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0주일예배_마10: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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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성경을 보다 보면 자주 느끼는 일이지만,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하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말씀도 다시 보고 그 의미를 곱씹어 볼 것 같으면 새롭게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런 경우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면서 파송사의 결론격으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해석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우리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라는 이 말씀은 파송을 받는 제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희를 보낸 사람은 나 예수 그리스도이고, 나를 보낸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이기 때문에,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 말고 세상으로 나아가 사람들에게 나를 전하고 하나님을 전하여라. 너희가 하는 일이 곧 내가 하는 일이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는 격려의 말씀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고 해서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하는 이야기 역시 같은 이야기를 강조해서 부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하는 말씀도 그 의미상 새로운 다른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내용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역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할, 그런데 한편으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제자들에게 격려의 말씀으로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들은 일차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의 역할과 그 행동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분명하게 말해 주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너희를 보내는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고 너희들의 역할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역할이다.'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제자라 생각하는 우리 자신에게 주는 말씀으로 늘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는 막중한 사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신실하고 진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의 일차적 청중은 보냄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이 의도하는 것은, 방금 말씀드린 대로, 보냄을 받은 제자들을 격려하려는 것입니다. 더불어 넓게 해석하자면, 역시 말씀드린 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를 자처하는 우리들을 격려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또 다른 시점에서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보상에 대한 말씀'이라는 성서의 소제목이 시사하듯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일하는 사람을 대하는 사람들의 처지에도 눈길을 돌리게 만듭니다. 아마도 오늘 우리들은 일차적 청중인 제자들의 자리에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또한 그 제자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처지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큽니다. 오늘 제가 새삼 주목하는 것은, 바로 제자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오늘 우리들의 삶의 자세, 신앙의 자세를 돌아보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볼 것 같으면, 오늘 말씀의 내용은 예언자를 예언자로 알아모시고 의인을 의인으로 알아모시는 사람은 그에 걸맞는 보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별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인간사, 삶의 평범한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지체 높은 누군가를 잘 알아 받들어 모시면 대개 그만한 어떤 보상을 받지 않나요? 물론 예언자들이나 의인은 재력을 지녔다든지 권력을 지녔다든지 하는 의미에서 소위 '지체 높은' 분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의 재력가나 권세가들에게서 보상을 받는 것과는 다르겠지만, 그 의로운 사람들을 인정한 만큼 어떤 보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예수님은 매우 평범한 상식을 환기시키면서 제자들을 격려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말씀은, 그 격려의 말씀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의미 이상의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우선, 예수님 당시 또는 초대교회의 상황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작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상황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와 같은 대접을 받고 있었으니, 제자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 그 이름은 오늘처럼 각별한 뜻을 지닌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무명의 시골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2:46) 하는 말은 경멸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은 '촌놈'이라는 뜻입니다. 그 시골 젊은이를 따르는 제자들은 더더욱 못난 놈들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당시로서는 '작은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작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이들이 푸대접을 받는 상황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이 작은 사람들을 대접하는 사람, 거창하게 대접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이면 절대로 자기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이것은 알고 대접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과 다릅니다. 상식적으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사람들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특별히 비범한 안목을 지닌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이 대목에서 우리는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사람의 입장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냉수 한 그릇을 줬을까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줬을까요?
어떤 사람이 길 가다가 물 한 모금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물론 요새 같으면 절차가 복잡하지요. 남의 집 들어오기도 쉽지 않고, 또 뜬금없이 길거리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아, 가게에서 사서 마실 일이지 뭘 달라고 그러느냐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예전처럼 우물가에서 물을 뜨고 있다면 어떤 심정으로 줄까요?
'그냥!' 줍니다. 뭘 생각하고 뭐하고 합니까?
하찮아 보이고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그 행위, 단지 물 한 모금 준 행위가 큰 뜻을 지니는 것은 다름아니라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냥!' 준다는 데 그 까닭이 있습니다. 조건을 붙이지 않는 행위입니다. 물 한 바가지 주면, '동전 몇 닢은 주겠지' 혹은 '몸에 지닌 것 중에 하나 꺼내 주겠지!'하는 기대를 하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조건없이 준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알아모시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 차원, 의인을 의인으로 알아모시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 것은 다분히 의식적 차원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물 한 모금을 주는 것은 분별과 의식 이전의 문제, 아니 그것을 뛰어넘는 차원을 말합니다. 그냥 선택이며 결단이며 고민할 것 없이 그냥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성서는 가장 근원적인, 바탕이 되어야 할 사람의 태도를 강조하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창세기(18장)에는 아브라함이 낯선 나그네들을 대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저 낯선 나그네들을 대접할 뿐이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였습니다. 그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었고, 또한 자식을 약속하였습니다. 천사들을 대접한 결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은 셈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그들을 천사로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낯선 나그네들을 맞아들였을 뿐입니다. '그냥' 평소의 태도대로 베풀었을 뿐인데, 뜻밖에도 그들은 천사였고 뜻밖의 소식을 안겨준 것입니다.
열왕기에는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에 연이어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흔히 엘리야와 사르밧의 과부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밀가루 한 줌과 기름 한 병 밖에는 남지 않는 과부에게, 그것으로 빵을 만들어 자기에게 먼저 달라고 합니다. 그러고 났더니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천만다행이지만, 암만 예언자라 해도 좀 너무 한 것 아니었을까요? 물 한 모금 달라는 청을 뛰어넘어, 겨우 모자가 한 끼 먹을 것 밖에는 없는데 그걸 내놓으라고 했으니... 이 이야기에도 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복을 불러들일 만한 여인의 마음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 또는 엘리사의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을 강조하는 의도로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또 한편으로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여인의 마음을 동시에 전하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질서와 이해관계에 매여 사는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도달하려고 애써야 하는 목표가 되어 버렸습니다. 애초에 아무런 경계가 없던 땅에 국경선이 설치되고, 지금도 눈 씻고 봐도 아무런 표지판도 없는데 북방한계선이니, 어업통제선이니, 어로 한계선이니, 적색선이니, 해상군사 분계선이니 하는 것들이 그어져 서로 치고박고 싸우고 목숨을 내놓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물 한 모금이라도 주기 위해서는 '그냥'이 아니라 수없이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선택과 결단을 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천사의 뜻밖의 소식과, 예언자의 기적,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순진한 환상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그 순진한 환상을 일깨우는 신앙이 더욱 소중합니다. 대단한 결단으로 신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것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나가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