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주신 두번째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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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했던 장소 (11월 조모임 말씀(1조,2조,3조), 11월 봉사회 말씀, 12/ 7 : 13구역, 12/ 8 : 14구역, 12/14 : 21구역, 12/15 : 22구역)
[도입]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1996년 2월 3일에 구원받고 경기도 이천교회 부사역자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 박민환 형제입니다. 이천교회는 형제 자매님 200명 정도 모여서 교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교육관 건축을 하여서 열심 전도하며 교제에 힘을 쓰고 있습니다.
특히 작년 후반기 부터 외국인에게 전도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인 전도부를 세웠습니다.
오늘도 이천교회는 외국인 전도집회가 지금 진행중입니다. 강사는 비디오 목사님이 나와서 하고 계십니다.
우리교회가 전세계 82개국에서 복음을 전하다 보니깐. 다양한 언어로 말씀을 들을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아직 숫자는 미약하지만 에브라임을 생각하면서 더욱더 힘을 내볼려고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건축 후 전국 교회 형제 자매님이 교회에 많이 찾아 주셔서 수련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영혼 건지는 일에 조금 더 힘을 내어서 달려갈려고 합니다.
이천에 연고가 있으신 형제 자매님이 계시다면 교회에 연락하셔서 같이 전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하동에 오면서 처음 시작을 어떻게 할까 많은 고민을 하고 왔습니다.
그래서 하동교회를 위해서 2행시를 적어왔습니다.
이 시는 지금은 23년도지만 24년도를 12월달을 생각하며 적어왔습니다. 하동이 아니라 저희 이천교회를 생각하며 적었습니다.
한번 운을 띄어 주시겠습니까?
하 하나님과 함께,
동 동역자들과 함께
하동교회의 복음의 불꽃이 타오르다.
정말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번 적었습니다.
주님이 곧 오시잖아요! 문을 곧 열고 들어오실것 같잖아요! 그러니깐 24년도는 복음의 불꽃이 타오르며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말씀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을 찾겠습니다.
요나 1장 1-2절입니다.
(욘 1:1-2)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서론]
요나를 읽어보면 정말 나와 같다는 것을 세삼 느끼게 됩니다.
왜냐 하면 요나를 반대로 하면 나요잖아요!
성경을 읽을때 나와 접목시켜서 읽어보면 정말 나를 위한 말씀임을 세삼느끼게 됩니다.
오늘은 특별히 요나를 통해서 소명을 받고 신앙의 위기에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해서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그래서 주제를 요나에게 주신 두번째 기회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요나가 어떻게 해서 다시 신앙에서 회복하게 되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나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본론]
1.요나의 소명
방금 읽은 말씀은 요나에게 임한 소명입니다.
(욘 1:1-2)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요나의 뜻은 비둘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둘기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성령이 임할때 비둘기 같이 임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역사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에게 임한 성령으로 온세상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
그것 처럼 요나의 이름의 뜻이 비둘기는 그것에 의미를 두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선지자의 이름의 뜻의 의미들이 있습니다. 몇분만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사야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요
다니엘은 하나님이 나의 재판장이시다
오바댜는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
미가는 누가 여호와와 같은 신이리요
이렇게 이름에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시대 선지자의 이름에는 그 사역과 선포하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요나는 비둘기인것처럼.. 이방지역인 앗시리아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러 간다는것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수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이러한 사명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큰 성읍 니느웨는 어떠한 성일까요?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았을때는 적국인것입니다. 우리나라도 36년 일본의 속국이지 않았습니까? 일제 치하에 있었잖아요!
그래서 지금도 일본이 원수로 여기시는 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만약 요나가 우리나라 사람이었으면 일본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는것입니다.
앗수르의 나라는 어떠한 나라였느냐? 당시 포악한 나라 였습니다. 무자비한 나라였습니다.
나훔 3장 1절입니다.
