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복음이란(1) : 바른 길이 있다
로마서강해(2024)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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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지난 달 설교에 이어서 계속해서 로마서를 이어서 설교하겠습니다. 지난 설교의 핵심 키워드를 ‘정체성’이라 잡아보았습니다.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당연히..그럴 리가..)
이어서 오늘 본문부터 다루어야 할 큰 주제가 다름 아닌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쩌면 다 안다고 생각되는 이 ‘복음이라는 주제’ 특별히 앞으로 우리가 다룰 이 로마서에서 바울이 해명하고 있는 이 ‘복음’이라는 큰 주제’는 오늘과 이어서 서너 편의 시리즈 설교로 계속 이어져 설교되어야 할 것 같아 시리즈 설교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그 첫 번째 챕터, “바른 길이 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 즉 우리의 신앙적 삶에도 ‘바른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먼저 이 로마서의 수신자들은 다름 아닌 우리와 같은 ‘신앙인’들입니다. 더 나아가 이들의 이 ‘신앙’ 이 ‘믿음’이 그들이 살고 있는 로마에서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퍼지고 있다”라고 오늘 본문 8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관한 소문’이 온 세상에 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요약적으로 오늘 본문의 이 ‘로마 성도’에 관한 배경지식을 조금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이 등장합니다. 바로 그 때 그 장소의 구성원들에 대한 서술이 나오는데, 10절에 보면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이집트 사람 등등 나오면서..“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라는 서술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배경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곧 오순절 성령의 강림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그 능력으로 오순절에 강림한 그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유대인 개종자들이 다수라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이 어떻게 로마에 전파되었느냐,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그 시간에 속했던 그들이 다시 그들의 고향인 (제국) 로마로 돌아와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에도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란 사람에 의하면 주후 40년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는(성경에 글라우디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폭동으로 인해’ 유대인들을 추방하라는 공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이 폭동이 그리스도인들의 복음 전파로 인한 혼란이 지나치게 왜곡된 것이라는 학자들의 견해가 지배적입니다만..
아무튼 사도행전 18장 2절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 하는 이탈리아에서 온 그리스도인을 만나게 되는 사건이 이를 증명합니다.
여러분 나중에 또 다시 살펴볼 기회가 있겠지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신약 성경에서 인정하는 실실하고도 탁월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바로 그들과 같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전역에 퍼져나간 것입니다.
8절 하반부에 “온 세상에”라는 의미는 그 당시 ‘로마제국’을 말합니다. 1세기 때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로부터 추방하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인해 제국 사방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된, 유대 개종자들의 그 선한 영향력이 바울에게까지 미치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봤을 때, ‘와 이정도면 됐지뭐..뭐가 더 필요하겠나 싶은데’ 놀랍게도 바울의 마음속에 어떠한 간절함이 있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다 함께 9절부터 11절까지만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아멘,(여기까지) 바울에겐 “어떻게 하던지, 그들에게 꼭 나아가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항상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을 정도로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 마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 그리고 바울과 그들이 꼭 만나서 나누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너희를 견고하게 할 어떤 신령한 은사“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마 사람들의 신앙은 곧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즉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바울이 1장 앞 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그들의 믿음에 관한 소문을 칭찬하듯 말하고 있는 것을 봤지만..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마치 무엇인가가 부족한, 꼭 필요한 무엇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신령한 은사”를 주기 위하여 너희 보기를 심히, 간절히 원한다 말합니다.
이어 13절에 ‘여러분이 내가 여러분에게 몇 번이라도 가려했으나 갈 수 없었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이방인들에게서 복음을 전함으로 얻은 열매를 여러분들에게도 맺기를 간절히 원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간절한 소원은, 결론적으로, 바로 이 로마에 있는 여러분과도 함께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 소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나눔으로써, 바울과 그들이 서로 피차 안위함을 얻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궁금했습니다. ‘온 로마 세계에 퍼질 정도로 그들의 믿음이 좋아 보이는데,’ 여전히 그들이 온전하게, 굳건하게 서기 위해서, 그들이 삶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했을까?‘ “과연 복음이 뭐길래..?” 그러나..복음..? 이미 다 아는 것 아닌가..?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음..? 우리 이미 다 알지 않습니까..?
