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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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사랑합니다! 금요기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할 때 가장 마음이 평안한가? 성경말씀 읽고 기도할 때라든지, 잔잔한 수영장에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쉴 때, 조용하고 피톤치드가 가득한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때, 좋은 휴양지와 좋은 숙소에서 쉼을 가질 때, 부모님이 잔소리 안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몰두하고 집중할 때, 좋아하는 음악을 감상할 때 등 여러가지 모습으로 평안함을 떠올리고 생각한다.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인가? ‘진정한 샬롬’이다. 샬롬의 뜻은 무엇인가? 보통은 평안으로 알고 있다. 히브리어에는 이에 더해 번영, 성공이라는 뜻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개인적인 취미와 같은 이러한 것들이 성경에서 가르치고 말하는 진정한 샬롬이 맞을까? 이것이 맞다면 오늘 설교는 여기서 끝나게 된다.
지난주에는 기드온을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누었다. 기드온은 대단한 용사가 아닌, 밀을 타작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르셔서 큰 용사라고 부르셨다. 그가 진짜 큰 용사가 아니라 그를 큰 용사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작정이 담긴 선포이다. 그런 기드온은 아주 소심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많았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증거를 원했다. 하나님이 함께하겠다는 약속에 즉각적으로 믿고 순종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기드온은 마음에 확신이 있어야 따르겠다고 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그러나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이 진짜라면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태도가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기드온의 행동을 유심히 보아야한다.
기드온은 하나님 앞에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로 빵을 부풀게 만드는 누룩을 놓지 않은 빵인 무교병을 만들어 가지고 돌아왔다. 기드온이 이것을 가져오자 여호와의 사자가 고기와 무교전병을 바위 위에 놓고 그 위에 국을 쏟으라고 지시한다. 기드온이 말씀하신대로 하자마자 여호와의 사자는 손에 잡은 지팡이로 고기와 무교전병을 건드렸다. 그러자 반석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모두 완전히 불태워버렸다. 여러분 같으면 국을 한 바가지를 완전히 태워서 증발시키려면 얼마만큼의 화력이 필요할까? 이것을 한번에 곧바로 태워 없애버리시는 상식과 생각을 완전히 뛰어넘는 하나님을 경험하면 어떨 것 같은가? 나라면 완전 깜짝 놀랄 것이 아니라 혼이 나갈 것 같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불이란 무엇인가? 아브라함에게 횃불로 언약을 맺으신 장면, 모세에게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에서 불로 임하신 것, 엘리야의 바알과 아세라의 전투에서 불로 임하신 것 등등 성경에서 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상징한다.
우리가 찬양에서 ‘불을 내려주소서’라는 찬양이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불이 이곳에 임하면 여기는 바로 화재 재난상황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불을 사모하는 찬양을 고백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구하는 찬양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불로 강력하게 임할 때 엄청나게 많은 국과 고기와 무교병을 태워버린 하나님을 볼 때 기드온에게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리라”라고 하는 약속이 해볼만한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미디안 사람이 몇 십, 몇 백만이나 될텐데 그런 사람을 한 사람을 상대하듯이 하라고 하신 것은 완전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나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약속을 하나님이 국과 고기와 무교전병을 태우면서 확신의 메시지를 던져준 것이다.
그때 기드온은 자신이 대화하고 있었던 어느 누군가가 바로 여호와의 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갑자기 기드온은 자신의 어린 시절 엄마가 읽어주던 성경의 말씀이 생각나면서 주마등이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아담 이후로 태어난 사람은 타락한 인간의 죄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면 죽어...’ 기드온은 또 거룩하신 하나님을 의심했기 때문에 더욱 등골이 오싹하지 않았겠는가? 기드온은 하나님과 마주하여 대면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두려워 떨고 있는 기드온에게 들려온 말씀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보게 되면 ‘안심’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샬롬이다. 개역한글에서는 “네게 샬롬 있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고 번역이 되어있다. 그렇기에 기드온의 하나님은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샬롬의 하나님이셨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평안과 두려움을 손에 쥐고 계신 역사의 주인은 누구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녀로 부르신 주님께 샬롬하게 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호와를 섬기며 경배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것을 깨달은 기드온은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하나님께 ‘여호와 샬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약에 이와 아주 비슷한 장면이 있다. 누가복음의 5장에서 예수님이 어부들을 부르시는 장면이다. 이때 유명한 어부잡이가 누구였는가? 시몬 베드로였다. 예수님은 이미 허탕을 쳐서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가서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말씀을 다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이렇게 명령하는 것이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러자 베드로의 대답은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이다. 왜 선생님이라고 했는가? 직업도 목수이시고, 무리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하는 랍비 정도로 생각하는데, 어업에 대해서 뭘 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연히 고기가 잡히지 않을게 뻔하지만 그래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한다.
