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5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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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근심과 신성한 근심
세상 근심과 신성한 근심
여러분~ 오늘 함께 만나 말씀을 나누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말씀을 나누며 주님께서 함께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 속에 크신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로서 3월 15일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3월이 반이 지났다는 이야기고, 여러분들의 학기도 두주 정도가 지났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번 학기는 어떠신가요? 이제 어느정도 감이 잡히실텐데, 좀 성공적인 학기가 될 것 같으신가요? 아니면 반대로 큰일이 난 것 같으신가요?
우리 신입생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어요. 아직 감이 잡히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아마도 둘로 나뉘겠죠? 여러모로 걱정이 많거나, 아니면 여러모로 즐겁거나.
어떤 모습이던지 불구하고 저는 여러분들의 모든 학기를 응원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도 학기 중에 있기때문에 여러분들의 마음과 어느정도는 공감하는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나름대로 대학수준의 공부를 시작한지 10년이 되었기 때문에, 대강 학기가 돌아가는 느낌들을 잘 알고 있거든요?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의 경우에는 딱 지금시기까지 오티하고 수업 일이주차 들으면서 아 이런 느낌이구나, 수업 별로다, 재밌다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죠.
그러다가 3월 말부터 뭐가 시작되죠? 과제가 시작이 됩니다. 과목별로 과제, 혹은 퀴즈가 시작이 되면서 정신없이 모든 과목별로 과제들을 대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좀 뭔가 했다 싶으면 뭐가 찾아오죠? 바로 중간고사가 찾아옵니다. 뭐 별로 한것도 없는 것 같은데, 평가하겠다고 물어보는 거죠.
그러면 한 반쯤은 망했다 생각하고 시험을 치릅니다. 그리고 어떤 생각을 해요? 기말에 모든 것을 건다! 이런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다짐을 하고 얼마 안되어서 또 다른 과제들이 주어집니다. 때로는 조별 발표를 해야 하기도 하죠.
이런 식으로 정신없이 제출일에 맞춰서 준비하고 해서 과제를 끝내면, 꼭 시험이 2주정도, 빠르면 1주정도가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면 대체 난 지금까지 무엇을 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말에 모든 것을 걸겠다던 생각들이 무색하게 모두가 올림픽 선수들이 됩니다.
뭐죠? 참가에 의의를 두는 것이죠. 그저 시험만 끝나라! 그럼 방학이 온다! 라는 생각으로 남은 학기들을 보내게 됩니다.
저의 경우에는 뭐 이런 식이었는데, 아마 여러분들은 많이 다를거에요. 그렇죠?
하지만 그래도 비슷한 것은 학기 내내 끊임없는 걱정과 염려 속에 우리는 놓여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제 하나 끝내면 이제 발표걱정, 발표 끝내면 중간고사 걱정, 이런 식으로 걱정과 염려의 연속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이제 한 5월정도에 여러분들을 만나면 반쯤은 맛이 간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은 언제 졸업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겠죠.
하지만 졸업한다고 끝일까요? 이제는 또 직장걱정하고 더 가면 결혼 걱정하고 이럴거에요.
그렇습니다. 사실 인간의 삶은 걱정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저도 항상 말씀을 나누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라 그리고 걱정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모든 염려를 해결해주실 것이다 이런 권면들을 합니다.
그런데요, 오늘 말씀에서는 사뭇 다른 이야기가 하나 등장을 합니다. 버려야 할 근심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해야 할 근심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어떤 근심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바울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당장 하나님의 뜻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 뜻대로 근심까지 해야한다니 참 머리가 아픕니다.
그러면 우리 함께 말씀을 찬찬히 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어떻게 근심을 할 수가 있을지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말씀은 고린도후서 말씀입니다. 여러분들께서 기억이 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캠프준비팀 기도회때 제가 고린도후서 말씀을 계속 나누었었습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 기억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고린도후서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진행이 되었었는지 기억을 하실 거에요.
하지만 아마 그럴 분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제가 말씀을 드리자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을 놓고 편지를 했었죠.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바울 자신을 향한 사도성이 부정당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이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죠.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교회 안에서 은사 문제와 같은 다양한 문제들로 분쟁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문제들을 놓고 분쟁을 해결하도록, 또한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자신의 사도성을 증명하도록 편지를 썼던 것이죠.
오늘의 말씀 또한 그 배경 하에서 오롯이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한구절이기에 그 내용을 정확히 바라보려면, 앞의 내용과 배경을 잠깐 살펴야 하는데요,
제가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고린도교회에 어떤 한 문제인물로 인해 사건이 발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강한 어조로 편지를 쓴 후에 디도라는 사람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 보내게 되죠.
