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시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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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면…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면…
예언 - 방언-말
예언 - 방언-말
지난 시간에 성령이 임하시면서,
바람과 불 그리고 말 이라는 세가지 모습으로 임재 하셨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바람, 불, 말
바람, 불, 말
지난 시간에는 바람과 불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 보았다면 이번 시간에는 말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성령의 시대, 복음의 시대는 언어가 제일 먼저 바뀝니다.
우리의 말이 외적으로 들어나는 부분이라서 많은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람이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변화를 경험하면 제일 먼저 변하는 것은 언어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령이 바람소리를 내며 불의 혀와같이 갈라져 각 사람 위에 임한 후 가장 먼저 그 권능이 나타난 부분은 혀 입니다.
방언, 성령의 언어
방언, 성령의 언어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것은 마가의 다락방의 놀랍고 기이한 영적인 소동 이었습니다. 오늘 살펴볼 소동은 마가의 다락방 밖에서 사람들 사이에 나타난 엄청난 소동 입니다. 이 소동의 시작은 다름 아닌 언어의 변화, 방언 이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천하 각국에서 모인 각양각색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상황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성전에 감사제사를 올리고자 모인 경건한 유대교인들 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 이라는 말은 언어는 달라도 유대교라는 같은 종교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이 일어납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그도 그럴것이, 한 두사람도 아닌 120명의 사람이 일제히 여러가지 언어로 선포하는 광경을 상상해보십시오.
혼돈과 놀라움 그리고 기이함으로 소동하였을 것이 눈에 선 합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놀랍울 정도로 각자의 언어로 충분히 알아듣고 이해할 정도의 유창했을 것입니다. influent
마치, 길을 가다가 만난 외국인이 한국말을 아주 잘하면 놀라는 느낌이 이런 느낌 아닐까요?
그냥 “안녕” “감사합니다” 이런 수준이 아니라, 유창하게 말을 한다면 어떨까요?
만약에 외국의 어느 낯선 여행지에서 택시기사가 “나 안산에서 5년 있어요” 라고 말을 꺼낸다면 놀라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이 사람들이 더 놀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오순절 이전에는 이런 언어의 능력이 없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무리들을 더 놀라게 했던 것은 120명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많은 인원이 그 많은 사람이 모인 예루살렘에서 모여서 기도하고 있다면
이들에 대한 소식은 예루살렘 전체에 이미 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대략의 정보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 그들의 출신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여기서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당시 갈릴리 라는 지역의 이미지와 위상 때문 입니다. 주님도 갈릴리 나사렛 출신으로서 불리곤 했습니다.
또한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에 주님의 출신만으로도 무리들의 이야기 꺼리가 되었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왜 일까요? 갈릴리가 뭐가 문제 일까요?
존 스토트는 <사도행전:땅끝까지 이르러> 라는 책에서…그들이 놀라고 기이히 여긴 이유에 대해 설명 합니다.
“그들은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다고 알려진 갈릴리 사람들임을 알고 있었다(7절).11 갈릴리 사람들은 또한 후음을 발음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말할 때 발음을 우물거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을 촌티가 난다고 얕보았던 것이다.12 그러므로 군중이 당황하는 반응을 보인 것(6절)111 11 참고. 요 1:46; 7:52.
12 12 Longenecker, Acts, p. 272. 또한 독특한 갈릴리 악센트에 대한 언급으로는 마 26:73과 눅 22:59을 보라.
1 존 스토트, 사도행전: 땅끝까지 이르러, ed. 모티어, 스토트와/과티드볼, trans. 정옥배, 개정판., BST 성경 강해 시리즈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9), 90.
실제로 마태복음에서도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여기서 말소리 라는 베드로가 쓰는 갈릴리 방언이 다른 지역 언어와 구분이 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시대에는 아람어를 주로 섰는데, 같은 아람어를 써도 갈릴리 악센트나 후음을 흐리는 습성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당시 갈릴리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이 존재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주 비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선한 것도 훌륭한 선지자도 기대할 수 없는 그야말로 어둠속에 앉아 있는 백성의 상징과도 같은 가장 낙후된 곳이 바로 갈릴리 였습니다. 특히나 이방인들의 왕내가 잦아 혼혈족이 많다하여 일명 전통 유대인들의 천대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마치, 사람들을 피해다니고 옆에 빗자루를 차고 다니며 자신이 걸어다닌 길은 부정하다하여 비질을 해야 하며 도시의 하수구청소를 도맡아서 해야 하는 인도의 불가촉천민과도 같습니다. 천한 직업을 가졌다고 하여 천대를 받던 조선의 백정들과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식 언어교육을 받거나 외국에 나가서 생활할 기회조차 없었던 그들이,
자신의 모국어 조차도 수준 있게 구사하거나 교양있게 할 줄 몰랐던 갈릴리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쏟아져 나와 각 나라의 언어를, 자신의 언어를 유창하게 하는 모습에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요?
