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치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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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창세기 45:4-5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2024년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상처 입은 세대입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하여 서로 배려하기보다 자기 것만 챙기기에 급급한 사회상을 봅니다. 성도님들, 혹시 ‘마상’ 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 단어는 청소년들이 주로 쓰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보니 어른들은 이 단어를 보면 “말을 탈 때 쓰는 말인가?”라고 오해하십니다.
청소년들은 ‘마상 입었다’, ‘마상 주지마’ 등등 표현을 많이 합니다. 애들이 말하는 마상은 ‘마음의 상처’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상 입었다’는 ‘마음에 상처 입었다’, ‘마상 주지마’는 ‘마음에 상처 주지마’라는 뜻이죠. 그만큼 아이들도 상처를 주고받는 것에 민감한 세대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치유가 쉽지 않습니다. 타박상과 같은 피부의 상처는 병원에 가서 치료하고 약을 바르면 며칠 뒤에 낫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치료할 수 있습니까? 누가 치료해줍니까? 마음의 상처 치료 약은 어디 있나요?
성도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들은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경험이 없으신가요? 혹은 때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른 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적은 없을까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가까운 만큼 상처를 많이 주고받습니다. 직장에서 동료들과 직장 상사들과의 관계 가운데도 비일비재합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런 일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만 우리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도 원치 않게 상처를 주고받은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아픈 과거의 상처를 치유받은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마상’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고 치유 받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

본론1.

상처를 입은 요셉은 어떻게 치유자가 될 수 있었나요?
첫 번째로 상처 입은 치유자는 복수가 아닌 화해를 선택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창세기 45장 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장면은 형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야곱을 미워하여 애굽에 종으로 팔아버린 지 20년이 지난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7년 대풍년과 7년 대흉년이 이어질 것을 애굽의 바로 왕이 꿈을 꾸게 하시고 아무도 풀지못했던 이 꿈을 요셉이 해몽하였습니다. 이 대흉년 때문에 애굽에 곡식을 사러 온 형들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났지만 요셉은 자신을 바로 밝히지 않습니다. 형들이 과거의 일을 뉘우쳤는지 2가지 시험 뒤에 요셉이 자신을 밝히는 첫 장면입니다.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5절을 보면 요셉은 20년 전의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20년 전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 하였을 때, 장남 르우벤은 죽이지 말자 하였고 넷째 형 유다가 우리 손에 피를 묻힐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지나가는 상단에게 종으로 팔자고 제안했던 것을 요셉은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았다는 내용만으로는 요셉의 감정이 백퍼센트 다 느껴지지 않습니다. 요셉이 20년의 사건을 어떻게 마음에 담고 있었는지 더 정확하게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구절이 그다음에 나오는데요. 창세기 50장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50장 20절 상반절 말씀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네, 정확하게 요셉이 당시의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었다고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 지난들 그날의 일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요즘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쓰는 우스개말로 정말 별일 아닌 일에도 “어, 나 마상 입었나봐.”라고 이야기하지만, 요셉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평생 안고 갈 수밖에 없는 무려 수십 년이나 마음에서 묵은 상처, 이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가 있을까요?
상처를 받던 20년 전에는 17살의 청소년으로서 여러 형들의 분노와 증오에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그저 형들이 하는 데로 당할 수밖에 없는 요셉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고대 근동지역에서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애굽에서 신으로 추앙받던 바로왕 다음으로 큰 권력과 권세를 가진 애굽 총리가 된 요셉입니다. 요셉의 말 한마디면 형들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 정도의 힘과 권력을 가졌다면 요셉의 입장에서 내가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지 않을까요?
그러나 요셉은 비참하고 처절했던 과거의 상처에 대해 복수자가 아닌 치유자로 서기로 선택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상처를 딛고 치유자로 설 수 있었던 것일까요?
혹시 요셉이 애굽에 온 뒤에 그가 치유받을 만한 좋은 일이 있었거나 좋은 상담가를 만났습니까? 아닙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고 요셉은 자신이 잘하면 잘할수록,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다할수록 점점 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떨어졌습니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열심히 해서 인정을 받는가 했는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과 모함으로 감옥의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했습니다. 요셉은 관원장에게 해석대로 복직이 되면 자신을 꼭 기억해달라고 신신당부합니다. 해석대로 관원장은 복직이 되었지만 요셉을 잊어버린 채로 2년이나 감옥생활을 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요셉이 치료받고 치유되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애굽에서 일어난 요셉의 심경 변화를 찾을 수 없지만, 우리는 시편 105편에서 요셉이 복수자에서 치유자로 변확하게 된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편 105편
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편 105편 16-18절 말씀은 창세기에서 요셉의 애굽 생활을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창세기에서 읽은 내용과 동일합니다. 요셉의 발에 차꼬를 차고, 쇠사슬에 몸을 매일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중요한 부분은 19절입니다. 19절에서 노예와 죄수의 삶을 살았던 요셉이지만 그런 환난 중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을 단련, 연단시켰다고 합니다. 언제까지요? 여호와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입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을 때까지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있을 때도, 모함으로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은 요셉을 연단 시켰던 것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복수자가 아닌 치유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자신을 죽이려는 형들에게 원수를 갚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고 화해를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환난 가운데서 요셉을 훈련시키고 연단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 같이 로마서 5장 3-5절을 읽겠습니다.