바울은 그럼에도 15절에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아무리 훌륭한 성도라도, 성도라면 반드시 견고하게 위해 필요한 어떤 신령한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씌여진 이 “견고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먼저 사전적으로는 “어떤 사상이나 의지가 동요됨 없이 확고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견고하게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적 의미는 “확인하다, 강화되다”입니다. 즉 더욱 분명하게..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현재 우리의 신앙은 어떠할까..? 정말 견고한 신앙인가..?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 세속의 유혹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즉 확고함을 유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바울이 말하는 그 신령한 은사가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절히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 신령한 은사가 15-16절에 바울이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복음’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 요동치는 세상에서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복음이다’라고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복음으로 인해 견고해져야만 곧 우리의 신앙적 삶이 바른 길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대로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그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아는 복음이라 하면 무엇입니까..?
“JESUS died for us”,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네” 이것이 복음입니까? 맞지요,
이것이 다입니까..? 맞지요, 이것이 다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도 있고, 그리고 이 간단한 것을 장황하게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음이 간단하도 우리 인간의 일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단순한 복음이 우리 삶에 적용되어져야 할 때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 세상과 우리 모든 사람은 이미 죄의 영향력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늘 혼돈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설교자에게 부여된, 말씀을 해명하는 일, 해석해서 전하는 작업이 그렇게 단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을 제대로 해석하여 바르게 전하는 것, 그리고 바르게 듣고 아는 것이 곧 바른 길로 가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을 온전히 알아가는 사람이 바른 길로 걸어가는 신앙인이다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간단하게, 그저 대충 해명해야 한다면, 뭣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이 복음에 대한 책을 이렇게 두껍게 주셨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사적으로 종종 제멋대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전도하는 자유주의 신학자, 그 추종 신자들은 아예 성경 자체를 떼냅니다. 그냥 신약 성경만 인정하든지, 아무튼 이 성경 66권 정경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어딘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구약 이 율법적인거, 아 주님 오셨는데, 이게 다 뭔 소용이야..? 복음이 뭐야..? 사랑이지..헌신이지..동성애자들도 품어야 한다면서, 퀴어 신학이다 뭐다 하면서..
정말 아직도 생생해서 잊지 못하는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 꼴에 또 리더, 즉 순장을 하며 순원들을 섬길 때가 있었습니다. 저희 소그룹에 포함된, 한 형님이신데, 베이스를 잘쳐서, 찬양단에 속해 있고, 뭔가 교회에서 열심히 합니다. 늘 그렇게 교회에서 음악을 열심히..열심을 가지고..막 크리스찬 음악 경연대회도 나갈정도로..음악을 그렇게..열심히..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성이 뭔가 좀 독특한, 말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아무튼 좀 진지한거 싫어하고 예수님 복음 예기하면 말 돌리는 그런 좀 이상한..
한번은 롯데리아에서 제가 꼴에 심방한답시고..그분의 고충이나 이야기를 죽 들어주고 나름 위로하고 분위기 좋게 대화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자신이 담배를 핀다는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 보수적인 교회의 정죄하는 분위기가 싫다고 하면서, 아주 기가막힌 한 마디를 하더랍니다.
뭔가 눈가가 촉촉해지면서..저를 바라보며..승목아..“교회다니면서 담배피면 안돼..!” 라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담배피는 사람도 교회다닐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되..역으로..
와, 그 순간 함께 감동을 하고..참..뒤돌아 생각해보면..이 형님 진짜 자유로우시네, 아마 아직도 못 끊고 피우고 있을 것입니다. 담배피우는 사람도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동성애자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뭐 똑같은 논리 아닙니까..? 아 말은 맞는데, 뭔가 이상해..뭔가 따뜻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찝찝해..
왜 입니까..?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은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모든 것을 결국 끊어내거든요, 바로 그 이길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싸울 힘이 내게는 없기 때문에, 바로 그 싸울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겠습니다! 가 아니라!! 하나님 나 스스로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힘을 주십시오..라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그가 진짜입니다. 죄를 멀리하고자 하나님께 전심전력으로 붙고자 하는자..
