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러기 은혜(막 7:24-37)

매일성경(마가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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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언하신 일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선언을 하셨을때에 제자들은 깜짝 놀랐고, 모두다 파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예수님은 음식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음식법을 포함한 여러 정결법을 지키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다른 거룩한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즉 이 정결법은요, 유대인들이 자기의 정체성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살펴본것처럼 예수님은 이 정결법을 폐지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음식법과 같은 정결법이 강조되면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레위기에 규정된 정결법의 폐지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닌 이방인의 메시야도 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오늘 본문은 이방지역에서 하나님나라를 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먼저 23절에서 예수님은 이방지역 두로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귀신들린 딸을 둔 이방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귀신 들린 딸, 이방 출신 여인이라는 그녀의 배경을 보통의 유대인들이 알았다면 아마도 대면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배척하지 않지 않으시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계십니다. 분명히 이런 모습을 보면 유대인들이 험담할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그녀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찾아와서 엎드려 간청하는 이방여인에게 예수님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지금 우리가 들어도 굉장히 모멸적인 말을 그녀에게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요,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들으면 굉장히 거북할 수 있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 말은 예수님이 그녀에게 기회를 주시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유대인의 식탁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개는 썩은 고기를 찾아다니는 사나운 야생개가 아닙니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개를 의미합니다. 당시 애완용개는 식탁 밑에서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수염을 길게 길렀는데요, 식사할 때 음식이 수염에 묻으면 식후에 빵으로 그것을 털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빵을 개에게 줬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주인도 ‘먼저’ 자녀에게 빵을 주지 개에게 주지는 않았습니다. 먹고 남은 것을 주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안준다는게 아닙니다. 줄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풍기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자녀를 위해 부름을 받았지만 이방인들에게도 기적을 베풀수 있다는 힌트를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모욕감을 느낀다면 그녀는 딸도 고침받지 못하고 자기도 구원받지 못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렇게라도 힌트를 얻은 이유가 과연 무엇때문일까요? 사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명확하게 규정지을때가 많습니다. 나는 가난해서 안되고, 나는 머리가 나빠 안되고, 나는 남들이 가진 조건들이 없어서 안되고, 나는 .. 나는… 나는…. 이라는 여러가지 핑계로 우리는 자포자기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헬라인입니다. 딸이 귀신에 들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 압니다. 미친 딸 두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잘하면 자기 딸이 고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보통은 어떻게 할까요? 찾아가도 안만나 줄게 뻔한데라고 말하며 포기하겠지요. 그냥 멀리서 지켜볼뿐 접근할 생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노력해도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보통 문제 앞에서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떻습니까? 그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버립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예수님께 나와 자신의 문제를 아뢰고 고쳐주기를 원합니다. 참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일단 그녀의 말을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뒤이어 예수님은 곧이 곧대로 들으면 그녀의 인격을 완전히 뭉개버리는 심한 말을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반응입니다. 화내지 않아요, 분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침착함을 잃지 않고 예수님을 높입니다. 왜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예수님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정확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어~ 나와같은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기회를 주시네?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녀는 자기가 개가 맞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에게도 권리가 있음을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 먹습니다’ 이것은 개의 권리를 주장한 것입니다. 풀어서 말하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말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 자녀가 우선되어야 하는 현실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개처럼 취급받는 자들에게도 부스러기와 같은 것들은 먹을 권리는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라도 자신에게 베풀어서 딸을 치유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 자신의 요구를 당당하게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들이라면 이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한계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포자기하며 포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정해놓은 한계를 넘어 예수님께 나아가 아뢰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가 문제를 해결받고 받지 못함의 차이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수로보니게 여인은 세상이 한계지어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을 훌쩍 뛰어 넘었기에 예수님을 통해 치유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손가락질 받고 만나면 비난받을 사람들도 예수님은 기꺼이 비난을 감수하며 끌어안고 만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이방인 지역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는 것으로 또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도 함꼐가 없습니다. 우리도 한계가 없습니다. 단 예수님을 의지할때 우리의 능력이 변화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내 스스로를 나는 이만큼 밖에 안된다고 자연스럽 규정합니다. 실패를 번복하게 되거나, 크게 실패하게 되면 더욱 움츠러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그 분의 한계없는 사랑과 능력을 믿으신다면, 이제 그만 어깨를 펴시고, 여러분의 한계를 넘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이 저와 여러분,그리고 우리 교회 가운데 가득차서 우리 교회도 한계에 굴복하지 않고, 그 벽을 넘어서 더욱더 도약하고 성장하는 교회로 삼아 주실줄로 믿습니다. 그런 복된 날을 꿈꾸고 우리 삶에서 이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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