[롬5:3-5, 개역한글]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로마서 말씀은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연단하셔신다고 합니다. 요셉도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연단을 받았습니다. 말씀으로 연단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마음 속에 분노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진리의 말씀 앞에 나 자신도 조명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상처와 환난 가운데 우리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성도로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지요! 이 소망이 어떤 소망입니까? 성령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충분히 복수자가 될 수 있었는데도 치유자가 되기로 선택한 것은 말씀이 요셉 안에서 요셉을 연단시켰고 요셉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형들에게 복수하거나 형들을 죽일 수 있습니까? 그가 형들을 사랑하고 화해를 청한 것은 주님의 자녀된 성도로서 당연한 모습입니다.
요셉을 연단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도 상처와 환난 가운데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연단받게 하셔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도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 모든 과정이 말씀으로 단련받고, 말씀으로 연단될 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셉을 단련하였도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도 단련하고 연단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고 말씀을 배우면 그 말씀은 여러분 속에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커다란 환난 중에 거할지라도 말씀만큼은 우리 안에서 위대한 일을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받은 마상, 마음의 상처는 심리치료를 하고 약을 먹고 상담가를 만난다고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말씀으로 연단 받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을 때 그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 부어지고 넘치게 부어졌을 때 여러분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마음의 상처가 눈 녹듯이 사라진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 배우는 자리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주부터 우리 교회에서 양육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을 배울 수 있는 자리가 이렇게 많은데도 “내 마음의 상처는 아무도 고칠 수 없어!”라며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말씀의 자리를 피하시기만 하시렵니까? 지금도 주님은 여러분을 초청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배울 수 있는 양육 훈련의 자리에 꼭 나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련받으실 때,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각자의 마음 가운데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지시기를 축복해 드립니다! 아멘!

본론2.

상처를 입은 요셉은 어떻게 치유자가 될 수 있었나요?
두 번째로 상처 입은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명을 우선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상처에 함몰되기보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로 결단했을 때 참된 회복을 경험합니다. 이 내용이 오늘 본문 5절에서 나옵니다. 색깔이 다른 부분을 중심으로 다함께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우리는 여기서 2가지 표현에 집중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내셨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요셉이 애굽에 온 이유가 형들의 질투와 시기, 또 요셉을 죽이고 싶은 정도로 큰 미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책임전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알고 보니 형들 때문에 애굽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보내셨고 그것도 그저 갈 곳이 마땅치 않아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뜻과 계획에 따라 요셉은 보냄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내셨다고 할 때 ‘샬라흐’(שָׁלַח)라는 히브리어를 씁니다. 그런데 이 샬라흐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아무에게나 사용할 수 없고 특수한 사명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을 때에만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선지자를 보내실 때 이 ‘샬라흐’를 사용합니다.
[렘1:7, 개역한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특별히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실 때 누구에게 보내든지 예레미야 너는 가며 무엇을 명하든지 반드시 말해라고 사명을 주실 때 샬라흐가 사용되었습니다. 요셉에게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실 때 형들의 모함이나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종으로 팔려 온 것이 아니라, 사명을 받은 선지자와 같이 수많은 백성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이 보냄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5절에서 ‘구원하다’라는 표현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여기서 생명을 구원하다는 원어는 ‘מִחְיָה (미흐야)’인데 ‘생명의 보존, 회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와 똑같은 어근을 사용한 대표적인 구절이 우리가 읽은 창세기 6장에 나옵니다. 바로 노아의 방주 사건인데요. 창세기 6장 19절에서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하실 때 ‘살아있다, 만수무강하다, 회복하다’라는 뜻의 ‘חֲיָה (하야)’가 사용되었습니다. ‘살아있다. 회복하다’라는 뜻의 ‘하야’가 ‘구원, 생명의 보존, 회복’의 단어 ‘미흐야’의 어근입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에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노아의 여덟 식구를 통해 죄가 가득 찬 세상을 벌하시고 ‘하야’,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큰 뜻과 계획이었습니다. 이때의 큰 뜻과 계획은 신학자들에 의하면 ‘동물 세계를 새롭게 다시 번성케 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노아는 대사명을 잘 감당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요셉에게도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뜻과 계획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뜻과 계획은 동물의 번성 정도가 아닙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선포한 것입니다. “형님들,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나를 애굽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닫게 되었기에 이미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습니다.”라고 형들에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요셉의 이 선포는 한 번 호기롭게 멘트용으로 발표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50장에서 노년의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형들은 겁에 질립니다. ‘예전에는 요셉이 아버지 야곱이 살아있었기에 우리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았지만, 이제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으니 우리에게 복수할꺼야.’라는 걱정, 근심, 염려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말하지도 않았는데 형들은 요셉을 찾아와 우리는 당신의 종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요셉이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다 같이 창세기 50장 19-20절을 읽습니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상처보다, 자신의 복수보다 하나님의 사명을 더 우선적으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상처 입은 치유자의 놀랍게 변화된 모습입니다. 요셉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가교 역할을 담당한 자였습니다. 요셉이 구원해야 할 많은 백성은 당시 고대근동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 430년 뒤 장정만 육십만이 넘는 대민족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한 초석으로 아버지 야곱의 가족 70인을 애굽에 정착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에서 언급된 요셉에게 말씀이 응하는 것이며 요셉이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한 결과입니다.
