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9: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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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부터 맹인된 자의 믿음

최근 듄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는 2시간 반을 넘는 꽤 긴 시간의 영황에 속합니다. 1963년 잡지 실리면서 주목을 받다가 65년에 출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전 조사는 6년간 했으니 57-8년 어간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이런 대작 중에 잘 아는 반지의 제왕 같은 시리즈나 스타워즈 같은 영화로써 성공을 거둔 작품들이 있을 것입니다. 영화는 숨겨진 세력 그리고 정점에 빌런이 있거나 세력 자체가 빌런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시대를 이끌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대한 서사가 태어난 과정부터 성장 그리고 리더로 우뚝서는 과정을 그립니다.
어떤 경우는 리더를 메시야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메시야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시대 즉 빌런이 만든 억압과 통제된 세상을 다시 자유를 쟁취하여 평화를 이끄는 시대를 만드는 당위성을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어떤 단편 영화는 복수에 대한 폭력이 가족의 죽음, 공동체의 멸망과 같은 대비적 그림으로 빌런이 그린 폭력을 그 이상의 폭력으로 이기는 방식을 시원하게 보여주는데 이런 걸 우린 ‘킬링타임’용 영화라 합니다. 대표적으로 예전에 ‘다이하드’나 ‘테이큰’ 시리즈 같은 것입니다.
간혹 영화는 틀을 깨고 주인공이 어떤 대상을 대신해서 죽음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다음 시리즈가 나올 수 없죠. 주인공이 죽었기 때문이죠 진한 감동을 남기지만 영화관을 나오면서 무엇인가 모를 찝찝함 때문에 이런 류의 영화는 크게 성공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권선징악이 분명하게 들어나는 그리고 주인공의 서사가 심도깊게 그려지는 경우를 좋아합니다. 그런면에서 ‘나니아 연대기’와 같은 영화도 꽤 주목을 받지만 상상의 세계가 비록 빌론이 등장한다곤 해도 현실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결국 모든 책이 아직까지 영화화 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은 9장 전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다룰 때도 3주를 할애해서 설교를 했드랬습니다. 하나의 이야기 특히 요한복음에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과 9장의 맹인이 눈뜬 사건과 11장의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은 저자 요한이 믿음이 어떻게 일어나며 믿는 자는 어떤 삶 또는 변화를 이끄는가를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영화에는 빌런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의 빌런 역할을 하는 세력은 유대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갈 수록 바리새인이라는 특정 집단 그리고 제일 위에는 제사장과 대제사장이라는 그룹이 있으며 마지막 최고의 빌런으로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특이하게도 예수께서 성장하는 서사가 없습니다. 갑자기 등장하지만 그에 대한 일종의 서사는 1장 1절부터 18절에 짧은 구절에 태초보다 이전인 창조전부터 시작해 빠르게 훅 지나더니 역사의 현장에 성인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유대인의 삶의 중심인 예배의 현장, 제사의 현장인 예루살렘이라는 무대에 총 세번에 걸쳐 등장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예루살렘의 무대를 한 번으로만 보여주지만 요한은 유월절을 중심으로 세 번이나 다룹니다. 그러니까 9장 맹인의 사건이 2번째 방문의 결론처럼 그려지고 11장의 나사로의 죽음과 세번째 즉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보여 주는데 그러니까 9장의 소경이 눈 뜬 사건에는 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4장의 설교 때와는 달리 9장의 전체를 요한복음에서의 위치에서 지금처럼 설명드리고 이야기의 구조가 어떻게 흐르는지를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그런 연유에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9장은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날 때 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셨다.라는 정보를 제공합니다. 물론 우리는 맹인이 눈을 뜬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자세하게 이야기를 살피면 ‘예수께서 보셨다’는 것과 이어지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자세한 설명은 좀 미루고 그렇게 제자들은 ‘맹인된 이유’가 죄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도의 질문을 합니다.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죄로 인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하시면서 4절에 ‘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아직은 낮이다. 그러나 밤이 오고 그러면 아무일도 할 수 없다는 어려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5절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는 말씀은 아직은 때가 있는데 이 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6절부터 그에 따른 행동 씻겨 주시고 / 실로암 못에 가서 씼으라 했더니 실로암에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다고 빠르게 설명합니다. /(사진 3장) 어느 정도 요한복음에 집중을 하신다면 / 이런 빠른 구조의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는 정보는 결국 어떤 새로운 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낌새를 채셨다면 여러분은 저자 요한의 글쓰는 방법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대표적으로 어떤 사건이 그렇습니까? 5장에서 38년된 병자를 베데스다 못에서 고쳐준 사건이 안식일에 행한 사건으로 유대인들의 표적이되고 8장까지 길게 이어지는 논쟁은 결국 8장 59절에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로 이어진다는 구조를 아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9장의 시작인 맹인과 제자들의 죄의 결과로써 맹인에 대한 ‘죄’는 이번 구조를 이끌어가는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8절부터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 이 등장을 합니다. 맹인은 구걸을 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못하는 사람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고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못되죠.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구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을 뜬’ 맹인이 실제 그사람인지 8.9절에 의견이 갈라지는 것을 보여주고 10절에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묻습니다.
