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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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가장 두려워 할 것
가장 두려워 할 것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갈릴리를 지나가시면서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중요한 것]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셨고, 그 것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중요한 그 가르침은 바로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에 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조용히 다니시면서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가르치려고 하셨던 겁니다.
바른 신앙을 고백한 제자들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향한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고 계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자들이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깊이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 하셨던 것이겠죠.
[이유식]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못깨달았으면 예수님께 물어야 하는데, 그 사실을 묻기조차 두려워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묻지 못할만큼 두려웠을까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쳐서 드리고 있는데, 게다가 이제서야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 메시야이신 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는다고 말씀 하신다?
제자들은 아마도 이 말 자체를 받아들이기 무서웠고,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고난이나 죽음이라는 말 자체를 듣고 싶지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신앙의 길에 대해서 듣고 싶어 하지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한면 어떻게 될까?
깨닫지 못한면 어떻게 될까?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되기에 우리는 이 깨닫지 못함을 경계해야 하는 것일까요?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깨닫지 못해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어이없게도 누가 더 크냐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의 길을 가시는데, 제자들은 그 길 위에서 누가 크냐로 다투었으니, 스승과 제자의 삶이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깨닫고 살지 못하면 누가 크냐로 다투는 어이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깨달음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라고 해석하면서 우리는 경계할 필요가 인는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워해야할 일은 “깨달음이 없는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깨달음이 없으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깨달음이 없으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깨달음이 없다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문제는 나에게 우리에게 그런 깨달음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요?
깨달음이 없는 사람을 지적해서 고치고, 꺠달음이 없는 나는 지적을 당해서 고쳐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교회는 온통 지적질과 헛된 가르침이 난무하는 전투장이 되어버리지 않을까요? 그건 당연히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지요.
예수님은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하신 일은 세가지 정도로 정리가 됩니다.
첫째, 계속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미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동일한 가르침을 계속하셨습니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더 자세히, 더 깊이 계속 가르치셨습니다.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다는 것이죠.
둘째,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교육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방법을 자주 사용하셨죠.
예수님의 질문으로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유치한지 깨닫게 되었을 것이고, 예수님은 그 질문을 통해서 높아짐과 낮아짐에 대해 제자들에게 또 다시 가르쳤습니다.
셋째, 일상과 연결된 가르침을 주십니다.
높아짐과 낮아짐에 대해서 가르치신 후에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예수님은 매우 어려운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비유를 끌어와서 설명하십니다.
매우 어렵고 난해한 가르침보다 좋은 것은 일상과 연결된 가르침이라 생각 합니다.
예수님은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을 안타까워 하셨는데, 그 안타까움으로 인해 하신 일은 결국 ‘계속 가르치시는 것’이었거든요.
깨달음이 없는 문제는 올바른 가르침을 계속 받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말씀 묵상을 혼자서만 할 수 있을까?
말씀 묵상을 혼자서만 할 수 있을까?
가르치고 질문하고 일상과 연결시키는 것. 말씀 묵상을 표현하는 문장이 되어버리네요. 이 말씀 묵상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늘 가까이하고, 묵상하는 공동체, 신앙생활에 힘쓰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하는것 같습니다.
말씀묵상을 혼자서만 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이기도, 오류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혼자서 거룩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확률이 매우 희박합니다. 반드시 올바른 가르침이 주어지는 건강한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가르침, 올바른 설교가 계속 있어야 하고, 꺠닫게 하는 질문이 계속되어야만 거룩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다는 건데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해서 교회에 함께 모여 예배하기를 힘써야 하고, 그 안에서 함꼐 성장하고자 계속해서 발버둥 쳐야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올바른 가르침과 올바른 질문이 있는 건간한 공동체가 바로 우리 성산교회 청년부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한 공동체에 속해 있을 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수 있는 깨달음이 조금씩 조금씩 우리가운데 더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깨닫게 될 수록 헛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적어지고 꺠달음이 없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성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함꼐 모이기에,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기에 더욱 힘쓸 수 있는 우리 청년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축도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 충만하신 역사가
가르치고 질문하게 하고 일상과 연결되어지는
은혜를 이땅가운데서 날마다 함께 누리길 소망하는
우리 성산의 청년들의 머리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