나훔서에 보면 피 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앗수르 제국은 사람을 죽일때 잔인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의 적대국 원수국가인 앗시리아에게도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니느웨 성과 우리가 사는 세상과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 타락한 세상이 아닙니까? 각종 우상숭배가 가득하고, 서로 미워하고, 손해보기 싫어하고,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포악하게 바뀌는 세상 바로 그러한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니느웨 성과 비슷하죠.
하나님은 그러한 나라에게도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주신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에게도요.
디도서 3장 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이렇게 지냈던 사람이 바로 누굽니까?
여기 앉아 있는 우리 아닙니까?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니느웨 성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이 저 아닙니까?
맞죠.. 하나님은 죄를 싫어 하십니다. 만약 참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너무 끔찍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오래 참고 계셔서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5-6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나와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후 3장 9절에는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 하기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행한 그들에게 전도하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일을 하라고 우리를 먼저 구원해 주시고 사명을 주신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이세상이 아무리 타락되었고 우상숭배로 가득찬 나라이지만 우리가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
바로 전도의 사명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것입니다.
1-2. 나에게 주신 소명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나의 사명은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이 바로 나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그런 내가 전해야할 니느웨는 어디입니까? 저 멀리있는곳입니까? 아니면 전하고 싶은데 너무 강력해서 하지 못합니까?
1-3. 일어나 가서 외쳐라 - 올라가는 신앙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서에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요나서 1장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고요.
일어나.. 가서.. 외치는것.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요나서에만 이렇게 일어서서 가서 외치라고 말씀하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경 여러곳에 이러한 순서에 대해서 말씀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외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먼저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작으로 직접 발로 가야 하는것입니다. 그리고 외치는것 그것이 바로 전도이자 선교인 것입니다.
여호수아에도 동일한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 1-3절입니다 이 동일한 말씀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수 1:1-3)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일어나 가라 그리고 발바닥으로 밟아라.. 순서가 동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가 죽고 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이렇게 똑같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막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너희는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 하는 말입니다. 온 천하에 다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상이 있습니다. 만민에게 모든이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것입니다.
옆집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친척에게도, 원수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 복음 전파의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요나에게도 동일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1-4. 요나의 행동 - 내려가는 신앙
그런데 요나는 어떻게 했습니까?
요나 1장 3절입니다.
(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하나님은 일어나서 가서 외치라고 했는데. 요나도 일어나긴 일어났죠..그런데 순종의 길을 택했나요 불순종의 길을 택했나요?
불순종의 길을 택한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쪽으로 가라고 했는데 요나는 저쪽으로 가는 정 반대의 길을 택하고 가고 있는것입니다.
요나서를 보면 우리의 육신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너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난 그것에 순종합니까? 불순종 합니까? 불순종의 길을 걷잖아요.
왜냐하면 주님의 생각보나 육신의 생각이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롬 8:7-8)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내안에 무엇이 가득차 있습니까? 육신의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생각입니까?
우리 안에는 채울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먼저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면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갈 공간이 없는거죠.. 그래서 우리는 무엇부터 채워야 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내 안을 채워야 하는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횟집에 가게 되면
여러가지 반찬도 나오고 무료로 제공한 해산물이나 샐러드 기타 등등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런것을 많이 먹어버려서 메인인 회는 별로 먹지 못하는 경우가 혹시 있을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이분은 돈이 너무 아까운것이 아닐까요? 횟집에 회를 먹으로 왔는데 말이죠.!
이것과 같이 우리가 나의 뱃속에 무엇으로 채울까 고민을 하고 먹어야 하는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이 들어갈 공간이 없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죠.. 나의 생각으로 가득찬 나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럴때 우리는 나의 기준을 설정해버리는 것입니다 . 더이상 하나님의 것을 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이러한 마음이 듭니다.
난 여기까지가 나의 길이라는 것이죠..
요나에게는 니느웨는 못가 .. 내가 결정해버린것입니다.
역경지수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역경지수란 수많은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해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인데요
미국 폴 스톨츠 박스는 역경을 대처하는 유형을 등반에 비유하여 3가지 타입을 말하고 있습니다 .
쿼터(포기하는 사람), 캠퍼(안주하는 사람), 클라이머(정복하는 사람)로 분류를 합니다.
