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막 8: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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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살펴본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수많은 기적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그 분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우둔함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또다시 사천명을 칠병이어로 먹이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변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우둔하고요, 여전히 믿음이 없습니다. 그결과 예수님은 전해 보지 못한 심한 꾸중을 제자들에게 들려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어서 배에 떡이 하나밖에 없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마침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시며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부정한 것, 악한 경향성등을 상징합니다. 바울도 음행한 성도를 방치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버리라”고 경고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누룩’은 음행을 비롯한 각종 죄악을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누룩은 성경에서 별로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룩은 쉽게 말해 곰팡이입니다. 곰팡이의 특징은 바로 전염성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은 바로 그들로부터 전염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들처럼 보고도 믿지 않는 불신앙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어떤 대답을 합니까? 1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무슨 말입니까? 우리에게 떡이 없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말입니다. 즉 제자들은 누룩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자기들이 떡을 안가져왔다며 꾸중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벌써 두 차례나 수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인데, 배에 탄 10명이 먹을 빵이 없다고 해서 예수님이 꾸중한다고 생각한다니 얼마나 멍청한 제자들입니까? 제자들의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그동안 참고 참았던 말씀을 17절부터 쏟아 놓으십니다.
특별히 1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이 말씀은 이 사야 6장 9-10절을 인용한 것으로 마가 복음 4장 12절에도 등장하는데요, 이 때 예수님은 가르쳐줘도, 보여줘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제자가 아니라 외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라다니며 모신다고 자부하던 그 제자들이 예수님 밖에 있는 자들, 곧 외인과 다를바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제자들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17절은 그들의 마음이 둔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의 둔한 마음은 예수님을 적대하며 가르쳐줘도 보여줘도 믿지 못하던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완악한 마음과 다를바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분의 말씀을 귀로 들었지만 그것을 마음에 각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생생히 기억하지 못했습니다.그냥 그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문제가 생기면 이전에 보여주신 그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까맣게 잊고, 불평만 늘어놓거나 걱정하고 근심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광야에서 원망하는 출애굽기의 이스라엘 백성과도 닮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을 애굽땅에서 건져주시고 인도하시며 지금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여러가지 이유로 원망했던것 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수많은 이적을 베푸신 예수님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문제 앞에서 의심하고, 예수님의 질문에 걱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들이 우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어떠합니까? 과거의 역사들을 바라보면서도 우리에게 수많은 은혜가 나타났으면서도 우리도 여전히 이러한 역사를 반복하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도 제자들처럼,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산다면 보고도 믿지 않은 완악한 자가 되어 버린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과거에 믿음이 있고,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며 산다고 해도 제자들이나 다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고 미래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되 제자들처럼 우둔하지 말고,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해 주시고, 어떠한 상황에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시고, 우리의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해법을 주십니까? 22절부터는 예수님께서 벳새다의 한 맹인을 고친 사건을 소개합니다. 멧세다가 어떤 곳이었습니까? 요한 복음에 따르면 벳새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빌립의 고향이었고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벳새다는 예수께서 많은 권능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완악하고 불신의 마을로 나타납니다. 앞서 갈릴리 바다 동편 지역에서 귀먹고 말하지 못하는 자들을 고치실때처럼 이번에도 예수님은 그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은밀하게 치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예수님은 한 번에 고치시지 않고 두번에 걸쳐 고치셨습니다.사실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요,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약해져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예수님의 의도된 행동이라고 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진 특권이 이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제자들이 보인 모습은 예수님의 가릠을 깨닫지 못하는 우둔한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시각 장애인의 상태와 같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시각 장애인에게 두 번째 안수하셔서 완전히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는 그런 영적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지 못하고 실수만 하는 제자들이지만, 장차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나면 그분이 진정한 메시아 이심을 밝히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