그가 무엇을 붙드는 것입니까..? 바로 복음을 간절히 붙드는 것입니다. ‘담배피는 사람도 교회 다닐 수 있다고 스스로 자위하는 것..’ 그것은 죄를 끊어낼 마음이 1도 없는 여전히 제 멋대로 살고 싶은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잘못된 길로 접어든 병든 신앙인들의 망상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분들이 참 많음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 이 병든 망상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확인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차라리 내일 범죄하더라도, 하나님 오늘 온전케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사람, 매달리는 사람이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적 용어로 ‘죄 죽임’이라 합니다. 죄 죽임의 실천이 없는 신앙은 가짜 신앙입니다.
아 복음이 용서와 사랑이지..죄 죽임 그건 또 뭐야..뭐가 그리 복잡해..? 정말 진정한 사랑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들 같습니다. 왜 그렇게 고민하는거야..? (안녕히 가십시오..저는 개인적으로 고이 보내드립니다. 언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드디어 16절에서 바울이 이 ‘복음’에 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16절을 다 함께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유대인이라 함은, 바울 자신이 속한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유대민족을 말하고, 헬라인은 문맥상에 나타나 있는 대로 유대인이 아닌 모든 이방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인 바울이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 무슨 말이지..?
여러분 혹시 복음을 전해보셨습니까? 우리 교회 나오세요, 목사님 설교한번 들어보세요~ 우리 교회 행복한 교회입니다. 꼭 나와서 예수 믿으세요..이런 것 말고 말입니다. 아주 원색적으로..쉽게 말해 “당신 죄인되어 살아왔습니다. 지금 이라도 회개하여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세요..” 이렇게 원색적으로 말입니다.
제가 청년 때 잠깐 극 보수교회에 다닌적이 있었는데, 거기는 전도도 아주 보수적으로 원색적으로 전하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시골 교회로 여름 수련회를 갔는데, 그 시골 교회와 연합하여 마을로 전도를 나간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역시 배운대로..‘할머니..예수 믿으세요, 당신은 죄인입니다. 죽 죽 죽..지금 껏 창조주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제멋대로 살아온 인생을 회개하시고, 회개함으로 주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으세요..’ (이 말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종이 나눠 주면서 방긋 방긋 우리 교회 오세요, 당신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하나님 자녀로, 모든 것이 좋아질 것입니다..뭐가 쉽겠습니까..하기사 이것도 못해서 전도하러 가자면 도망가는 청년들 엄청 많더라구요..밥 먹고 사라져..)
아무턴 이렇게 원색적으로 전하면 한 두 세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째려보면서, 웃기는 짬뽕이네..’ 아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죄 안질라고 얼마나 베풀면서 살았는데, 내가 무슨 죄인이야..?, 이 반응 한가지, 또 다른 반응 “아이고, 내가 죄가 너무 많아서, 이제와서 무슨 교회..못가..죄스러워서..”
특히나 두 번째 반응은 참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내까짓게 이제 와서 무슨 교회, 나 하나님 챙피해서 못봐유..”라는 실제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두려움, 수치..감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 더랍니다.
이처럼 당시 세상에서도 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조롱거리요 수치스러운 것이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로마를 지배하던 세계, 그리고 사상은 온갖 세속 철학, 즉 스스로가 잘났다고 외치던 헬라 학자들의 세계였습니다.
바울 역시 다소와 같은 곳에서 로마의 시민으로 자라남으로써 헬라 철학이나 문학 시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의 지식 사회와는 사실 다른 상당히 고차원적인 지적 사회였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과학의 발달로 인해 그 당시보다 높은 수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보면 오히려 지금이 후퇴한 세계일 것입니다.
그래 당시의 거만한 사람들에게, 멸시받던 개념정도인 십자가,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의 이야기..정도였다면, 이 말이 조금은 이해될지 모르겠습니다. 바울 역시 당대의 최고의 지성인 중의 최고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살았던 세상에서 역시나 십자가의 복음은 오늘날과 같이 상당히 ‘치욕적인 것’, ‘조롱받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외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복음이 실제로 자기의 것이 되었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현대교회에 ‘긍정의 복음’이 등장했습니다. 이게 설굔지 ‘자기 개발책’에나 나올 법한 설교들이 현대 교회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나 인간의 일생에 관한 설교에 많은 어르신들이 감명을 받고, 위로를 받습니다.
