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정신차려야 합니다. 2024 0308 창35: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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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 301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창세기 35:16–29 (NKRV)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23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슬픔과 기쁨이 범벅된 삶일지라도, 끝까지 정신차리고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슬픔과 기쁨이 범벅된 삶일지라도, 끝까지 정신차리고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주인공 야곱의 막이 끝나가고 있다. 언약의 계승자로서 삶의 마무리 단계에 몇가지 사건들이 짤막하게 소개되고 있다.
한 주석가는 이렇게 이야기 함. “이 가족 공동체의 삶은 참으로 슬픔과 기쁨이 범벅된 삶이다.”
사랑하는 라헬을 통해 요셉 이후 한 명의 아들 베냐민을 또 얻었지만, 라헬이 산고로 인해 죽고 만다. 자신의 아들들이 언약의 후손으로 신앙과 삶을 잘 지켜가면 좋으련만 르우벤의 부끄러운 죄가 벌어지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고 그를 장사하면서 창세기에 전승되는 아브라함, 야곱, 요셉의 전승사 중 야곱의 이야기가 마무리 되고 있다.
야곱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신앙생활 하면서 갖은 고난과 역경을 만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죽음을 보고서도 계속 전진해야 하는 야곱의 삶. 미친듯이 혼란스러운 한 세대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들만 보자면, 신앙지키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런 의미에서 야곱은 침묵으로 하나님 앞에서 말로 범죄하지 않으려 애를 쓴 것 같다. 디나 사건 때도 그렇고, 르우벤 사건 때도 그렇고 야곱은 말년에 벌어진 즉, 약속의 성취가 어느정도 보이는 그 시점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깊이 묵상한 듯 보인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에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죽음 이후에 죄를 지은 아들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내리는 장면 보면 그렇다.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이름 변경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이름 변경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이 죽음을 맞이한다. 라헬은 그토록 원했던 자식을 낳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자식을 얻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그로 인해 아내를 잃게 되는 큰 슬픔이 동시에 찾아온다.
벤-오니 : 나의 슬픔의 아들
벤-야민 : 오른손의 아들
이름따라 사는 인생을 걱정한 아버지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본인도 자신의 이름을 따라서 속고 속이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 베노니의 오니 나의 슬픔은 아벤/아웬이라는 단어에서 왔다. '불행, 고통, 역경, 재난(앙)’ 이라는 뜻. 요셉은 하나 더 추가 의미. 또 아들 얻기를 바랐던 라헬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찾아오는 죽음. 그 슬픔으로 인해 이름을 나의 슬픔의 아들이라고 짓게 된 것.
여기에 야곱이 끼어들어 아들의 이름을 바꾸게 된다. 야곱이 철든 것 같다. 벤-야민. 오른손의 아들. 성경에서 오른손, 오른편은 사랑을 받는 쪽, 탁월함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베노니와는 아주 상반된 이미지이다. 긍정과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는 죽었음. 슬픔이 있음. 그러나 본인이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던 것처럼, 자신의 아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긍정과 희망을 갖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되는 말을 해야 한다. 현실은 슬픔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아니, 그러한 상황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게 된다. 함께 해보실까요? “현실을 말하지 말고, 예수를 말합시다.”
예수 믿는 우리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사 희노애락을 모두 똑같이 느끼며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운데 무엇이 다르기에 예수를 믿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떤 구별된 점이 있는 것인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천국소망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도 예수를 말하라. 예수로 살아가라. 예수로 해석하라. 슬픔의 아들이 태어났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주신 민족을 이루어주신다는 언약이 또 하나의 아들이 태어나면서 성취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내는 것. 예수로 생각하면 나의 한숨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이다. 나의 한숨이 할렐루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으로. 말씀을 믿고, 오늘도 예수로 새 힘을 얻고 새 희망을 이야기 합시다.