또한 그들이 더욱 놀란 것은 그들이 자칭 타칭 경건한 유대인이었기 때문 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언어를 구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하루 하루 살기 바쁜 어부나 소작농 이라고만 생각했던 갈릴리 사람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각양 외국어로 그것도 유창하게 더군다나 교양있고 영성있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을 예언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전부터 들어오던 구약성경의 아주 박식함과 전에 들어보지도 못한 열방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까지 높은 지식과 깊은 영적인 계시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수준 높은 경건이 녹아 있는 말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11 (KRV)
…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놀라운 방언의 역사를 경험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방언은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한 방언의 은사와는 조금 다른 은사 입니다. 고린도전서 12:10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기도 입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방언기도는 영적인 하늘의 언어 입니다.
이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이 통변의 은사를 받았으면 그 기도의 의미를 알고 방언의 은사를 받았으나, 통변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영적 기도로서 영의 성장을 경험 합니다. 되도록이면 통변의 은사를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120문도의 방언은 통역 없이 각 나라 말로 이해가 되는 역사 입니다.
오늘 본문의 방언은 사람들에게 하늘의 놀라운 일을 전하는 방언, 즉 실제로 외국어를 하는 권능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하기 위해서 성령님은 바람과 불의 혀로 제자들에게 임하셨고 언어의 변화로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언어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 입니다. 언어의 변화는 삶의 지향점의 변화 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인생에 성령의 권능이 임하면 그 언어 자체가 계시의 말씀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몰랐던 영적 깊히를 깨닫고 그것을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적용
사람이 언어는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언어는 우리가 앞으로 이렇게 살겠다 하는 선포이고 그 사람의 생각과 영혼의 됨됨이를 나타냅니다. 더 나아가, 성령의 권능이 임하면 우리의 언어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감정을 이야기하는 수준에서 내가 알지 못하고 내가 하지 않았던 하늘의 언어,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의 사랑의 깊히가 얼마나 깊은지 깨달아 알고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시대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영이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언어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어는 중요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또한 마음은 아무변화나 성숙도 없이 언어만 교양있게 하려는 시도는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원래 하던 말과 원래 자신의 생각을 들어내게 합니다.
성령으로 변화를 받으면 제일 먼저 언어가 바뀝니다.
성령의 언어는 나의 말을 제어 합니다.
언어란 본래 나의 생각과 나의 감정을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 합니다.
성령의 언어란 나의 생각을 제어하고 성령이 하게 하시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 (KRV)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어쩌면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입니다.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 아이 같이 한 마디 한 마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또박 또박 따라서 소리를 내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모든 과정을 뛰어 넘어, 원래 부터 신앙이 있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원래 영성이 있었던 것처럼 또 다른 사람신앙생활하는 것 겉모습만 따라 하다보면, 언젠가는 우리의 신앙의 밑천이 들어납니다.
교만해지고 자고해지고 신앙생활 오래했네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본의 아니게 상처주고 새신자가 낙망해서 교회 안나오는 일도 벌어지고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신앙생활은 말부터 배워야 합니다.
성령의 언어를 겸손하게 배워야 합니다.
성령의 언어는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내 언어가 성령의 언어인지 어떻게 아냐?
다 들어보셨겠지만 말에는 말투, 말씨, 말씀 이 있습니다.
말을 생각 없이 툭툭 던지면 “말투”. 말의 씨는 “말씨”. 생명을 맺으면 말씀, 그렇지 않으면 그냥 말.
내가 오늘 심는 “말씨”가 무슨 “말씀”을 맺는지 보면 됩니다.
갈라디아서 5:22–23 (KRV)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만약에 참아주지도 않고 폭력적인 말을 하며 나의 잘됨을 질투하고 자기 자랑만 하고 교만한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겠습니까?
인류의 언어가 최초로 혼잡하여진 계기를 생각해보십시오.
교만의 바벨탑은 인간의 단합을 목적으로 쌓았지만 사실은 교만의 탑이었고 그 교만은 화합이 아닌, 언어가 혼잡하여져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교회와 사회와 모든 인간관계에서 분열의 시작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성령의 언어는 연합하게 하고 허물을 덮습니다. 사랑하고 어긋났던 관계를 회복하고 약한 사람을 보듬어주며, 한강다리로 가던 사람도 그 발길을 되돌리게 하는 말 한마디가 바로 성령의 언어 입니다.
왠지 모르게 그 사람을 만나면 신앙이 크는 것같고 그 사람만 만나면 마음에 힘이 나고 그 사람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어둡던 마음이 긍정적인 면을 보게 되는 생명을 살리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말이 성령의 말 입니다.
그날 오순절에 그 많은 사람은 성령의 권능을 체험 합니다.
이후의 무리들의 반응 어뗐을까?
사람은 아무리 놀라운 일을 만나도 처음에는 믿을까 하다가 쉽게 믿지 못합니다.