쿼터는 포기하는 사람으로써 힘든 문제나 역경이 다가오면 도망가거나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캠퍼는 안주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60-70프로 차지하는 데요 역경 앞에서 뚜렷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현상유지 정도로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
반면 역경지수가 높은 클라이머는 정복하는 사람으로 시련이 다가올때 자신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기어코 정복하고 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클라이머의 특징이 있습니다. 자신만 역경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을 격려하고 복독우면서 함께 정복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 계신 여러분은 쉽게 포기하는 쿼터, 혹은 적당히 안주하는 캠퍼, 끝까지 해내는 클라이머중에 어떠한 유형에 속합니까?
안주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요나 본인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면 않되는 거죠.. 왜 제한하게 되었죠 육신의 생각이었기 때문인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누가복음 17장 7-10절(무익한 종)
종에게는 무엇만이 필요할까요? 순종만 필요한것입니다. 기준은 내가 설정할수 없는것입니다
내가 밖에서 열심히 일을 했다고 쉴 수 있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만약 주인이 이것좀 해달라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도 우리는 해야 하는 종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준을 설정하면 않되는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바로 주님인것입니다.
주님도 말씀을 더 높게 여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깐 말씀에 순종해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신 거잖아요!
구더기 같은 나를 위해서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는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면 끝까지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죠.. 그런데 쉽지 않습니다.
요나도 순종하고 싶었겠지만 많은 고민을 했겠죠. 그런데 육신의 생각이 더 강하게 들어와 버린것입니다.
순종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을 바로 자기 생각이 가득차 있으면 순종할수 없는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찾겠습니다.
열왕기하 5장 11절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이 구절을 읽어보면 내 생각이라고 말하고 있는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12절에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강은 아람지역의 강도 있는데 요단강에다 일곱번을 씻으라는 말이 인정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메섹강 아마나는 대단히 맑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에게는 황금의 강으로 불릴정도로 알려진 강에 비해 이 요단강은 깊고 서서히 흘러서 진흙 색을 띠는 혼탁한 강이 었습니다.
그러니깐 군대장관인 나아만 장관이 이 강을 보았을때 자기 생각이 올라왔을 것입니다
그러니깐 11절에 내 생각에는 그러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요.. 나의 생각을 버리고 선지자의 말을 들으니깐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낳게 되었잖아요!
이렇게 내 생각으로 가득차 있고 하지 않으면 순종할수 없게 되는것입니다.
우리는 내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우리가 순종할수 있는것입니다.
이 요나는 개인적으로 그냥 가기가 싫은것이 아니라 유대 선민의식인 애국심 때문에 가기 싫은 것이었습니다. 요나의 마음속에 앗수르가 멸망하기를 바랬거든요.
그래서 요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명은 일어나서 가라고 했는데.
요나 어떻게 했냐. 점점 내려가고 있는 모습을 성경에 보게 됩니다.
요나 1장 3절에 보면 욥바에 내려갔다. 그리고 배에 올랐더라.. 영어 성경에 보면 went down 내려간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 배 밑에까지 내려갔고.
결국 바다 밑에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고, 요나2장에는 산의 뿌리까지 내려 갔사오니 이러한 표현이 있습니다.
본인 판단에 난 여기까지야 난 가지 못하겠어요. 그리고 불순종의 길을 걸으면 결국 어떻게 되느냐 점점 신앙이 내려가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
2.신앙이 회복할려면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에서 회복이 될수 있을까요?
만약 이자리에 난 여기까지 하면 되었어.. 난 너무 많은 봉사를 했어 난 너무 많은 일을 했어 이제 쉬어야 겠어..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게 바로 불순종의 길을 걷고 있는게 아닐까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2장 10절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죽도록.. 나의 생명을 다 바쳐서 충성에 해야할 의무가 우리게 있는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 여기까지만 하면되.. 이때까지 이정도 했으면 됬어.. 그것을 누가 정한것입니까? 아무도 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봉사할 시간도 이렇게 교제할 시간도 우리에게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깐 더욱더 힘써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에게도 내려가는 신앙일때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45절 ~52절 까지 보면
오병이어 사건이후에 예수님이 재촉해서 벳새다로 가라고 목적까지 정해지고 즉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의 어두움이 찾아 올때 밤사경에 그리고 바람도 불고 너무 괴롭습니다. 너무 힘듭니다. 난 하기 싫습니다. 그러한 마음들로 가득찬 나의 모습을 볼때. 어떻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역시 그래도 힘은들어도 노를 젓고 있는 모습 보세요!