자기 개발과 같은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설교에 많은 청년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합니다. 그것들이 명설교라 합니다. 참 메시지가 심리학적이고 정신의학적으로 많이 변질되었음을 느낍니다.
저 역시 그런 현대교회의 수많은 설교를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부터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막 울고 웃고 할렐루야를 외치는데, 뭘 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ㄴ디ㅏ.
좀 뭔가 진지하고 깊이 고민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분명히 실제라는데, 나는 왜 이러고 살지..? 라는 좀 뭔가 어제도 그제도 죄 짓고 맨날 교회에서 울고 불고 회개하고 또 제자리..정말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책을 읽곤 했습니다. 언젠가 한 목사님이 제가 청년 때..존 오웬의 전집을 읽는 것을 보시고, 그 중에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를 읽고 있는 것을 보시고, ”너는 이게 이해가 되니..?“ 의아해 하시면서 물으시길래, ”
아..네..“ 당연히..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지요, 저는 여전히 답을 찾는 중입니다. 목사님은 왜 이 책이 이해가 안되는지 아세요? 이 죄의 문제에 한번도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지 않아서 그럴겁니다.라고 차마 말은 못하고, 속으로..
제가 신학교에서 설교에 관해 배울 때 저 스스로 다짐했던 내용입니다. 설교 속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드러나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즉 복음이 흐리멍텅하게 드러나선 안된다. 반드시 원색적으로, 선명하게..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도 설교자들이 그 복음을 은혜 끼친답시고, 뭐 그렇게 빙빙 돌리는지..교묘하게 희석시켜 전하기 때문에, 맨날 설교 끝나고 교인들이 하는 말이 목사가 했던 그 웃긴 예화, 그냥 내 마음에 와 닿는 그 내용 만..온통..진절머리가 납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 바울이 선포하였던 것 다름 아닌, 고린도전서 2장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로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아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 자세를, 바로 그 바른 길을 따라가야합니다. 아멘입니까..?
다음으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의 목적은 믿는 자들의 구원이다..그것이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안타깝게도 현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인간의 능력과 방법들을 앞세워 나아가는 것을 왕왕히 보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이 긍정의 복음으로, 마치 교회의 활동이 ‘복음전도가 다인 마냥’ 억지스러운 포교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이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행위도 복음전도의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의 형제 자매 한 지체 한 지체를 돌보는 것도 복음 전도입니다. 아멘입니까..? 제발 그 어떤 것도 대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 성경공부, 그거 초신자때나 하는거야~ 아, 언능 대충 하고 나가서 전도해야지..! 이번주도 혼자 왔어??! 아주 이상한 행태의 변질된 교회의 모습을 개인적으로 이제 그만 좀 보고 싶습니다.
긍정의 복복음으로, 교회를 부흥시키고, 사회를 번영케 하려는 그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적인 몸부림 때문에 이미 현대교회, 한국교회에 더러운 열매들로 오늘날 교회가 개독교라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좀 못해도 됩니다. 이제라도 정직하게 바르게 배워가면 됩니다. 바른길이 무엇인지 물어가며,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바른 길을 걸어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 라는 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가 철저하게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게끔 되어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바라봄, 즉 그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써만, 우리가 참 신앙을 갖게 된다는 것, 비로소 우리가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말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믿는 것이 곧 바르게 믿는 신앙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엉뚱한 의를 가져선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깨닫는 단계의 첫 단계는 바로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와야 되는 단계는 바로 이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지식의 헌신이 요구됩니다.
