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믿음, 아내인가 누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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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오늘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시작 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올라온 것은 몇 살 때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노아가 세상을 떠날 때, 그즈음에 하란으로 올라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서 파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업이 잘 안되어 고향인 하란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하란에 와서 10년 정도 살고 있을 때 아브라함이 75세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단번에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단번에 응답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세리 마태도 역시 예수께서 부르실 때 단번에 응답하고 나온 인물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갈바를 알지 못하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자신의 사명이 뭔지도 몰랐지만 그냥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의 사명을 몰랐지만 상당히 세월이 흐른 후에 알게 됩니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데 당장 이삿짐부터 챙겨 가지고 대문을 나서라고 하면 당장 그렇게 할 사람은 많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갈 길을 모르지만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신실히 응답을 한 그의 일생은 훗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 본인이 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믿음의 이야기는 아들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요셉으로, 요셉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쭉 이어져 오다가 나중에 모세가 기록하여 남김니다.
- 사라의 이야기
- 사라의 이야기
그런데 말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하란을 거쳐 가나안까지 백 년이 넘는 역경의 세월을 거친 아브라함과 같이 함께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라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이야기를 하려고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의 삶은 아주 깨가 막 쏟아지는 금실 좋은 결혼생활이 아니었지만 사라는 아브라함의 조강지처였습니다. 그리고 긴 세월을 함께 하며 귀중한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을 잇는 아들 이삭을 낳아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광야에서 통곡하고 사라의 죽음에 안타깝고 힘들어 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여정에 있어서는 정말 중요한 동역자요 아내였습니다.
조금더 자세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입니다. 아버지가 같았던 것이지요. 어린 시절 두 사람은 어머니가 달라 한 장막에서 살지는 않았겠지만 아버지가 같았으니 한 가족으로는 살았을 것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 보다 10살 아래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빠인 아브라함은 사라를 어릴 때부터 쭉 지켜보며 함께 자랐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쁜 동생을 참 잘 대해 주었을 것이고, 사라도 그런 든든한 오빠를 커 가면서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같은 장막에서 지내지는 않았지만 가족처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지냈을 것입니다. 혈통을 중요시 생각하고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큰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 두 사람도 이것이 싫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사촌남매간, 이복남매간, 삼촌-조카간 결혼이 흔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도 이러한 결혼이 많았었다고 합니다.)
장래를 촉망받던 아브라함과 아름다움으로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던 사라는 모두가 축복하는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아주 믿음직한 남편이었고,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아주 아름답고 소중한 아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누이로 지내던 사이가 바로 완전한 부부 사이로 변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누이로 지내던 시간이 꽤 오랜시간이었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특히 사라를 누이로 귀여워하던 아브라함에게는 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사라가 아내로 보이다가도 불쑥불쑥 옛날의 누이 모습이 겹쳐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둘 사이에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사라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아브라함의 무의식 속에 몰래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중에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하는 말도 쉽게 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여
-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하란을 떠날 때입니다. 일흔 다섯 살의 나이로 아브라함은 아내와 조카 롯과 자신의 소유와 하인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사라는 평안히 잘 지내고 있던 하란을 떠나기 싫었지만 남편 아브라함의 소명을 따라 아브라함을 믿고 따르기로 합니다.
언젠가 제가 한번 설교 말씀을 하였던 아브라함의 “떠나고 버리고 드리라” 기억하시나요?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하란을 떠난 것이 하나님의 음성에 따른 것이었으니 그들의 기대는 매우 컸을 것입니다. 당장 무엇인가 별천지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각했던 별천지가 아닙니다.
이미 그곳에는 많은 이방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기에 정착하기란 정말 버거웠을 것입니다. 거기에 가나안으로 들어서자 업친데 겹친다고 가나안 지역에는 기근까지 찾아옵니다.
별천지를 기대했던 그 기대가 무너지면서 아브라함은 약속의 말씀인 “이 땅과 수많은 자손과 복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 상황으로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발을 띄었던 그 발걸음을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리게 됩니다. 발길을 돌려 먹을 것이 풍부하다는 애굽 땅을 향하여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애굽 땅에 들어서면서, 아브라함은 어여쁜 아내인 사라를 애굽사람들에게 뺏기고 자신마저 죽을까봐 사라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누이라고 하자고 말합니다. 쩝~사라는 오빠이자 사랑하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그렇게 하기로 합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그렇게 합니다. 애굽에 들어가자, 사라의 미모에 애굽왕 바로가 반하고 어여쁜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 하자 애굽왕 바로는 사라를 데려가고 보답으로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물을 줍니다.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참담했겠지요. 일단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거짓말은 했는데 아내를 빼앗겼으니 이제 다시 아내 얼굴을 볼 수나 있을까?하는 생각과 여러가지 감정들이 교차 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라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사라! 역시 힘든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남편은 개~뿔~ 뭐 이런거 아닐까요? 모두들 생각하시겠지만 이 사건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누이라 거짓말 한 이 사건, 두번이나 같은 방식의 거짓으로 자기 목숨만 지키려 한 아브라함의 태도는 납득이 되지를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성경에 기록한 것은 무언가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면서도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모습에서 보면, 오히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정말 찌질한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 믿음의 성숙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생각을 해보면, 처음에 믿음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는 믿음의 초기 단계에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정말 내가 잘 하고 있나? 나에게 믿음은 있기는 한건가? 믿음을 생각하면서 의심을 함께 하였던 아이러니한 때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좀더 현실적으로 당장 세상과의 결별을 생각할 때, “세상에서 좀 즐겼던 생활은 이제 끝이고 재미없는 무미건조한 생활이 되지는 않을까? 혹은 나의 이러한 변화가 세상의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비칠까?, 그들이 나를 받아 줄까?, 이제 완전 왕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살면 세상에서 실패하는 삶이 되는 것은 아닐까?”
