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대처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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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사람들에게 흑암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흑암은 지속될수 있다. 흑암의 시간보다 하나님은혜를 깨닫기 좋은 시간은 없다. 흑암의 시간은 위대한 사람을 빚어가기 위한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흑암중에 위로자되시며 결국 흑암의 끝이온다.

Notes
Transcript
-이시간 다함께 묵상기도 드리심으로 3월 10일 주일5부예배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찬송가 461장 십자가를 질수있나
-대표기도
-함께보실말씀은 시 88:13-18 말씀입니다.
시편 88:13–18 NKRV
13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시온찬양대 찬양이 있겠습니다.
-헌금기도
설교전에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할것 같습니다. 방금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활기넘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희는 산꼭대기에 있었습니다만, 제가 여러분을 골짜기로 끌어내리게 될겁니다.
오늘 읽은 시편말씀은 88편인데요. 이 본문에서는 칠흙같은 고난의 시기에 어떻게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지에 말해줍니다.
성경을 읽으면 어떻습니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기도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칠흙같은 인생을 통과하며 거의 모든 이야기는 희망을 암시하면서 끝이 납니다.
고난을 겪는 사람들이 기록한 거의 모든 시편이 이러합니다. 그 마지막에 이런말들이 붙는것이죠.
‘주를뵈옵나이다’ ‘주의 선하심을 보게될줄 믿습니다’ ‘ 주께서함께하시나이다’ 이런말들이 항상 따라옵니다.
그러나 방금읽은 시편은 희망에 대한 어떤 암시도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흑암에 대한 언급이 강조되고 있죠. 3번씩이나 그것이 언급이되어집니다.
마지막절에도 등장하는 ‘흑암’은 시편의 주제입니다.
영어성경의 마지막절에는 ‘어둠만이 나의 벗이 되었다’로 번역됩니다.
히브리어성경의 마지막도 ‘흑암입니다.
좀더 의미있게 문자 그대로를 해석해보면
‘내 유일한 벗’
‘가장가까운 벗’
‘흑암’ 이렇게 하고 끝난다는 거에요.
이런식으로 끝나는 기도를 보신적이 있습니까?
희망이 아니라 흑암이라니요. 성경속에 이런기도가 왜 있습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교육하기 유익하니
모르긴 몰라도 이 넷중의 하나로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일것입니다.
이시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4가지입니다.
신앙의 그리스도인에게는 ‘흑암’이라는 것이 존재한다입니다.
신자들 역시 상당기간 흑암의 시간에 머무를수 있다는 것이죠
2. 둘째로 알게되는 것은 흑암의 시간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좋은 때는 없다는 것입니다.
3. 더불어 셋째는 흑암의 시간은 위대한 사람을 빚어가기 위한것이다입니다.
4. 마지막으로 흑암은 상대화 될수 없습니다.
첫째로 흑암은 신자들에게도 상당기간 지속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을 볼까요.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그는 하나님을 구원주로 믿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두가지 종류의 흑암이 존재하죠.
외적인 흑암은 우리의 삶과 환경과도 관련이 됩니다. 우리는 시편기자의 상황을 잘알수 없죠.
우리가 알수 있는것은 시편기자가 친구를 모두 잃었다는 것과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임박한 죽음가운데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확실하게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고통이 무엇인지 알수 있습니다.
외적으로 기자가 처한 삶의 상황은 흑암입니다. 그리고 내적으로도 흑암을 경험하고 있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삶의 외적인 상황들이 어렵다할지라도 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그것은 극복되어질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의 시인은 현재 그런상황이 아니죠. 그는 배반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노를 느낍니다. 부재를 느낍니다.
기자는 외적인 흑암과 내적인 흑암속에 있고 기도하며 구원주로 믿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흑암으로 마칩니다.
대체 무얼 말하려는 것일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일수 있습니다.
구원주로서 하나님께 기도할수도 있습니다.
해야하는 일을 모두 하시는 분일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기간동안 그러한 자들도 고통속에 머무를수 있다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은혜입니다. 어떻게 그럴까요? 이 시편은 우리에게 성경의 현실성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삶은 고통입니다! 작품중에서도 그런 대사가 있죠 “전하, 삶은 고통입니다”
성경은 약을 팔지 않아요.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약을 파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현실적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도 흑암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죠 요한복음 16장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 것처럼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난 예수님을 믿으니 내게 나쁜일이 안 일어나” 라고 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도리어 고통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기때문에 은혜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는 현실적입니다.
