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제사를 드려라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7 views올바른 예배란 하나님이 우리를 감동시켜주심에 합당한 반응으로써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Notes
Transcript
1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2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
3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4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5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6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50 편은 표제어에서 나온 것처럼 아삽의 시입니다. 아삽은 다윗 왕 때 성전에서 찬양대장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아삽의 역할은 찬양인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앞에서 주도적으로 찬양을 이끌었던 사람이었죠. 그는 총 12편의 시편을 작성했으며 성경은 그를 가리켜 선견자 곧 선지자라고 칭합니다.
시 50 편의 전체적인 구조는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 백성을 불러 모으시고 그 언약 백성과 악인들에게 각각 경고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4-5절을 보면,
4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5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그 경고의 내용은 언약 백성과 악인들의 오해에 관한 것인데, 그 오해란 구체적으로 제사에 관한 착각과(시 50 9-15) 죄악에 관한 착각(시 50 16-21)입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언약 백성들이 가졌던 제사에 관한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4절에 “자기 백성을~”이라고 말하며, 5절에 “나의 성도들을~”, 7절에 “내 백성들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성도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들로서, 하나님께 충성할 의무가 있는 자들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지금 예배 자리에 나아온 구원받은 백성들,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께 충성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고, 본문의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이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착각과 오해는 무엇이 있는지,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살펴보고 말씀의 제목처럼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배에 대한 잘못된 오해 첫번째는 하나님을 희생 제물에 굶주린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물로 책망을 받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지 않았거나 혹은 너무 적게 드렸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8절을 새번역으로 함께 읽어볼까요?
8 나는 너희가 바친 제물을 두고 너희를 탓하지는 않는다. 너희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나에게 늘 번제를 바쳤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면적인 의무는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드리는 희생제물이 언제나 넘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제물” 자체로 너희를 탓하지는 않는다고 하신 것이죠.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뭔가가 필요하셔서 제사를 원하신다고 착각했습니다.
고대 근동 이방인들은 자신들의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그 제물로 신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제물을 통해 신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나의 소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9-13절을 새번역으로 함께 읽어볼까요?
9 너희 집에 있는 수소나 너희 가축우리에 있는 숫염소가 내게는 필요 없다.
10 숲 속의 뭇 짐승이 다 나의 것이요, 수많은 산짐승이 모두 나의 것이 아니더냐?
11 산에 있는 저 모든 새도 내가 다 알고 있고, 들에서 움직이는 저 모든 생물도 다 내 품 안에 있다.
12 내가 배고프다고 한들, 너희에게 달라고 하겠느냐? 온 누리와 거기 가득한 것이 모두 나의 것이 아니더냐?
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숫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의 것인데 내가 이방 신처럼 수소의 고기를 달라하고 염소의 피를 너희에게 달라고 하겠느냐? 내가 부족해서 너희에게 가져오라고 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마치 이방인들이 제물을 통해 자신의 신을 움직였던 것처럼 나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다. 너희는 그렇게 나를 이방신 취급하며 모욕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제물이 아니다. 바로 너희의 마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렀던 잘못된 예배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지성이면 감천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열심, 지극한 노력을 통해 신을 감동시켜 우리의 소원을 이룬다는 것이죠.
다른 종교들을 봐보세요. 대부분이 이러한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신이 깔려있습니다. 무당이 굿을 왜합니까? 신을 움직여야 하니까요. 왜 무당에게 찾아가요? 신을 움직여야 하는데 내가 신이랑 친하지 않으니까. 신이랑 더 친한 무당에게 찾아가 너가 부탁해보라는 것이죠. 그러면 무당이 하는 말은 뭐예요. “정성이 부족하다. 더 정성을 보여라”라고 하잖아요. 불교에서 삼천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하면서 뭘 빌어요? 우리 손자 손녀 잘 되게 해달라고, 자식들 사업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죠. 이러한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신이 기독교 안에도 들어 있습니다. 왜 일천번제를 드리죠? 왜 금식하죠? 왜 새벽예배에 나오죠?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하는데 제 부탁들어주셔야 해요? 저 이번 이직 돼야해요? 취업 돼야해요? 이런 마음이 있지 않나요?
그러나 기독교는 “지성이면 감천이다” 종교가 아닙니다. 내 열심으로 하나님을 부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감천이니 지성이다”라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찾아와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감동시켜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에 합당한 반응으로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면, 창조를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아담이 살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담의 입에서 어떤 불평도, 결핍도, 불만도 나올 수 없을만큼 완벽한 세상을 만드신 후에 아담을 기쁨(에덴)의 동산에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아담이 기쁨의 동산에 있어서 좋았는데, 1년이 지나니 외로움을 느꼈어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이 과일, 저 과일 다 싫다고 말하고, 그는 40일을 작정하고 금식기도를 했어요. 40일 금식기도가 마치는 날 하나님이 “아이고 내가 너를 못이기겠다”라고 말하며 여자를 만들어주셨나요? 여자를 만드는 것도 아담에 흙 퍼오라고 하셨나요? 아담이 하와를 만나는 과정이 이랬나요?
