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민족을 향한 포괄적인 하나님의 은혜 2024 0311 창36: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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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창세기 36:31–43 (NKRV)
31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32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의 이름은 딘하바며
33 벨라가 죽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4 요밥이 죽고 데만 족속의 땅의 후삼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5 후삼이 죽고 브닷의 아들 곧 모압 들에서 미디안 족속을 친 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아윗이며 36 하닷이 죽고 마스레가의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7 삼라가 죽고 유브라데 강변 르호봇의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8 사울이 죽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9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고 하달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바우며 그의 아내의 이름은 므헤다벨이니 마드렛의 딸이요 메사합의 손녀더라 40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은 그 종족과 거처와 이름을 따라 나누면 이러하니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41 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42 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43 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라 이들은 그 구역과 거처를 따른 에돔 족장들이며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
누가 진짜 축복을 받았는가?
누가 진짜 축복을 받았는가?
이삭의 축복은 누구에게로 흘러갔는가? 축복권은 누가 받았는가? 야곱이. 형 에서,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도 그 축복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축복이라는 단어가 주는 풍요로움은 당장에 야곱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에서가, 그의 민족이 야곱/이스라엘보다 훨씬 먼저 세상적인 풍요/성공을 이루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시절에 먼저 왕으로서의 왕국을 형성하고 번성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장자권을 뺏어간 야곱을 죽이지도 않고 - 물론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지만 - 용서하는 대인배적인 성격도 보여준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죽어라고 장자권, 축복을 빼앗은 야곱은 실패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고, 에서는 성공의 길을 걷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의 계획하심에는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그의 어머니 태에 있을 때부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자칫 불공평하다고 외칠만한 근거를 가질지라도, 그렇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신앙인들은 세상의 시선과 기준과 잣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되는 에서의 선택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되는 에서의 선택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후손에서 탈락됐다. 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바람과는 달리 가나안 여자들과 결혼했다. 또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떠났다. 에돔 지역은 지금의 사해 동남부 지역을 이야기 한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있었던 에서는 그곳을 떠났고, 외지에 있었던 야곱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 가나안 땅에서 태어난 에서의 자녀들은 가나안 여자들과 결혼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됐고, 밧단아람에서 태어난 야곱의 아들들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1) 민족의 뿌리를 떠났고, 2) 약속의 땅을 떠났다.
끝까지 붙어있어야 한다. 신앙생활 좀 하다가 시험 받았다고 교회 좀 쉬어야겠다? 스스로 구원의 길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영적인 문제에 육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 뿐이다. 자녀가 부모에게 한 소리 들었다고, 그럴 때마다 집 나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붙어있어야 한다. 끝까지 붙어있어야 한다. 끝까지 예수를 붙들어야 한다. 악한 사탄 마귀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하나님 곁에서 떨어뜨리려고 애를 쓴다. 교회 밖에서의 유혹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내 신앙을 흔들려는 모든 시도들은 다 나를 하나님 곁에서 떨어지게 만들려는 속임수다. 이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된다. 신앙생활 연수가 차면 이 영적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수로 해석해야 한다. 현실을 보지 말고, 예수로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고, 교회에서 섭섭한 일이 생겼어?” 그럼 얼른 정신 차리고 예수 이름으로 내 안의 섭섭마귀들을 대적하고 물리쳐야 한다.
더 귀한 것을 선택하라
더 귀한 것을 선택하라
야곱 전승에서 곧바로 요셉 전승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래도 에서에 대한 이야기를 성경은 주의깊게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과 진짜 축복에 관한 관점을 제외한다면, 성경은 에서의 성공과 그의 민족의 번영을 꽤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을 덧붙이고 있지는 않다.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성공과 번영은 하나님께서 인간사회에 허락하신 것이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있지는 않는다. 에서의 장자권은 유효하지 않다. 그의 성공과 번영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성공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의 성공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귀한 것.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선택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고난과 기쁨을 모두 맛보는 언약의 후손들. 우리 삶은 어차피 슬픔과 기쁨이 혼재한 삶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어떻게 이끌어가시는지를 기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기준으로 강한 사람, 위대한 사람을 찾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들의 연약함 가운데 강함으로 나타나신다.
그러나 언약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신다.
그러나 언약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신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하게 놓치지 말고 가야하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주제를 놓고 언약의 상속과 그것에서 탈락된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이삭의 형제 이스마엘을, 야곱의 형제 에서를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마엘과 에서의 민족의 번영까지도 창세기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만 하나님의 선택과 그 언약의 지속이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 아들들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스마엘과 에서의 민족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 모든 민족을 돌보신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공동체로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무시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당신의 자녀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당신을 잘 믿는 사람들만 구원하기 위해 예수를 보낸 속 좁은 신이 아니시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교는 여전히 편협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이미 성경에는 신명기 23:7 “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이방 민족에 대해 하나님의 시선이 어떠한 마음으로 향하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다.
이사야 19:23–25 “23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이사야 19 장의 비전을 보면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흘러가는 세상 민족에게 있어 복의 근원이 되는 언약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 된 다른 민족들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에서의, 에돔 족속의 족보가 우리에게 주는 은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선택받은, 즉 우리가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으로서 세상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선택받은 것에 대해 자위하는 것이 아닌,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결국에는 한 새사람을 이루는 하나님의 큰 비전을 깨달아 가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