크리스천이어도, 오랜시간 고통에 있을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말이죠.
4가지 중 제일 안좋은 부분이 지나갔습니다.
두번째로 흑암의 시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기에 참 좋은 시간입니다.
시편기자를 좋게 말했지만
그가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모든면에서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기도문의 어떤부분은 기도가 아닙니다. 추궁과 심문입니다.
‘주께서 죽은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주의 인자와 사랑을 무덤에 선포할까요?’
비꼬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어떨까요? 당신의 증인이고 싶고 온세상에 말하고 싶은데 제가 죽으면 어찌 그리할수 있습니까?
그런일 하고 싶은데, 제게 아무일도 못하게 하시네요! 대체 왜 그런겁니까? “대답하세요 하나님”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도를 넘었다라고 합니다.
이정도면 신성모독 아닙니까?
자기마음을 절제하지도 못하고 예의도 없고, 존경심을 찾아볼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러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이성을 잃고 분노와 슬픔 두려움 절망속에 그순간을 가지고 인생 전체를 해석하죠.
전에 저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셨잖아요. 이런 것을 생각못합니다. 다른시편에는 이런 내용이라도 있는데
이 시편은 아닙니다.
“단한번도 제곁에 없네요”
“흑암만이 나의 친구입니다.” 차라리 하나님보다 흑암이 더 낫습니다.
“당신을 택하느니 흑암을 택하죠. 흑암이 위로가 되네요
성경에 왜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대체 이 시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너무 부정적이네 하면서 못본체 넘어가야 할까요?
“성경속에 이런 기도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헤아리심”에 대한 증거입니다.
인간이 절망중에 어떤말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이해한다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거기 두셨기때문에 이런기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때로 이런 기도를 보고 부정할겁니다.
“성경에 이런 기도가 있다니, 이런 엉터리기도가, 나도 이런식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받아들일수 없어”
그러나 하나님이 기도를 거기에 두셨습니다.
우리가 종종 그렇게 기도하더라도 이해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옳지 못한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은혜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네가 언제나 옳은 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란다. 옳은 행동을 하기때문에 그렇지 않단다.
‘하지만 난 너의 하나님이야.’
그것이 우리를 얼마나 자유케 합니까? 우리가 잘 나갈때보다 절망의 시기에 은혜를 몇배는 더 경험합니다.
세번째로 흑암의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에 최고의 시기이며, 그시간을 지나며 우리는 위대한 사람이됩니다.
시편기자는 부적절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말들입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대상은 분명하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보면서 욥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앞에 사탄이 등장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뭍습니다. ‘내 종 욥을 보았느냐? 그와 같은 이가 이땅에 없느니라”
그런데 사탄은 뭐라말합니까? ‘이유없이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시죠.’
‘욥이 당신을 사랑하는것은 저에게 혜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익이 되기때문아닙니까? 그러니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 보십쇼. 그러면 그는 당신을 저주할것입니다.
그럴듯하죠. 나를 존경하는지 좋아하는지 의심이 드는거죠. 딴 꿍꿍이가 있는지 한번 보라는 거죠.
여러분도 곰곰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유중 일부는 하나님이 우리를 잘대해주니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을 출발할때 기복적인 부분이 있지 않았습니까?
상당수의 신자들이 순수하게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문제, 자기필요, 공허함때문에 나아가죠. 뭔가 하나님이 해주시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자기중심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항상 이리 저리 방황하게 만듭니다.
무슨일이 있으면 매우 분노하게 됩니다. 하지만 욥기의 마지막에 가면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욥의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죠 ‘내가 욥은 옳게 여기나 너희는 아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끔찍한 기도후에 욥을 기쁘게 받으셨습니까? 그것은 기도였기때문입니다.
화내고 분노했지만 하나님을 면전에서 박차고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이해할수 없다고 말하지만 등돌리고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패배인것이죠.
극심한 고난에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시편88편의 기자도 올바른 기도같지않지만 여전히 기도중입니다. ‘흑암만이 나의 친구’입니다. 말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죠.