요셉은 알았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보다 많은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한 가치이며, 형들을 자신을 죽이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영혼 구원이라는 가장 선한 사명으로 바꾸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명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이전에는 상대방과 나만 있었기에(관계의 일직선 제시) 정말 힘들다는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합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연단되면 일직선이 아니라 삼각형이 됩니다(관계의 삼각형 제시). 이때부터 하나님이 보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이 계신다. 나 안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 이제부터는 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상황을 해석합니다. 이때 정말 좋은 점은 내가 나 자신조차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인데 이때 참된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를 들여다보게 되고 내가 치유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치유를 뛰어넘어 상대방과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하라는 하나님의 사명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왜 저 악한 사람을 나에게 붙여주셨는지. 이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지 알려주십니다. 담임목사님께서 가장 자주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인생은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관계의 삼각형으로 인생을 해석할 때 마상입었던 우리는 참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요셉의 마음 속에 형들을 향한 복수심이 불타는데 어떻게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요? 요셉은 형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나님께서 맡기신 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실제로 형들을 용서한 뒤에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애굽 총리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합니다.
어떤 사명이든 관계가 회복되어야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도 관계가 회복되어야 온전히 드릴 수 있음을 아십니까?
마태복음 5장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마5:23-24, 개역한글]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이 말씀은 ‘예배를 드리려 할 때에’ 라는 완곡한 표현입니다. ‘예배를 드리려고 할 때에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쉬운성경에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나쁜 감정을 가진 것이 생각나거든’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때 예배를 계속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잠깐! 멈추고 다시 돌아가 먼저 네 형제와 화해부터 하고 다시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 형제가 너에게 먼저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시지 않고, 네가 먼저 가서 네 형제에게 화해를 청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묻습니다. “아니, 예수님, 쟤가 더 많이 잘못했는데요? 저는 당하기만 했는데요?”, “예배가 더 중요하지, 관계 회복이 뭐 그렇게 대수입니까? 예배드리고 나서 찾아가 용서 구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반드시 형제에게 용서를 먼저 구하고 화해한 뒤에 예배를 드리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본질이라는 문제에 우리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를 잘 드리면 하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여기가 문제의 발생 지점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내 죄를 용서받기를 바라는데, 정작 나는 저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원수 같은 그 사람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고 화해한 후에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지난 한 주 동안 지은 나의 죄도 용서해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배를 진정으로 회복하고 싶으시다면 여러분이 요셉과 같이 상처받은 치유자로 서십시오. 그럴 때 예배가 회복되고 모든 예배 가운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치유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동안 많은 상처를 받으셨지요? 억울함과 원통함으로 남모르게 눈물로 지샌 밤도 많으신 줄 압니다. 하나님도 다 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상처를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복수자가 아닌 치유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더라도 말씀으로 단련되어 하나님의 사랑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득 부어지기를 축복드립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치유되었다면 우리는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보냄을 받게 됩니다. 관계의 삼각형 기억나시죠? 그 현장은 바로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들이 있는 자리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가족, 직장 동료, 그리고 상처를 주고받은 성도에게로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요셉과 같이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형제와 화해할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나의 예배를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내가 먼저 화해의 손의 내밀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아멘. 다음의 문구를 다 함께 읽고 가슴에 새긴 뒤에 제가 기도합니다.
가족 들과 관계가 회복되면 가정이 복될 줄 믿습니다.
직장 동료와 관계가 회복되면 회사가 복될 줄 믿습니다.
성도님 서로 간의 관계가 회복되면 교회가 복될 줄 믿습니다.
(다음 장면)
모든 관계가 회복될 때 예배가 회복됩니다!
관계를 회복하여 예배를 회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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