그런데 바울은 편지를 보내고 나서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 일로 인해 어느정도 감정적인 동요가 있었던 것인지, 강한 어투로 편지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바울이 생각했을 때, 그 편지로 인해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이 마음이 상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성품을 확인하게 되죠. 그는 진리에 있어서는 단호하고 확실하게 하는 것을 선호하고 원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안에는 교회와 성도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너무나도 컸기에 다른 어떤 것 보다도 교회 공동체가 상하지 않는 것을 우선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린도교회를 향한 마음으로 인해 근심을 하고 있었고, 거기에 심지어 마게도냐 교회에 대한 사건이 발생하여 또 다른 근심이 바울 안에 존재하는 상황이 지속되었죠.
그런데 그 상황에서 디도가 고린도에서 돌아오면서 바울에게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전달해줍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근심 속에 묻힌 바울에게 은혜로 다가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의 서신을 통해 회개를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워딩대로 말씀을 드릴게요.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혹여나 그들의 마음이 상하진 않을까? 교회가 분쟁하지는 않을까 했던 바울의 근심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이 바울이 원했던 모습대로 회개를 했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가졌던 모든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었죠.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읽은 10절을 통해 너희가 했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지금 너희와 같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세상 근심은 구원이 아닌 사망을 가져오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죠.
자! 드디어 우리가 궁금해했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누가 한거에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다 끝났네요? 여러분들 모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했던 것처럼 근심하시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교 마무리하면 될까요? 그렇지 않겠죠.
일단 우리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근심한건지를 모르잖아요.
그렇습니다. 사실 본문에서는 바울이 어떤 문제로 강한 어조의 편지를 하였으며, 그 편지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기에 성도들이 회개했는지가 나타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회개를 했는지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들 모두 공부는 도사들이시니까, 우리가 비문학이나 영어 지문을 풀때, 중간에 구멍넣는 문제들은 어떻게 풀죠? 앞의 내용과 뒷 내용을 살펴서 정답을 확인합니다.
그렇죠. 오늘의 말씀도 앞에서 설명이 잘 안되는 것 같지만, 뒤에서 또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1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 뭐라고 해요? 하나님의 뜻대로 한 이 근심이 얼마나 간절하게 하고, 변증하게 하고, 분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사모하게 하고, 열심있게 하고, 벌하게 했는가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일을 통해 너희가 깨끗함을 드러내었다라고 말하죠.
자 그러면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어떻게 근심했는지를 어느정도 그릴 수가 있겠죠.
바울의 편지를 보고서 말 그대로 근심을 한 거에요. 그런데 그 근심이 어떤 근심이었냐, ‘아 우리는 이제 큰일났어. 우린 이제 끝이야’ 이런 식의 근심이 아니었다는 거에요.
‘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구나, 그러면 우리가 빨리 말씀대로 돌아가야한다. 바울이 말한 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이런 식의 근심들을 이들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통 근심이라고 생각하면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범위의 것들을 보면서 두려워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근심을 하면 어떤 일들도 있을 수 있죠? 두려움에서 더 나아가 대비를 하고, 바꾸려 하고 이런 행동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그렇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적을 했을 때, 두려움에만 매몰되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했다는 것이죠.
어떻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그렇게 행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온전하고 굳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온전하고 굳센 믿음이 뭐냐? 그러면 약한 믿음도 있는 것이냐?
설명을 드릴게요. 우리가 어떤 대상을 믿는다고 할 때, 왜 그 대상을 믿느냐라고 묻는다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나오게 될 거에요.
첫째, 그 대상이 두려워서. 두려울 정도로 강한 존재이니 다른 것보다 믿을 수 있다.
둘째, 그 대상을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대상이니 당연히 믿는다.
어떻게 보면 같은 믿음일 수 있지만, 그 기반이 다른 두 믿음은 다른 반응을 불러오게 됩니다.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대입해볼까요?
만약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면, 바울의 강한 지적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강한 두려움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에게는 이제 형벌만이 남았어’라는 생각으로 슬퍼하고 좌절했을 수 있겠죠.
또는 그 두려움 속에서 책임을 서로에게 넘기며, 또다른 분쟁이 교회 안에 발생했을 수도 있겠죠.
바울은 이러한 모습들을 근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이 그런 모습을 보였나요? 아니었죠.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어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바로 사랑에서 기인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랬기에 바울이 보낸 편지에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모습을 지금 우리가 보이고 있구나!’ 라는 반응을 보이고, 그 사실에 대해 근심하며 사랑하는 주님께 더욱 좋은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들이 회개했던 것이죠.