그래도 예수님이 명하셨기 때문에 벳새다로 갈려고 발버둥 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힘은 들어도 포기는 하면 않됩니다. 그러고 있을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역시 입니다. 찾아오십니다.
왜요 보고 계시거든요!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나 보고 있으십니다.
욥기 34장 21절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우리의 모든 길도 보시고, 나의 상황도 보시고, 나의 모든 걸음도 보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고난중에는 보실까요? 보시지 않을까요? 주님은 보고 계시는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 외에는 주신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시험을 주더라도 피할길도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잊어버리고 살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원망을 하는거죠!
제자들이 괴로이 노젖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이 오십니까? 오시지 않습니까?
오십니다. 그것도 우리가 상상하던 방법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방법으로 오십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오실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오십니까?
그것도 바다위로 걸어오십니다 배를 타고 오시는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질 분명히 알려 주시려고 바다위로 걸어오십니다.
세상과 나는 구별되어있다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함께 하십니다. 그 배에.. 바람이 거스리고 힘든 그 배에 주님은 함께 올라서 같이 가십니다.
이것은 내가 고난 받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내 고난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주님을 잊어 버리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마가복음 6장 52절입니다. 마음이 둔하져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사는데 그것을 심상히 여기니깐 그렇습니다. 분명히 오병이어 사건도 보았고 여러 주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둔해졌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마음이 둔해졌는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복해야합니다.
2-1. 어디서 떨어졌는지 찾는다.
신앙에서 회복할려면 첫째 어디서 부터 잘못되었는지 찾는다.
요한계시록 2장 4-5절 말씀 찾겠습니다.
(계 2:4-5)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일곱교회 중에서 에베소 교회가 책망을 받은것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버렸다는것이 아니라 처음사랑을 잊어 버린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을때 순수했던 그 마음들을 잊어 버리고 세상속에서 살고 있는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고 있는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인생의 어두움이 찾아 왔을때 떠나고 싶고 잠수 타고 싶을때 왜 그렇게 되었는지 먼저 생각 해봐야 합니다.
잘 모르겠으면 처음 우리가 구원받았을때는 생각해보는 것이 힘든 여정에서 빨리 돌아오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문제 어디서 발생했는지를 생각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것을 회개하고 우리는 돌이켜야 합니다. 세상에 빠질수 있습니다.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도 한번 물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과 동행할때는 신기하기도하고 좋았을것 것입니다.
구름위를 걷는 기분.. 그것과 물위를 걷는 기분과 같을까요? 하여튼 좋았을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변화하고 주변을 돌아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빠졌습니다.
그런다고 주님이 그냥 두셨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건져 주셨습니다. .
단 우리가 빠진지 알아야 주님이 건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나도 점점 내려갔지 않습니까? 그리고 결국은 물고기 뱃속까지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회개하니깐 육지로 다시 나올수 있었잖아요.
어디서 떨어졌는지 요나도 회개하고 돌이킨것입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도 같습니다.
룻기 1장을 보겠습니다.
베들레헴이 기근이 찾아 왔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 입니다.
그리고 시편 132편 5절에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을 의미합니다. 베들레헴이 무엇이 있습니까? 전능자의 성막이 있는곳.. 그럼 누가 계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입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 누가 태어 납니까? 예수님이 거기서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근이 찾아 왔다고 나오미는 베들레헴에서 떠나서 어디로가냐 모압땅으로 갑니다.
하필 가는 곳이 어디냐면 모압입니다.