여전히 의심하고 때로는 저항 하고 어떤 이는 조롱 합니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백성들은 놀랐지만 그 중에 믿는 이는 아주 적었습니다. 마찬가지로 120문도를 통해 보이신 권능을 보고도 백성들은 여전히 의혹하고 조롱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보고도 나름대로 자신의 해석을 내리고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고
한술 더 떠서 조롱까지 합니다.
그래도 니들이 갈릴리 무지랭이들인데… 내가 니들을 아는데, …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 너희에게 임할리가 없다는 생각인것입니다.
오늘 나의 언어를 돌아 봅시다.
나의 언어는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랑을 실천하는 언어 인지 생각해봅시다.
아니면 의혹을 키우고 흠집내며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고 조롱하는 언어는 아닌지, 과거의 부족한 점을 걸고 넘어지는 언어들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만일, 나의 언어가 성령의 언어가 아니라면 오늘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언어를 말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일어 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일어 서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일어섭니다. 그리고 소리 높여 외칩니다.
베드로야 말로 갈릴리 어부요. 거기 모인 경건한 유대인들이 볼때,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 입니다. 그가 조목 조목 하나님의 말씀을 학자와 같이 인용하고 그 구절마다 담긴 깊은 의미를 이해하며 그 말씀의 성취가 오늘 바로 이곳에 이뤄졌다는 것을 정확히 연결 시켜 선포 합니다.
이전 까지 베드로는 무슨 말들을 주로 하고 살았을까요?
평범하고 개인적이며 사소하고 소소한 이야기와 대화하는 일에 자신의 언어를 사용 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 어느 성경학자 보다 박식하고 깊히 있는 통찰과 현실에 밀접하게 연관이 된 언어로 과거에 있던 일과 오늘에 일어난 일과 앞으로 있을 일들을 예언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제 증언하는 성령의 언어에서
선포하는 예언의 언어로 변합니다.
오늘 이곳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설명하겠으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터무니 없는 의혹과 조롱에 대해 어떻게 대응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 터무니 없는 의혹과 조롱에 대해 베드로와 사도들은 연연 하지 않고 간단하게 일축 합니다.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술취한 것 같다는 말은 말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전통에 오순절 아침에는 금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술을 먹을리는 만무 합니다.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농담에는 약간의 깔보는 마음도 담겨져 있습니다.
세상적인 말에는 상대를 높이기 보다는 깍아 내리는 말이 존재 합니다.
세상적인 언어에는 믿음 보다는 불신이 더 크게 잡혀 있습니다.
이럴때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고 묵묵부답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대로 말하면 됩니다. ‘시간이 몇씨인데, 술을 먹었겠냐?’ 하면 됩니다.
본질이 아닌 것에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에는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묵묵히 봉사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저와 같은 리더 만큼이나 교회에 없어서는 안될 분들 입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교회 일을 남들은 꺼려하는 교회 봉사를 묵묵히 해나가다보면
그러면 안되는데 무시당하는 것같을때도 있고 인정도 못받는 것같아 서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상급은 하늘 나라에 있는줄로 믿으시면 위로가 있을줄로 믿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성령의 권능을 받아 이제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시점이고 새로운 성령의 시대 복음의 시대가 열리는 중차대한 이 시점에
베드로와 사도들은 무리들의 ‘의혹과 조롱’은 큰 일이 아니었고 본질도 아니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오늘 이곳에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 였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베드로는 벅찼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다음주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적용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 증인이 되는 일에 무슨 자격증이 필요 할까요?
베드로와 사도들은 갈릴리 사람들 이었습니다.
가장 낮고 비천한 사람들이었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세상적인 자격이나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런 존경받을 만한 것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 앞에 의혹이나 무시나 조롱이나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볼품 없어도 내 사명이 분명하다면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나는 십자가의 전달자요 부활의 증인 입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으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을 나눠서 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 모든 일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함 입니다.
사도들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게 하기 위해서 집사들을 세웠듯이 교회에서 하는 일들은 잘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나눠서 짐을 지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할줄 모릅니다.
나는 능력이 없다는 말은 교회에서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는 높은 지식 으로 전도하는 자가 아니라,
성령이 하라 하니, 전도지 들고 나가서 듣든지 듣지 않든지 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라 하시니 내가 언변이 좋든 그렇지 않든 슬픈 마음 있는 자, 찾아가서 위로하고 몸과 영혼 병든 자, 또 찾아가서 예수 전하면 되는데,
무슨 능력이 필요 합니까?
가장 큰 영성은 겸손이요 순종이요 하나님의 마음으로 생명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성령의 충만한 마음일줄로 믿습니다.
누구든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부족해도 연약해도 그 권능으로 증인 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오늘 여러분의 있는 자리에서
기도 하십시오.
주님의 성령 주시옵소서.
충만하게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권능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심령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변화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의 언어가 성령의 권능의 언어, 사랑의 언어로 변화 받게 하소서.
주님의 증인 되게 하소서. 증인된 삶 살게 하소서!!
기도 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