여러분이 하나님을 느낄수 없을때라도 그자리를 버티는 것은 바로 이처럼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변화시켜 자기중심적 존재가 아니라, 거래하는 신앙인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신앙이아니라
인내하는 사람, 흔들리지 않는 사람, 견고한 사람, 믿음의 조상되게 할것입니다.
욥과같은 상황에서 나오는 우리의 입술, 마음, 행동의 고백은 우리자신을 변화시킵니다.
고결한 신앙인으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으로, 주님을 진정사랑해서 섬기는 자로 바꾸십니다.
마지막으로, 시편기자는 흑암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게다가 흑암이 영원할 것을 말하죠.
그는 제곁에 하나님이 안계신것같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곁에 안계십니다’ 대놓고 말합니다.
흑암또한 일시적이라하지 않고 죽을때까지라 말합니다.
고난이 있기는 하지만 늘 죽을때까지 고난이 있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이 시편을 쓴 저자는 헤만입니다.
헤만은 ‘고핫의 자손 중에 찬송하던 자’였습니다.
많은 시를 기록했고요. 그의 시편은 가장위대한 문학작품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인도, 기독교인이 아닌사람들도 인정하죠.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큰 압력이 있어야 석탄이 다이아몬드가 됩니까? 석탄이 눌리는 고통을 통해서 다이아몬드가 만들어지듯
헤만은 위대한 예술가로 신앙인으로 변하게 됩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이야기할것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하나님은 그 고난의 현장에 헤만과 함께 하셨습니다. 섭리하셨고 이 시편이 탄생되었습니다.
그 고통은 영구적이라 했지만 위대한 존재로 바꾸시고 수백년동안 그 시를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의 순간에 느끼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떠나지 않으십니다.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흑암하면 누가 생각나시나요?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고 총체적 흑암을 겪었습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헤만은 절대적인 흑암을 겪고있다 느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흑암을 겪으셨습니다.
절규하셨죠. 모든 사람이 떠나고 예수님만 홀로남았습니다. 말그대로 흑암만이 예수님의 친구였습니다.
제자들이 떠났습니다. 아버지도 떠났습니다. 얼굴을 돌리시고 외면하셔야만했습니다. 흑암만이 친구였습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은 옳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먹으려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입니다. 늘 남을 이용해 먹으려 합니다.
그런우리는 하나님의 외면을 받아 마땅하고 흑암을 받아 마땅하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흑암과 외면을 다 취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친구는 흑암뿐이셨습니다. 하지만 흑암속에 우리가 거한다면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죄인되었을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흑암가운데서도 모든것을 다 흘리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을 겪어도 외면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데 말입니다.
‘내가 죽고 나서야 주를 찬송하리이까?’ 헤만의 냉소적인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으신다면 그는 우리에게 ‘너는 혹시 죽어도 부활할것이다’ 말하실것입니다.
수십년을 고통하는 만성질환에 고통하는 자가 있다면 어떨까요? ‘부활이 치료하지 못할 질병은 없습니다.’
흑암은 모든 신자들에게 일어날수 있습니다. 하지만 흑암을 경험한다.하여도 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흑암과 거리가 먼사람들도 흑암을 겪습니다. 예수도 흑암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결코 버려진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한 흑암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흑암의 끝이 올것입니다.
흑암이 찾아올때 이유는 알수 없으나. 하나님의 섭리는 존재하고 그 목적이 분명하기에 그이유를 결국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설교적용기도
-설교후찬양(마지막찬양은 설교자가인도)
저 죽어가는 내형제에게
-마지막찬양후 통성기도 인도
말씀을 생각하시면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난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고 계십니까? 이 고통이 영원하지 않을것만 같고, 나만 홀로 남아있는것 같습니까?
흑암은 은혜를 배우기에 좋은시간입니다. 흑암을 지나며 우리는 위대한사람이됩니다. 그곳에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질병을 가지고 태어났더라도, 흑암속에 거한다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흑암이 찾아온 이유는 알수 없으나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목적이 분명한 이상 그이유를 깨닫게 되며 결국 끝이 올것입니다. 부활이 못 고칠 질병은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겪는 고통은 예수님에 비하면 그래도 견딜만 합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시는 주님입니다. 절규하여도, 비방하여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주여 외치고 기도하겠습니다.
-마무리적용기도
-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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