믿음의 생활을 하려고 다짐한 생각에 의심의 생각들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의심케합니다. 어쩌면 그게 우리의 믿음의 현주소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작은 의심들이 우리의 믿음을 걸고 들어올 때 우리는 담대하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타협하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적인 삶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반응하고 사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믿음)를 자기 ‘아내’라고 하면, 세상으로부터 왕따(죽음)를 당하지 않을까? 그런 염려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마치 우리들의 믿음처럼 말입니다.
**믿음을 세상에서 내세우면 세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할 것 같은 그런 두려움말입니다.
- 아브라함의 행동에 대해 좀 더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 아브라함의 행동에 대해 좀 더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담대하게 행동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을까요? 왜? 거짓말하는 아브라함을 책망하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애굽왕 바로나 그랄의 아비멜렉을 꾸짓고 혼내주었을까요?
아브라함처럼 주눅이 들어 눈치만 보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행동이 아닌것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리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안 먹고는 우리들의 선택의지라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자유의지" Free Will이라고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인격적으로 대하여 주시는 것인거죠.
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으셨고 거짓말 하는 것 자체도 나무라지 않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고 보시며 기다리시는 것이겠지요. 대신 아브라함 주위의 상황을 정리해 주십니다. 오히려 바로왕을 꾸짖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왕 바로에게 거짓말로 사라를 넘기는 사건이후에 또 한번 더 자기 아내인 사라를 넘깁니다. 그랄지역의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또 다시 팔아 넘깁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사라를 빼앗기지 않은 아브라함이지만 그는 담대하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을 하며 삽니다. 최소한 차책은 했겠지요.
아내를 팔아먹다시피 했으니, 뭐 많은 재물을 받는다고 기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작지 않은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로왕이 “왜 그랬느냐?” 따질 때에도 제대로 된 답변조차도 하지 못합니다.
사라 또한 남편의 말에 동의해 바로왕이나 아비멜렉에게 가기는 했지만 얼마나 서럽고 원통하고 억울했겠습니까?
당시의 여자는 무슨 물건같은 존재였다고는 하지만 좀 너무한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네요. 사라의 입장에서 자기 목숨과 재물때문에 자신을 팔아넘긴 아브라함을 남편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세상의 많은 일들이 이와 같음을 봅니다. 아니 우리 믿음생활의 많은 부분이 이와 같음을 봅니다. 교회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봅니다. 그러나 교회를 나가 세상 생활로 돌아가면 우리는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누이”라 합니다.
처음에는 세상의 왕따가 두려워 거짓말 하고 후회를 해 보지만 그때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대로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거나 거짓말은 어디까지 해도 된다는 자기의 선을 긋곤 합니다.
“누이”면 어떻고 “아내”면 어떤가? “사라”가 있기만 하면 되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저는 모태신앙이 아니지만 특히 모태신앙을 가지신 분들 가운데 이런 경험을 이야기 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아브라함, 믿음의 아이콘 아브라함,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믿음으로 자신과 가족, 모든 하인들까지 할례를 시킵니다. 수 많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롯이 거주하던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을 지켜보았습니다. 또한 늦은 나이었지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이런 저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있음을 보는데도 우리의 눈이 어두어 우리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에바다’ 눈이 열리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관계를 묵상하면서 저는 우리 스스로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 거짓말 했던 것처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듯이, 줄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면서 부인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사랑의 기억
첫사랑의 기억
예수님을 만난 그 때, 처음 만났을 때 첫사랑의 짜릿한 감동, 어쩌면 이제 너무도 익숙해져서 첫사랑의 찌릿찌릿한 감동(“두려움이나 설레임이나 떨림등”)은 점점 둔해지고 없어지지 않았냐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요?
애굽왕 바로 또는 그랄왕 아비멜렉에게로 팔려가는 사라의 뒷모습에서 우리가 버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그의 억울함과 안타까운 분노와 눈물을 봅니다.
그러나 그 눈물 너머로, 아브라함을, 아니 우리를 감싸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도 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우리의 깨달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깨우쳐 주시려고 노심초사, 불철주야 온갖 방편을 마련해 주시느라 오늘도 바쁘실 것 같습니다.
오늘 이시간에 이 말씀을 통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위대함을 우러러 보기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되기까지 아브라함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느끼게 됩니다.
지금까지 저를 사랑하시고 늘 저와 함께 동행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하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