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수 있거든 무슨말이냐(막 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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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는 변화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변화산에 가셔서 모습이 변형되신 후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장면이 너무 두려워서 베드로는 이곳에 장막 셋을 짓자고 이야기 했지요. 그때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고, 그 가운데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하실때까지 아무에게도 본바를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데리고 변화산에 간 사이에 남은 제자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가 매우 잘아는 이야기입니다. 한 아버지가 귀신들인 아들을 고치려고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마침 예수님께서 안계시는 바람에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내려오실때까지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탄식하시듯이 “믿음이 없는 자라고 하지 않고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 한 사람이 아니라 제자들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 전체를 염두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이 믿음이 없음을 24절에서 시인합니다. 제자들도 귀신을 쫓아내지 못함으로써 이미 그들의 믿음 없음을 보였습니다. 지금 그곳에 있는 서기관들이나 모여있는 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믿음 없음을 세대의 차원으로 확대하십니다. 왜 그들이 믿음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탄이 다스리는 세대의 특징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과 관련하여 세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14절에 나오는 서기관들처럼 예수님이 귀신의 왕에 사로잡혔다고 비난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믿음이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로서,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허풍만 떨 뿐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는 마태 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산을 옮긴다는 말은 구약에 따르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 당시에 겨자씨는 씨중에 가장 작은 씨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나기 위한 최소량입니다. 즉 예수님은 큰 믿음이 아니라 아주 작은 믿음만 있어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대단해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 해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큰 믿음에 대해서 참으로 강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요, 큰 믿음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냥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작은 믿음만 있어도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합니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는 믿음이 없어서 믿음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아이를 데려온 아버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것은 예수님이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의 아들은 어릴때부터 귀신이 들려 고통받았습니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던졌고요, 오늘 본문에서도 그 아이는 귀신의 농간으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고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 아이를 보는 부모의 마음은 과연 누가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절박하게 나아왔지만 오늘 본문은 그가 100퍼센트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22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그는 “내가 반드시 고쳐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냥 할수 있으면 고쳐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23절에서 아주 유명한 말씀이죠? 이 말씀을 하십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러자 그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말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어쩌면 이 절규는 바로 대다수 우리의 모습일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불신이 생겨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12년동안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처럼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도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믿는 담대한 믿음의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아이의 아버지처럼 믿음과 불신사이에서 항상 갈등합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겸손히 주님의 긍휼하심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아이 아버지처럼, 우리의 믿음없음에도, 우리의 오락가락한 믿음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꾸중하시자 귀신이 나갑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왜 자신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질문합니다. 앞서 6장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더러운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받아 가지고 나가 많은 귀신을 실제로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가 기도만이 귀신을 쫓아 낼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기도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믿음의 선포가 곧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기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만했던 것 같습니다. 한때 그들이 귀신을 내쫓은 경험만 믿고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자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세를 유지할 수 잇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능력의 근원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기도외에는 이런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기도하지 않고서도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기도는 신기한 능력을 불러오는 주문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현장에서 주문을 외우듯이 기도를 드리라는 말도 아닙니다. 늘 기도하고, 항상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시고,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신 후에도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그런 기도의 힘이 이 자리에서도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도의 자리를 신뢰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