그때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다고 한다. 그것도 모라자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으로 도와달라고 했고, 그들이 와서 고기를 배 2척에 가득 채웠는데 거의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그것을 경험하고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예수님 무릎 앞에 엎드려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선생님이라고 가볍게 무시하고 생각했던 그 분이 자신이 그토록 어릴 때부터 성경에 대해 배우고 기다렸던 메시아, 그리스도가 자신의 배에 타고 있던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이후로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곧바로 역사의 주관자요, 창조자요,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이때 깨달은 것이다. 또 무리들에게 가르치신 가르침도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을 퍼즐이 맞춰지듯이 깨닫게 된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에 1418년 조선시대에 살았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평범하게 생긴 청년이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한마디만 하면 저기 있는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 한번 가보라고 해서 가봤는데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삽질하고 있었다. 누가 시킨 일이냐고 했을 때 ‘전하께서 시키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생각해보니 젊은 청년이 왕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 분이 세종대왕이라면 어떻겠는가? 엄청나게 자질러지면서 바로 엎드려서 살려달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왕의 얼굴을 보는 것은 곧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왕도 얼굴을 대면하면 즉시 사형인데, 영혼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몰라본다면 얼마나 두렵고 무섭겠는가? 심지어 의심까지하는 아주 오만한 모습을 대놓고 보여줬으니 말이다. 그것을 깨달은 오늘 기드온과 베드로는 심히 두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고기를 어마어마하게 잡은 모습을 보고 베드로뿐만 아니라 주변에 동료들과 무리들도 놀라게 되었다. 그렇게 예수님을 의심쩍게 여겼던 베드로는 얼마나 두려워 떨고 있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아주 놀랍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이 그 두려워 떨고 있는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마어마한 사명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이제부터 사람을 취하리라고, 쉬운성경에서는 사람을 낚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을 낚는 것은 거짓말치고 다니라는 것이 아니다. 물고기는 어디에 있어야 사는가? 물에 살아야 살 수 있다. 육지에 나오면 죽는다. 사람은 물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게 저체온증으로 죽거나 익사하게 된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무서워하지마, 우리 이제 사람 살리러 가자”라는 것이다. 영원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가는 일들을 함께하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만났던 좋아하고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신다. 신대원에 입학해서 기쁜 마음에 그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대학생 때 항상 무식하다고 성경공부 좀 하라고 혼내주셔서 제자훈련을 얼마나 울면서 공부했는지 모른다. 그랬던 목사님이 전화로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늘 영건아 영건아 하시던 분이 “전도사님, 이제 신대원에 들어가셨으니 공부도 안하고 말빨이나 스킬로 사역하는 거짓 목자되지 맙시다. 사람 살리는 공부해서 죽어가는 영혼, 전도사님께 맡겨진 영혼들에게 바르고 정확한 복음 전합시다. 우리 꼭 사람 살리는 목회자 됩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때 얼마나 울컥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그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한 영혼이라도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할까 늘 기도하고 여러분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들을 감당하고자 힘을 달라고 고백하는 기도모임이 여기 모인 금요기도회인 것이다.
오늘 따끈따끈한 기쁜 소식이 하나 있다. 다다음주 월요일 점심시간에 경화여고에서 기도모임을 교목 목사님께서 허락해주셨다. 할렐루야. 지난주 월요일에 교목 목사님께 문자를 드렸었다. “목사님 광주사랑의교회 담당 김영건 전도사라고 합니다. 혹시 통화가능하실까요?”라고 보냈는데, 바쁘셨는지 답장도 없으시고 연락도 주시지 않은 것이다.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하루하루 보내는데, 답장이 없으시니까 마음이 조금씩 초조해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민제쌤도 나에게 카톡으로 학교사역 안하시냐고 물어보시는 것이다. 내가 너무 앞서갔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오늘 새벽에 기도 중에 평안한 마음이 들어서 바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목사님께서 다음주는 어려울 것 같고, 다다음주에 장소도 제공해주시겠다고 자세한건 다음주 중에 연락주시겠다고 흔쾌히 말씀해주셨다. 경화여고는 기독교학교니까 쉽지 않냐고 말할 수 있는데, 작년 11월 쯤에 말씀드릴 때는 반응이 영 좋지 않았었다. 이렇게 그동안 함께 기도했던 것들이 하나씩 이루어져가니 다음 스텝도 떨리지만 스릴있는 기분이 들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반드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진정한 샬롬’이다. 샬롬이란 그저 두려움에서 해방된 마음의 상태, 평안한 기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샬롬은 감정이나 상태보다는 주로 관계에 대한 이야기한다. 즉 샬롬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 얻는 평화, 평안을 가리킨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며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샬롬을 느끼게 된다.
의심하는 기드온과 베드로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기드온과 베드로와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과 같은 메시지이다. 사람을 살리자는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의 관계가 끊어져버려서 잃어버린 샬롬을 다시 완전한 샬롬의 관계로 회복시켜가자는 것이다. 기드온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를 통해 우상 숭배하며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다시 살려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복의 통로로 주변 국가가 함께 살아나는 그러한 제사장 나라의 모습으로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베드로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가? 잘못된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유대인들과 로마를 비롯한 모든 나라의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 베드로와 제자들, 사도들을 부르셨다. 회복하자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 영원한 생명이시요, 빛이시요, 진리이신 주님을 따라 바깥에 있는 죽어가는 사람 살립시다. 우리가 이 마음으로 하나되어 예배하고 기도하며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들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반드시 나타날 줄 믿습니다. ‘에이 나같은 사람이 뭔 큰 일을 하겠어’라고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맞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역사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능력의 하나님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당장에 할 수 있는 것은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 맙시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똑똑히 보며 주변의 여러분의 친구가, 학교가, 교회가, 더 나아가 이 나라와 세계와 열방이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복의 통로로 쓰임받는 인생들 되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