르우벤의 죄에 대한 해석
르우벤의 죄에 대한 해석
정치적인 목적
정치적인 목적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관계를 맺는 근친상간의 죄를 범했다. 이것은 창세기 내의 유다와 다말 사건, 롯의 딸들 사건 등을 기억나게 하고, 다른 성경에서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저지를 때 아버지의 후궁들 백주 대낮에 범했던 것을 기억나게 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여겨졌다.
특히 창세기에서 족장 야곱으로서의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가는 시점에서 이 한 구절이 전해지고 있는 것은 신학적으로 깊은 묵상을 하게 한다.
르우벤은 라헬의 죽음 이후에 라헬의 여종이 아버지의 사랑을 이어 받기를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르우벤은 자신의 어머니인 레아가 아버지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불만이 쌓여있었을 것이다. 압살롬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첩을 범하는 일은, 가족 안에서 정치적으로 장자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항하는 것이다. 즉, 반역의 죄라 물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권위와 명예를 완전히 짓밟는 일이었다. 이것에 대해 야곱은 들었다고만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장성한 맏아들의 권세가 아버지를 압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쩌면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언약의 상속자로서 깊은 실패와 상실감을 긴 시간동안 감내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야곱은 긴 침묵이후 자신의 죽음 목전에서 이 일을 꺼내며 르우벤을 저주하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야곱의 비참한 가정사는 계속 이어진다.
현실을 더 적나라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34장에서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 사건을 통해 자신들이 영적으로 더럽혀진 것에 대해 분노하고 이방 문화에 저항하고 파괴했으나, 맏아들이었던 르우벤은 정작 쾌락을 추구하는 이방 문화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의분이 일어나 분기탱천하여 거룩한 분노로 자신들을 구별한 것과는 다르게 르우벤은 타협하고 실패했다. 신앙공동체가 세상의 유해한 문화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하는지 극단적인 사례가 한 가정 안에서, 그것도 한 세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앞 절에서 영예로운 이름 ‘이스라엘’이 언급된 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범죄는 비록 약속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본성적인 욕망을 제어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수할 수밖에 없다는 연약한 인간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삼하 11장). 한편 르우벤은 이 범죄로 인해 (1) 장자권을 박탈당하였을 뿐만 아니라(대상 5:1) (2) 그 후손이 탁월치 못하여 르우벤 지파에서는 위대한 사사나 예언자, 왕이 전혀 배출되지 않는 징계를 당하였다. 이러한 사건에서 우리는 구속계획의 실현을 위해 신적 권위를 계승한 야곱, 즉 이스라엘에게 치명타를 가하려 한 대적자 사탄의 궤계를 볼 수 있다.
끝까지 정신차려야 한다.
끝까지 정신차려야 한다.
라헬의 죽음과 베냐민의 이름 변경의 의도. 르우벤의 반역적인 행동.
야곱은 아브라함 언약의 상속자로서 그 언약들의 부분적인 성취를 이뤄냇다. 조부와 아버지는 아들을 둘 밖에 얻지 못햇으나, 본인은 어찌 되었건 12아들을 얻었고, 나아가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70여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언약의 계승자, 성취자로서의 취소, 혹은 실패처럼 보이는 일들이 벌어지는 현재의 상황과 미래에 이 언약이 어떻게 성취가 될지에 대한 소망이 혼재되어 있음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도 ‘이미 그러나 아직’의 시대에 살고 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이 주어졌다. 하늘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구원을 이루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를 통해 보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성취는 당대에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약속을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성취되는 모습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가시는지, 그리고 그 약속의 계승자들을 어떻게 안보해나가시는지 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기도도 때로는 너무 길어질 때가 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서고, 때로는 기도 중에 감동이 오는 것 같아도 그 응답의 순간이 언제인지는 모호할 때가 많다. 그러나 기도는 길지만 응답은 한 순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끝까지 정신차려야 한다.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수년, 수십년이 걸리는 기도 제목이 있을 수 있고, 내 대에, 내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제목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가장 적당한 때에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가실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가운데 끝까지 정신차리고 신앙을 잘 지켜야 한다. 포기하면 안 된다. 날마다 성령 충만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