11절에 그의 대답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로 아는 것처럼 진흑을 이긴 것. 자신의 눈에 바른 것, 실로암에 가서 씻고 눈을 띄게 된 것을 나열합니다. 여기에 ‘침을 뺃어’라는 표현이 빠졌는데 그가 맹인이었고 눈을 씻을 때 진흙은 알았겠지만 ‘침을 뱉은’ 사실은 몰랐습니다. 뭐 소리를 들으면 알지 않겠느냐 하며 반문을 할 수는 있겠지요.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우리의 ‘인지’작용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동사는 순서대로 ‘말하다’, ‘있다’, ‘알다’입니다. 우리가 믿고, 우리 현실 즉 현상에 나타나는 그 외에 인지하지 못하는 현실 또한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말에 ‘철이 들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우리의 다양한 면을 아는 것이죠.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나를 위해’ ‘서로를 위해’ 이러저러한 마음을 쓰고 행동을 하는 것이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한 발 물러서 생각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람들은 ‘그 예수’가 어디 있으냐고 물었지만 ‘알지 못한다’라고 12절까지 하나의 상황이 끝나고 13절 부터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특히 14절은 바리새인과 안식일이 연결되면서 이 사건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예상하게 합니다. 하필이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번에는 맹인/ 즉 죄의 결과로 인해 태어나면서 부터 맹인으로 태어난다는 보편적인 생각을 가진 그때에 고쳐주셨다는 사건은 지난 번 사건에 이어 더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은 불보듯 뻔한 것이죠.
여전히 맹인은 동일하게 15절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그러자 16절에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여’ 하나님께로 왔다고 주장하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 하는 논리로 서로간에 분쟁이 일어납니다. 맹인된 자에게 예수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라고 묻자 그는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이런 선지자라는 표현을 기억하십니까?
6장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를 선지자로 불렀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시간이 지났으매도 이스라엘 즉 예루살렘에 예수에 대한 소문을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행위는 선지자가 갖는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유대인들의 반응은 오히려 그가 맹인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들중에 바리새인들 이들은 구걸하는 맹인을 자세히 볼 필요도 그의 얼굴을 기억할 필요도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그를 아는 자들의 말이나,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다가 ‘예수’로 인해 보게 된 말은 당시의 예수에 대한 분위기 그리고 만들어낸 허구와 같다고 볼 개연성이 높았으며 요즘으로 표현하면 거짓뉴스,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의 공장과 같은 그래서 18절에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라고 하는 것이죠.
19절에 너희의 주장/ 즉 맹인으로 태어났는데 보게 되었다는 사실/ 너희 아들이냐는 여부와 어떻게 해서 보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 부모는 우리 아들 그리고 맹인인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21절에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우리는 알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장성했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어쩌면 아들이 다시 보게 되었고 자녀로써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기쁨보다 말도 안되는 추궁은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22절에 그런 상황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했기 때문에 무서워한다는 이유입니다. 출교가 되면 이방인과 같이 여깁니다. 공동체에서 쫓겨 납니다. 성전 제상에 참여할 수도 없고 결국은 한 동네에서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내에 거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되겠죠. 지금처럼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이죠. 이들은 다시 맹인을 불러 묻습니다. 그들도 이제는 맹인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사실은 받아들입니다. 24절에 ‘너는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죄인으로 안다는 말은 이미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고 하나님을 아버지 자신을 아들로 칭하면서 신성모독을 범했기 때문에 ‘죄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그러한 사실보다 자신이 눈을 뜨게 된 사실 즉 팩트에 집중합니다. 26절에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는 의미는 비록 제차 묻는 말과 같지만 계속해서 꼬투리를 잡고자 하는 의도로해석됩니다. 이런 경우 ‘겁을 먹으면’ 어떻습니까. 말을 바꾸게 되죠. 오늘날 도 여전히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뉴스에 다양한 사건이 소개 됩니다.
