다위를 걸을 수 있을까요? 욥 기 9장 8절은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바다위는 오직 하나님만 걸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구절을 보며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예수님께서 창조주로서 마치 산책하듯 자유롭게 거니시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전에도 말씀드린것처럼 성경에서 바다는 혼돈과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바다를 거니시는 모습은 창조주의 권능으로 그들을 제압하시는 모습을 상상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본 제자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놀라움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배에 올라 그들에게 다가 가시자 바람이 그치게 되었는데 이를 보고 제자들은 또 놀랍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 뿐입니다.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대단히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성난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마침내 물위로 걸어오시는 것 까지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떡과 물고기가 몇배로 늘어나는 것을 보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실수 있는 분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많은 기적을 보고 경험했으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해했다면 예수님께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보시고 놀라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그 이유를 이들의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둔함은 무뎌짐, 또는 무감각해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적을 하도 많이 봐서요, 이제는 봐도 별 감각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합시다. 그런도 그 음식을 주구장창 먹으면 맛도 없고 그 감흥이 떨어지듯이 제자들에게 예수님도 그런 모습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 예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관심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게넷사렛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간절함을 가지고 나와서 치료함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익숙해짐 만큼 우리에게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 오늘 많은 기독교 학자들이 무신론자들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교회에서 직분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복음에 대해 들어도 기쁨이 없고 무감각해진 사람들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예수님 오래 믿어도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알아도 예수님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순간, 둔하게 여겨버리는 순간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믿었다고 다 좋은 것 아닙니다. 오래 믿어도 예수님과의 만남을 여전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알도록 노력하고 힘쓸때에 진정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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