아담이 외롭다는 정서를 느끼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아담이 기도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먼저 이루시기 시작했습니다. 아담에게 무언가를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재우셨습니다. 그리고 외과의가 되셔서 수술하셨습니다. 여자를 완전히 만드신 다음에 아담을 깨우셨습니다. “아담아 일어나봐. 이거봐바. 짜잔 널 위해 준비했어. 서프라이즈~”
창조때부터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롬 8:32 을 보면,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그분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끼지 않으시고 사랑해주심을 십자가에서 확증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살려달라고 애원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추종자가 되어 끝까지 따라서? 아니죠.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 자기 맘대로 살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조건없이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이죠.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도전에 먼저 사랑해주셨습니다. 어떤 종교가 하나님과 같은가요? 하나님만이 이렇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5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이러한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86 8 함께 읽어볼까요?
8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애초에 우리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00억 자산가에게 100만원짜리 신세계 상품권을 준다고 감동할까요?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인데, 이 세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감동받으시겠어요? 이미 하나님 것인데?
지성이면 감천이다가 아니라 감천이니 지성이다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우리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를 경배라고 합니다.
예배에 대한 잘못된 이해 두번째는,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하는데 드려지는 “제물”아 따라 하나님이 감동받는 폭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기름진 것으로 바치기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보자면, 예배의 횟수나 헌금의 액수에 따라서 하나님이 다르게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더 많은 헌금을 드리면?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수요예배나오면? 새벽예배 매일 나오면? 더 하나님이 감동받으시지 않을까? 내가 매일 봉사하면? 주일학교 봉사하면?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반문하십니다. 11-14절을 새번역으로 함께 읽어볼까요?
11 산에 있는 저 모든 새도 내가 다 알고 있고, 들에서 움직이는 저 모든 생물도 다 내 품 안에 있다.
12 내가 배고프다고 한들, 너희에게 달라고 하겠느냐? 온 누리와 거기 가득한 것이 모두 나의 것이 아니더냐?
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숫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14 감사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의 서원한 것을 가장 높으신 분에게 갚아라.
하나님은 부족해서 우리에게 예배를 드리라고 하신 것이 아니에요. 돈이 없어서 헌금하라고 하신게 아니에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관심은 “제물”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두 렙돈을 드렸던 과부를 기억해보세요. 예수님은 그 과부를 보며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말합니다. 왜요? 과부가 드렸던 10원짜리 동전 두개는 구리가 아니라 금으로 만들어진 동전이어서 그랬을까요? 아니죠, 예수님은 과부의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이처럼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는 개념을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목사님은 선교단체의 대표로 활동하시면서 너무나 바쁘셨습니다. 하루는 사무실에 나갔는데 약속도, 일정도, 설교도 없어서 이게 웬 떡이야 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학교 앞에서 차를 대고 학교 마치는 시간까지 기다렸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나오자마자 아이들을 데리고 에버랜드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했죠. 오늘 에버랜드 문 닫을 때까지 놀자. 평소에는 그런 시간을 내기 어려웠으니까요. 그러니까 애들이 내일 시험이래요. 괜찮아. 아빠가 내일 선생님한테 편지쓸테니까. 내일시험은 아빠 편지로 대신해. 다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염려하지말고 오직 감사함으로 오늘을 즐기자. 그리고 문닫을 11시까지 놀았습니다. 12시에 집에 들어오자 목사님과 아이들이 피곤해 쓰려졌습니다. 그런데 두 오누이가 자면서 이렇게 말했대요. “오빠 우리아빠 진짜 좋지?” 목사님이 잠이 깼대요. 오빠가 이렇게 말해요. “야 우리아빠같은 아빠 없는 것 같아.” 둘이 계속해서 아빠를 영화롭게 하고 있는 것이죠.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시키거나 물어본 게 아니었어요. 그들은 자발적으로 기쁨이 충만하여 아빠를 기뻐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의 기쁨은 개인적인 예배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 예배가 되었고 펠로우십이 됐대요. 둘 사이에서 성도의 교제가 일어난 것이죠.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딸은 전도도 했대요. “우리아빠 얼마나 좋은지 알어?” 그래서 목사님이 핍박했대요. “너 그러면 학교에서 왕따당해 그러지마.” 그러나 딸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전도를 열심히 했대요.
여러분 예배란 이런거에요. 하나님을 좋아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너무 좋은거에요. 좋아해야하니까 좋아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할수록, 알게될수록 좋은 거에요. 여기에서 예배가 시작되는거에요. 그래서 “주님 너무 최고예요. 주님 멋저요.”라고 경배를 드리는 것이죠. 이러한 감사의 마음이 없는 예배라면,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예배라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 아니죠. 우리의 감사와 기쁨의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킴으로 즉, 말씀에 순종함으로 삶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23절을 새번역으로 함께 읽어볼까요?
23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니,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에게, 내가 나의 구원을 보여 주겠다.”
올바른 예배란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할 때,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첫번째는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위해 예배의 질과 양에만 집중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올바른 예배란 하나님이 우리를 감동시켜주심에 합당한 반응으로써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격해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나의 모든 삶을 선으로 이끌어주시는 은혜에 감격해서 “하나님은 정말 최고로 멋진 분이세요. 하나님을 알면알수록 너무나 기쁘고 재밌어요. 주님만 생각하면 제안에 모든 불안도 두려움도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이 충만해져요.”라고 고백하는 것이죠. 이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안에 이러한 기쁨이 없다면, 예배를 생각할 때마다 지치고 지루하고 해내야하는 숙제와 같다면 지금 속히 기도하세요. 우리 신앙에 적색신호가 온거에요. “내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해달라고. 주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주님을 알고 싶은 갈망이 내 안에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이 회복되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고백을 올리는 성도들이 되기시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리 함께 찬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