하나님이 저주를 내렸던 그 모압땅으로 내려 갑니다. 모압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곳으로 내려갑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그때 라도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
그런데 몇년을 더 있게 되었습니까? 10년을 더 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방여인과 결혼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룐과 기룐 두아들이 죽었습니다. 죽음.. 이 찾아 왔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죽음이 왔잖아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모압으로 내려가는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어떻게 했습니까?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회개를 했죠.. 다시 돌아왔을때 주님이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나오미는 어디서 떨어진것입니까? 기근이라는 환경에서 베들레헴에서 떨어진것이잖아요. 그래서 그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던것입니다.
돌아오면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인생의 어두움이고, 내 마음에 불평 불만이 많이 쌓여 있고 기도도 되지 않는다면
어디서 떨어져 있는지 찾고 돌아와야 합니다.
야곱을 한번 살펴 볼까요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였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얍쌉바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빼앗고 형 에서가 죽이려고 하니깐 어떻게 했습니까?
외사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라반의 집으로 가는길에 브엘세바 광야에서 돌베게를 베고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하신 말씀 창세기 28장 13절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3-15)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어디든 가든지 함께 하리라 그렇게 약속을 하고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거기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바로 그곳이 벧엘입니다.
야곱이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곳입니다. 그리고 서원까지 했죠. 이 돌이 하나님이 전이 될것이라고 그리고 수익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20년동안 라반의 집에 있다가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에서와의 문제도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럼 야곱은 어디로 다시 와야 합니까? 벧엘로 다시와서 서원했던것을 이행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야곱은 어디로 향합니까? 세겜땅으로 갑니다.
거기서 무슨일이 벌어 집니까?
딸 디나가 겁간을 당하고 아들들이 나서서 세겜 남자들에게 복수를 했습니다.
좋지 않은 냄새를 냈습니다.
가나안 땅에 거하는 사람들이 합세해서 야곱을 치면 어떻게 될까요? 전멸할수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좋지 않은 상황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창세기 35장 1절.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하나님은 다시 너가 서원했던 그곳을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은 어떤 행동을 취했냐면
모든 우상을 모아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하나님이 말씀대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엘벧엘이라고 말을 하잖아요!
엘벧엘은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난 곳, 구원 받은 곳,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부터 떨어 졌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떨어져 있습니까? 그럼 제일 먼저 십자가를 찾으십시요.
주님을 만나십시요! 처음 구원받은 사랑을 되 찾아야 합니다.
엘벧엘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것이 회복의 첫 단추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6장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우리가 떨어졌다는것을 인식했을때 우리가 찾아야 할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죄로 인해서 멀어졌지만 우리가 비록 신앙의 짐체기 였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해주실 분입니까?
도로 낫게 하실것이고 싸매어 주실분이시기에 우리는 누구에게로 돌아가야 합니까?
우리가 신앙의 침체기에 어디에 있습니까? 다들 세상에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다들 힘들게 있지 않습니까? 마음도 다치고, 심지어 몸도 다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럴때 우리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하는것입니다. 돌아가면 주님이 다 낫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다친 부분을 싸메어 주실것입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는것이 첫단추인 것입니다.
2-2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에서 멀어지는 삶)
첫단추를 끼웠다면 그러면 그 다음 해야 할것이 바로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것 처럼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문제의 근원인 죄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들이 있다면 상수리 나무에 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회복하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으시면 죄를 버려야 합니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진심으로 기도도 나오고 신앙생활도 가능한것입니다.
사무엘상 7장 3-4절입니다.
(삼상 7:3-4) (3)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 제하고 너희 마음을 전심으로 여호와께 향하여 그만 섬기라 ....(4) .....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먼저 우상을 제해야 합니다. 그럴때 하나님을 섬길수 있습니다.
우상.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것들이 있다면 놓아야 합니다. 지금은 정말 마지막 때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것 내가 생각하기에 작은것일지도 모르지만 하나님보시기에는 그것이 가장 큰 죄인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가 2장 15절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포도원으로 표현했습니다.
포도원에 꽃이 피었는데 그것을 헤치는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힐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다는것은 신앙을 회복할수 있음을 알려 주는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해칠수 있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작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작은 죄가 어떻게 됩니까?