비유하자면 이런거겠죠. 우리의 성적을 쥐고 계신 교수님이 갑자기 메일로 우리의 잘못들을 고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겠어요?
‘아 학기 망했다.’ ‘아 걔 때문에 괜히 이래가지고’ 이런 반응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 잘못을 고칠 생각을 하기보다는 두려움과 분쟁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잘못을 고하는 대상이 우리가 사랑하는 애인이라면 어떨까요? 여러분들의 마음에 정말 사랑이 있다면, 그 애인을 생각하고 근심하면서 그 잘못들을 고치려 하겠죠.
딱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이렇게 사랑을 기반으로 한 온전한 믿음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의 강한 편지에도, 보낸 바울 자신조차도 걱정할 정도로 강했던 편지에도 무너지지 않고 회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강한 공동체였기에, 바울의 강한 편지는 너무나도 귀한 약으로써 교회에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 편지를 작성한 이유를 덧붙입니다. 분쟁의 원인이 된 본인을 책망하거나, 혹은 분쟁을 당한 이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교회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말한 것이죠.
그리고 그 편지를 통해 변화된 공동체에 대한 소식이 디도에게 전달되고, 또 교회 공동체가 디도를 기쁨으로 맞이했던 그 모든 소식들이 디도를 통해 바울에게 전달되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존재했던 두 가지 문제, 분쟁의 문제와 사도권의 문제에 대한 큰 안심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믿음을 통해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근심, 그래서 더욱 주님께 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 근심. 그 근심이야말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근심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우리를 보자구요. 우리가 하는 근심들은 어떤 것입니까? 바로 세상의 근심들일 것입니다.
당장 성적을 얻기 위해, 당장 돈을 벌기 위해, 당장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근심합니다.
여러분들은 왜 그러한 근심을 하시나요? 좋은 성적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돈을 벌어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십일조 드리려고?
그러한 생각을 하시는 여러분들께 말씀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 말씀은 사울 왕이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을 어기면서 다 하나님께 좋은 제사 드리려는 것이었다고 핑계를 하니 사무엘이 그를 책망하며 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좋은 번제를 드려서 자신을 높여드리는 것보다 당장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세상에서 자신을 높이는 것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여호와께 좋은 것으로 제사하려 했다는 핑계를 댔지만, 정말 그의 마음이 그랬을까요? 아니죠. 그저 좋은 것 버리기가 아까워서, 정말 인간적인 마음이 작용했던 것이죠.
우리의 마음은 그 사울과 과연 다를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좋은 자리에 있어야 하나님도 좋고 저도 좋고 한거잖아요? 라는 식으로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이름이 높아지시는 것 원치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뭐가 먼저냐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그의 사랑으로 자연스레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세상적인 복도 포함이 되겠죠.
그리고 그때 우리가 감사함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인한 것임을 선포한다면, 하나님은 정말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오로지 그것이 목적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의 것을 더 추구하고 바라본다면, 그 높임의 제사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 계신 모든 여러분들, 세상의 근심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근심은 말씀 그대로 여러분들을 사망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요즘의 청년들이 이 아름다운 한 때를 수없는 근심으로 쌓아가면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심지어는 그 걱정이 청년들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사랑의 감정, 소망의 감정들을 집어삼켜서 어떤 결과가 나타났죠? 떨어질 대로 떨어진 결혼율과 출산율, 반대로 치솟는 공무원이나 대기업과 같은 안정적인 지원율이라는 결과가 나타났죠.
지난주 하늘고 교사모임때도 나눴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참 안타까워하는 것이 앞으로 세대를 이끌어야 할 다음 세대, 즉 우리 청년들의 삶에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기에 불안해 하고, 불안하니 삶이 위축되고, 그러면 더 소망을 갖기가 힘든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거죠.
그럴 때일수록 우리 신앙을 가진 청년들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아요.
주님을 모르기에 세상 근심으로 소망 없는 사망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통해 주님과 함께하는 주님나라의 소망을 가진 우리가 그 소망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그 소망 가지고 나아간다면, 그래서 주님을 모르는 이들도 우리가 가진 소망을 통해 말씀 그대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높여드리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행하며 나아갑시다. 세상 근심은 다 주님께 맡기고, 오로지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한 근심을 해나갑시다.
그래서 바라건대 우리 공동체를 통해 우리 주변에 모든 이들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고, 하늘 소망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역사들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 지금 이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