바울은 시편 32편 말씀을 로마서 4장에서 인용합니다. “허물, 즉 불법이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그분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려면 “의”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먼저 이 의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구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전심전력을 다해 하나님의 의를 배워야 합니다.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외에 그 어떤 곳에서 이 ‘의’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나누겠지만 그 의가 궁극적으로 어디에 맺혔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그 의가 완전히 실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바른 길을 가는 신앙인들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한 지적인 수고를 합니다. 쉽게 말해 꾸준히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큐티하는 거 그거 말고 말입니다, 그 교재 하나 사서 아침에 그날 본문 해설 읽고 밑에 몇자 적고 저녁때까지 쳐다도 안 볼, 아니 내일까지도 보지 않을 그런 이상한 콰이어트 타임 말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그 마음 안에서 불일 듯, 그분을 알고자 하는 갈망 가운데 독서를 하고, 성경을 읽고, 탁월한 교사들의 설교를 읽고 듣고 그냥 그렇게 안하면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듯한..그런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이와 반대되는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일요일 아침에 ‘탁 탁’ 먼지 털고 여기 끼는 정도로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설교 독서..이런건 아주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들, 죄송하지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그닥 소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원은 어찌 어찌 받나봅니다. 어차피 저의 영역은 아니라서..모르겠습니다만..
바른 길은 가는 자들은 하나님을 갈망하며, 지성적 수고를 합니다. 바울 역시 그러한 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 중의 석학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 전문가의 위치였습니다. 또한 그는 당대의 제국 로마의 시민이었고, 그 당시 헬라 문화의 모든 배경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처럼 이렇게 준비된 자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바로 율법의 전문가인 그에게 구약성경과 이 신약성경의 놀라운 조화를 해명케 하신 것입니다.
오직 바울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신약? 그런게 구약에 어디있는데..? 라고 말입니다.
영국의 탁월한 목회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참 기발하게 말씀을 하신 내용을 소개합니다. 바울이 수행한 위대한 사명 중 하나는 구약과 신약의 교훈을 조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표현하셨는데, 개인적으로 참 동감하였습니다. 오직 바울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바울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 후 아라비아로 가서 오랜 시간을 자신이 그동안 알아왔던 그 지식,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통로로 재해석하는 시간들이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그 말은 즉슨, 바울 역시 지성적인 헌신을 하였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구약 성경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유대인들과도 신학적으로 담론할 정도의 복음의 탁월한 변증가였던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바른 신앙인은 바른 길을 찾아 나섭니다. 그 바른 길을 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한 지성적 헌신이 삶 속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공부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냅니다.
올해 우리 부부가 하고 있는 것, 평일에는 티브이를 켜지 않습니다. 요 몇일 이사오면서 깨졌습니다. ㅎㅎ 아 뉴스는 보고 살아야지..하면서 킵니다. 솔직히 깨놓고 얘기해서 평소에 티비로 뉴스 안봐도 우리 알 것 다 압니다. 스마트폰으로 1분이면 그냥 끝납니다.
티비만 안켜도 부부끼리 대화할 시간이 늘어납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이 납니다. 추천드립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아 다 아는데..”, “내가 무슨 바울이냐..?” 씰데없는 소리하지 마시고..
요즘처럼 교재가 잘 나오는 시대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을 가까이 두고 읽고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제발 주일에 먼지털고 가지고 나오는 성경이 아니길 바랍니다.
시간이 없어서..? 운동을 못해..? 진짜 할 사람은 지하철 계단을 일부러 오르던지, 뭐라도 하게 되어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못 읽어..? 제가 쓰는 방법인데, 직장 내에서 조금은 한산한 시간일 때면 가능한한 범위 내에서 저는 성경을 듣습니다.
많이는 말고 집중해서 한 장씩 로마서면 1,2장 정도 반복해서 듣습니다. 내용, 문맥적 구조가 완전히 파악될 때까지. 10번이든..반복해서 듣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지성적인 헌신들을 하고 있는지 점검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립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 결론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견고케 하는 바로 이 신령한 은사, 즉 복음에 대해 무지하지 않는 것이 바른 길로 걸어가는 신앙입니다.
복음에 대해 무지하지 않으려면, 지성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정해진 시간을 따로 떼어 헌신할 수 있게 되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 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먹고 살아가는 분야에서는 그렇게 애를 쓰며 알아갑니다. 과연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시며 우리 삶의 모든 것, 그리고 끝을 보고 계시는 주님을 알아가는데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점검하여, 바른 길로 다시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