작은죄가 큰죄로 변하게 됩니다.
큰죄로 변하기 전에 우리는 작은죄부터 제하는 연습을 해야 할것입니다.
자이언트 팜나무라고 있습니다.
자인트 팜나무의 씨앗이 큰 건물이나 다른 큰 나무 꼭대기에 떨어져 싹을 틔었을 때, 저런 곳에서 자랄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무 꼭대기에서 싹이 난 자이언트 팜나무는 숙주로 삼았던 원래 나무를 아예 덮어버려서 원래 나무가 있었는지 알 수 없을정도로 삼겨버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도 생활 속에서 짓는 작은 죄를 그래서 가벼이 생각해서는 않되는 것입니다.
작은 죄의 씨앗을 처음부터 자르지 않으면 우리를 그 죄가 다 덮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죄부터 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우리가 더욱더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타이밍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저 천국에서 우리에게 엄청난 상급을 주실려고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그것을 받아야 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디도서 2장 14절에 나와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속 했잖아요!
그래서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말씀으로 양육하고 교제로 양육을 하십니다.
12절 말씀에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경건치 않은것과 이 세상 정욕을 뭐한다고 하십니까? 다 버리고..
우리는 죄를 제해야합니다. 경건치 않은 것과 세상 정욕을 다 버려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선한일에 열심히 하는 친 백성이 될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별된 삶을 살았을때.. 우리는 누구와 가까워 지느냐 하나님과 더욱더 가까워 질수 있는 것입니다 .
앞으로도 계속 주님과 가까워져야 합니다.
주님과 가까워 질려면 결국 말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역사를 배푸시니깐요!
시편 19편에 여호와의 율법을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니깐요!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것과 같은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도 많은 말씀들을 듣고 마음에 새기고 그대로 적용하며 살려고 노력 하면서 회복할려고 해야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많이 듣고 열심히 하는데 왜 마음의 변화가 없느냐..
변화가 없는 이유는 두가지일 것입니다.
첫째는 말씀은 많이 듣고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그 말씀이 나에게는 지식일 뿐이어서 그렇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광야에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음식이 무엇이었습니까?
만나였습니다. 만나는 어떻게 먹어야 합니까?
성경을 찾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31절 35절입니다.
광야의 길을 걸어 갈때 날마다 하늘의 양식인 만나 거두어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8절에 보면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를거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나는 깟씨와 같다고 말씀했잖아요! 깟씨는 미나리과에 속한 1년생 풀의 씨앗이라고 합니다. 직경이 3mm 정도 됩니다.
그럼 그 만나를 그 상태로 먹을수가 없고 요리를 해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1장 8절에 이렇게 요리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더라
만나를 맷돌에 갈고, 절구 찧고, 가마에 굽고 그리고 과자같이 만들어서 먹었던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나는 밤 이슬이 진에 내릴때 만나도 같이 내리는 것입니다.
이 만나는 우리가 광야의 길을 걸을때 꼭 먹어야 하는 식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만나가 무엇입니까?
이 만나를 보고 하늘 양식이라고 4절에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1절에 보면 찾겠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 이것이 바로 만나이지 않았습니까? 이 만나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것입니까? 바로 들음에서 생깁니다. 무엇을 들음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는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 말씀을 먹어야지 우리가 살아날수 있는것입니다.
광야의 길을 걸을 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광야의 길을 걷고 있는데 얼마나 많은 만나를 먹고 삽니까?
유튜브에 보면 얼마나 많은 말씀들이 나의 마음을 울립니까?
그래서 그 말씀을 형제 자매님에게 들어보라고 주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그 말씀들이 나에게 역사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냥 나에게 내리는 말씀을 마음으로 아 좋다! 하고 끝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니까? 요리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먹지 못하는것입니다. 그러면 벌레가 먹어버리는것입니다. 썩어 버리겠죠!
만나를 먹지 못하니깐, 영적인 빈곤상태가 되어 버리는것입니다.