정치적인 내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해병대의 채상병 사망 사건에 말을 바꾸는 사람들은 권력과 자기 이익을 위해 이렇게 말을 바꾸는 경우도 있고 자신이 지은 죄는 이미 있으나 그 죄를 더 크게 할 것인가? 아니면 좀 줄여볼 것인가하는 것 때문에 자신이 한 말을 바꾸어 유리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연결된 이런 일이야 어떻겠습니까? 그럼에도 맹인은 ‘자신이 눈을 뜬 사실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있었던 오병이어/ 38년된 병자와 같은 사건들은 분명 기적이지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다른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지만 맹인의 눈 뜬 사건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구약적 배경을 갖고 있어 특히 바리새인들에겐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정말로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면 이는 하나님과의 연결 즉 하나님의 아들이실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분위기는 반전되어 맹인이 오히려 유대 지도자들을 공격하는 모양이 나옵니다. 평이하게 말을 바꾸면 ‘자꾸 물어보는게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그러는 거냐’는 거죠. 그러니 그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제자라고 합니다. 이어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태어나면서 맹인은 하나님만 고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는 지적이죠. 그러자 귿르은 32절에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쫓아내면서 일단락됩니다.
오히려 눈을 뜨면서 믿음으로 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한 주변부 즉 자신을 알던 이들/ 바리새인들/ 부모 등 오히려 눈을 뜸으로 인해 함께 기뻐하고 제사장에게 보임으로 신분이 회복되어 기쁨으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한 인격체로써의 온전한 회복은 여기에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8:12–14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믿음이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회복을 기뻐할 수 없는 상황/ 분명 회복된 자신이 명백한 증인이요 증거임에도 누구도 함께 즐거워할 수 없는 진리는 예수로 인해서만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 일이 35절부터 41절까지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는 질문은 눈을 뜨고 일어난 일년의 사건 속에서 맹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믿음은 어쩌면 세상에서 잘되고 복받는다는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넌 맹인으로 구걸하고 살아야 되는 존재 즉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규정을 인간의 규정으로 바꾸어 인생을 재단하고 ‘너의 자리는 구걸의 자리, 죄인의 자리’라고 합니다. 앞서 8장에서 우리는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서야 맹인은 이런 사실이 ‘내가 아는 것’과 믿음 사이의 간격이 있음을 인지합니다. 36절에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그는 예수를 알았지만 인간 예수로 자신의 눈 뜬 것에서 끝났지만 믿음은 이 둘을 연결시키는 ‘혼합제’의 역할을 합니다. 눈을 뜨고 본 실상은 자신을 거부하는 세상을 보았습니다. 부모라면 ‘그래서 우리 애가 눈 뜬게 뭐가 문제입니까? 그게 그렇게 불만입니까’하며 누구보다 앞서 싸워 줄 줄 알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2천년대를 사는 우리의 시각이죠. 당시 ‘나’라는 존재는 없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생각, 정체성 이것이 곧 나의 생각, 나의 삶이라는 시대에서 맹인은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여전히 오늘 우리시대의 모습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시대는 부모 세대인 우리가 보는 시대와 또 다를 것이지만 그럼에도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예수로 인해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오늘 각자의 세상을 보게 합니다. 믿음의 세계가 열릴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다’고 역설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쉽게는 본 것이 믿음을 갖게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봤으니 믿는다는 것말입니다. 하지만 본 것은 우리의 한계를 정하는 것 뿐입니다. 보았다는 것에 머물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 고집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래서 어른의 시대가 고지식하고 고집 센 이유가 오랜 시간동안 본 것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그런 예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전체를 맛보는 흐름을 위주로 살펴 보았습니다. 한 주 맹인이 눈 뜬 사건을 묵상하면서 ‘나는 믿음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고민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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