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나와 너’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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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중 하나가 ‘나의 해방일지’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지쳤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이런 대사도 있습니다.
“난 조선시대가 맞았어. 오늘부터 이 사람이 네 짝이다' 그럼 '예, 열렬히 사랑하겠습니다~' 그러고 그냥 살아도 잘 살았을 것 같애. 사람 고르고 선택하는 이 시대가 난 더 버거워.”
이 드라마에 나오는 염미정이라는 친구가 얼마나 피상적인 관계에 지쳐 있는지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피상적 관계는 우리를 숨막히게 합니다.
긴장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런 점에 대해 마르틴 부버의 책 ‘나와 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삶의 의미는 올바른 관계 속에서 찾게 된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관계는 ‘나와 그것’ 그리고 ‘나와 너’가 존재합니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일시적이고, 기계적이고, 도구적인 관계입니다.
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관계를 맺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진정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단지 나를 위해 상대방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런 관계는 인격적이고 의미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대체될수 있는 그런 피상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나 ‘나와 너’의 관계는 다릅니다.
이 관계는 인격적이고 의미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관계는 자기의 전 존재를 쏟아야만 맺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그것’이 아닌 ‘너’라고 볼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나’를 찾을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나와 너’의 관계로 사람들을 대할수 있을까요?
[본론]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세번이나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첫번째 논쟁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두번째 논쟁은 세금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세번째 논쟁은 부활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이 논쟁들 모두 예수님을 함정에 빠지게 만들려는 시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논쟁들에 대해 매우 지혜롭게 답변하셨습니다.
이때 이런 논쟁을 다 지켜본 율법학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다른 율법학자들과 다릅니다.
그는 조용히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에 너무나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더이상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함정에 빠뜨릴 이유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는 예수님께 완전히 마음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정말 궁금한 한가지를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613개의 계명중에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613개의 계명은 해야하는 명령들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하는 명령들이 있습니다.
해야하는 명령이 248개이고, 하지 말아야할 명령이 이것보다 더 많은 365개입니다.
참 많죠?
당시 율법학자들은 613개중에 더 중요한 계명들과 덜 중요한 계명들을 구분하려고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분명 자신들도 613개의 계명을 모두 지킨다는게 너무 힘들었던 것이죠.
그래서 계명들을 분류해서 더 중요한 계명들은 잘 지키고 덜 중요한 계명들은 좀 느슨하게 지키려 한 것입니다.
이런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29-31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 말씀은 ‘쉐마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알려진 신명기 6:4-5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약간 바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암송했던 구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수년천동안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말씀을 암송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부분은 마음이나 목숨, 뜻, 힘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목숨, 뜻, 힘 모두 우리의 전 인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나의 모든 것을 다해 힘껏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일때에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누군가는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말씀 묵상을 매일 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힘을 쏟아붓는 것입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나타나는 증거가 있습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31절입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율법학자는 가장 으뜸가는 계명을 물었습니다.
그럼 한가지만 대답하셔야 하는데 예수님은 두가지를 대답하십니다.
첫째, 하나님 사랑, 둘째,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두가지를 말씀하신 이유는 첫째와 둘째를 뗄레야 뗄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입니다.
십계명을 보십시오.
1-4계명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것이라면, 5-10계명은 이웃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십계명뿐입니까?
613개의 모든 율법은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우겨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습니까?
왜 성전이 무너졌습니까?
그들이 드리는 제사나 정성이 부족해서 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아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에는 불법이 넘쳐났고, 힘없고 소외된 자들이 고통당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사랑만 강조하다보면 이웃 사랑을 놓치게 됩니다.
예배는 잘 드리는데, 교회는 열심히 나가는데 사랑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종교적 인간이 될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도 모두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의 관계로 변질되게 됩니다.
영화 ‘오징어게임’을 보면 어떤 전도사 한명이 등장합니다.
상대편이 죽지 않으면 자기편이 죽는 줄다리기에서 자기편이 살아남자 감사기도를 올립니다.
그가 보인 모습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지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변질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일까요?
그 원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에 답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힘껏 사랑할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그 분을 닮아갑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 힘을 쏟기 때문에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를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닮아가고, 다른 것을 사랑하면 다른 것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결국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본성상 자기 중심적입니다.
이기적입니다.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입니다.
우리가 피할수 없는 본성입니다.
어린 아이 셋에게 실험을 한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먹을 것을 세 개 주면서 가만 놔두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래 살펴보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셋이서 나눠갖지 않고 혼자서 다 독차지 하려 합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납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반대말은 하나님을 미워하는게 아닙니다.
사탄을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들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본성을 초월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힘껏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껏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초월하여 그 분의 이타성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런 이타적인 사랑을 어디서 경험할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랑때문에 우리는 자기중심성이라는 두꺼운 껍질을 깨고 이웃에게 진정한 사랑을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힘껏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들의 사랑은 결국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이웃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의 극치도 봉사활동이나 자기 희생으로 나타날수 있습니다.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만들 뿐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의 전문가였지만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반인 하나님 사랑만 알았지, 또다른 반인 이웃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충돌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깨뜨리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이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목표를 성취하시려는 것입니다.
종교는 굴레지만 율법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힘껏 사랑할수 있을까요?
벗어나기 힘든 자기 중심성의 굴레를 쉽게 벗어던질수 있을까요?
또한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수 있을까요?
내 몸이 더 소중하지 내 몸과 같이 소중하게 여길수 있을까요?
당장 내 코가 석자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중심성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이 내 본성이기에 나에게 편하고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벗어날 길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설명할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자유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한계를 초월할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을 내 존재를 갈어넣어 사랑할수 있을까요?
사랑할수 있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소중히 여기며 사랑할수 있을까요?
사랑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가능하게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답변을 들은 율법학자는 깨닫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32-33절입니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깨달았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었기 때문에 영적인 눈과 귀가 열린 것입니다.
그는 종교적인 행위인 번제와 희생제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더 낫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성전 제사의 한계를 깨달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진 편견이라는 딱딱한 껍질은 깨지기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학자는 그 껍질을 깨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핵심이 사랑에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서야 그는 ‘나와 그것’으로 보지 않고 ‘나와 너’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를 ‘그것’으로 보려고 할 것입니다.
피상적 만남과 관계가 숨막히게 합니다.
이런 세상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세상을 ‘나와 그것’으로 보지 말고 ‘나와 너’로 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힘껏 사랑할때 우리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길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시 한편을 들려드리며 마치겠습니다.
이 시는 우리가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가 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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