반드시 만나는 맷돌에 갈고, 절구에 찧고, 가마에 굽고, 만들어서 먹어야 하는것입니다.
우리에게 내리는 만나를 들었으면 되새김질을 해야합니다. 곰곰히 오늘 들은 말씀중에 실천해야 할것을 생각해보고 해봐야 하는것입니다 .
그런것들이 그 만나를 내가 먹는것이 되는것입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마음의 변화들이 생기고 좀더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두번째 죄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버리지 못한 죄 때문에 나의 신앙의 변화가 없는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에레미야 5장 25절입니다.
(렘 5: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죄때문에 좋은것을 막고 있는것입니다.
죄를 해결해야합니다. 청년의 정욕은 피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싸워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피를리기까지 대항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보여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전쟁을 하듯이 전투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군대에는 전투준비태세가 있습니다.
1단계부터 5단계가 있는데요
5단계는 평화 상태입니다. 이때는 주님이 오실때가 죄로부터 평화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다. 저 하늘에서 주님을 영접하지 않습니까?
그럼 이 세상과 구별되니깐, 죄로 부터 벗어나는 몸의 구원을 받지 않습니까?
빌립보서 3장 20-21절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가 주님이 오시면 우리의 몸이 부활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야 우리는 죄로부터 벗어나서 평화상태가 되는 것 같습니다.
5단계는 반듯이 이루워질 일이지만 지금의 상태는 항상 4단계인것입니다.
4단계는 더블테이크라고 해서 대비 상태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태입니다.
항상 죄에 대해서 대비하고 있어야합니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하면서 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잠시 기회가 보인다 그러면 죄는 그 틈으로 들어옵니다.
죄는 틈과 기회를 보고 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때 발령하는게
3단계 라운드 하우스입니다. 이때 군인들은 휴가가 통제 됩니다. 휴가 나가 있는 군인들은 다 들어와야 합니다.
왜냐 이제 전쟁을 대비하기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싸움니깐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틈으로 들어올 때 죄인의 길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집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가 거할 집이 어디입니까?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로 들어와야합니다. 왜냐 혼자는 이길수 없으니깐요! 같이 싸워달라고 집으로 들어와야합니다.
전도서 4장 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우리는 연합해야합니다. 두세사람에 있는곳에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연합해서 이겨야 합니다.
더 가까이 우리에게로 다가옵니다. 그때 발령하는것이 2단계입니다. 페스트 페이스입니다.
이 뜻은 속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때 탄약이 지급이 됩니다. 이제 정말 싸우기 일보 직전인거죠.
우리는 집으로 교회로 와서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합니까? 마귀와 싸울려면 무엇이 있어야합니까.
예수님은 무엇으로 마귀를 이겼습니까? 말씀으로 이겼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먹어야합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무장해야합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을 지배하고 몸으로 행동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그때 발령해야 할것이 1단계입니다. 칵기드 피스톨입니다. 권총을 장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제 전쟁인것입니다. 마귀가 피흘리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2단계에 전신갑주를 입었기 때문에
이전쟁은 우리의 승리로 끝날것입니다. 왜 우리의 승리로 끝납니까? 마귀의 머리를 누가 밟으셨습니까? 예수님이 밟아 버리셨습니다.
마귀는 힘을 쓰지 못할것 입니다. 전신갑주를 입은 우리 앞에서는 무조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제는 피흘리면서 주님을 의지하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싸워야 하면 피를 흘리면서 싸워야 겠지만, 전쟁에서 가장 이상적인 승리인 부전이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은 최선 중의 최선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 중에서 최선이다
손자 병법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방법은 바로 죄인의 길에 서기전에 우리는 돌아와야합니다.
피흘리기 까지 싸우기 전에 우리는 죄인의 길. 악인의 꾀를 좇지 말고 4단계에서 내 마음을 잘 다스리면서 기회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력 해야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1절을 보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처음 생각부터 단호한 태도를 가져야합니다.
싸울려는 마음이 있고 주님께 간절히 구하면 이길수 있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 우리가 같이 싸우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 보십시다. 그러면 다시 회복할수 있습니다.
2-3. 우리는 결단과 결심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에서 멀어지고 떨어 지고 있을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디서 떨어진지 알고 그곳으로 가야 하고 그리고 죄에대해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떨이지지 않으리, 주님과 더욱 가까이 지내리.. 이러한 마음으로 강한 열정으로 다짐을 해야합니다.
룻기 1장 16-17절입니다.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방금 읽은 룻기를 보면 룻의 진정이 있고 진실된 결심이 있음을 느낄수 있습니다.
어머니 가는곳에 나도가고 어머니가 자는 곳에 나도 자고 어머니가 하는 모든것에 나도 그것을 하겠나이다.
얼마나 그 말에서 진정성을 느낄수 있잖아요!
이렇게 그 누군가 나에게 말을 한다면.. 거절은 하지 못할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신앙에서 회복하려는 마음이 생겼으면 처음 사랑을 회복을 하고 죄에서 구별된 생활을 하면서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겠다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룻기에서 어머니를 주님으로 바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로 주님을 떠나며 주님을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주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주님이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주님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되고 주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죽으신 그 십자가에서 나도 죽어서 장사 될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면 주님은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러한 진정성 있는 결단이 필요할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 24절에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교제생활을 해야겠다. 기도생활을 해야겠다. 말씀생활을 해야겠다.라는 진정성 있는 결단과 결심이 필요한것입니다.
결단이 무엇입니까?
결단은 한자어 입니다.
결은 어떤 것을 끝내거나 결정한것을 말합니다.
단은 끊다, 자르다, 끊어 버리다 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단은 결정과 끝나다라는 뜻의 단어가 합쳐진 말인것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먼저 내 마음에서 결정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내가 끝내야 할것은 끝어야 하는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끝어야 합니다. 마귀의 유혹에서 뿌리쳐야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주님을 쪽으로 향해야합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생활을 결정을 해야합니다.
결정을 했다면 그 다음에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생각만 해서는 않되는 것입니다. 결정을 했으면 행하는것이 중요합니다.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은 주저 앉고 있다는 것입다.
언제까지 주저 앉아 있을것입니까? 언제까지 안주하고 있을것입니까?
다니엘도 그 어려운 상황에서 굳게 결심했잖아요! 왕의 진미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에스더도 죽기를 각오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한 각오로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내년에는 정말 후회 없이 살아봐야 겠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년에는 더욱더 주님을 위해서 달려가야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원하는것들이 있습니다. 올해 주님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불순종을 하고 살았다면 내년에는 순종의 길을 걸아야 겠다는 강한 의지로 마지막 시대를 열심히 살아봐야 겠다는 마음가지가 필요할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두번째 나타나신것입니다. 열심히 한번 뛰어보라고요!
[결론]
3.마지막 소명(두번째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
요나 3장 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한지라
그럴때 주님이 요나에게 나타난 것처럼 두번째 다시 나타실것입니다.
두번재 나타 나시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시 소명을 주시잖아요!
요나에게 주신 첫번째 소명과 동일하게 주시잖아요!
회복한 요나는 어떻게 했습니까? 말씀에 순종하잖아요.
우리도 회복이 되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입니까? 나의 가장 어렵고 두렵고 하기싫은 니느웨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거기서 또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니깐 주님이 주신것입니다. 영혼 살리는 일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나요!
마지막 시대가 너무나 가까워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침체로 몇명의 영혼을 놓쳤습니까?
신앙이 회복이 되고 다시 한번 일어서서 달려가야 할것입니다.
나의 안일함과 나태함속에서 불순종의 자리를 털어버리고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리고 가야 하는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을 향에 가야 하는것입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외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외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입을 열지 않으면 그 죄값을 우리에게 찾는 것입니다.
파수꾼의 임무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경고해야합니다. 곧 멸명할것이라고 주님이 곧 오실것이고 이곳은 장망성이라고 경고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것입니다.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이사야 58장에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내년에는 외치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요나서에 일어나서 가서 외치라. 우리는 이 문구를 기억해야 할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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