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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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1–11 NKRV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지금 예루살렘에서는 성령으로 인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요엘서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했을 때 일어나는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꾼다는 그런 일이죠. 사도행전에서는 지금이 그 날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계속해서 표적이 나 타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할 때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게(기네스코) 해달라고’ 기도하고(4:30), 또한 사도들의 손에 의해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43, 5:12).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둠 (1)] 본문을 들어가기 전에 이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은 표적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오늘 본문에서 죽는데, 이는 일반적인 일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와 같은 일이 일반적으로 일어난다면, 오늘날의 교회에는 살아남을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당시에 일어났던 많은 표적과 기사가 그 후로는 일반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사건을 표적과 기사의 문맥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표적은 영어로는 싸인(sign)이고 헬라어 원어로는 ‘세메이온’입니다. 그 뜻은 ‘어떤 것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이렇듯이 사도행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표적은 어떤 영적인 일이 있어났다는 표시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된 ‘유무상통하며 가난한 사람이 없는 공동체’ 또한  표적의 맥락에서 보겠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지만, 도래한 것은 교회였다”고 말합니다(한스 큉). 이 말처럼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정작 남은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교회’였습니다. 이처럼 ‘초기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표적’ 입니다.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또한, 한 개인의 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적 사건입니다.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은 그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가진 것을 팔았습니다. 부부가 더불어 팔았다는 것은, 둘이 같은 뜻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아나니아가 얼마를 감춘 것을 삽비라도 알았습니다. 소유는 원어 ‘크테마’로 주로 토지 혹은 밭을 의미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바나바와 같이 밭을 판 것입니다. 바로 직전 바나바는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으며,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두 외적인 행동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거짓말함(2-4)]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그러나 이 부부는 바나바와 달리 판 값의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처음부터 밭을 팔지 않았어도 됩니다. 재산을 모두 바쳐야 할 의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밭을 팔고 나서도 그 값을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나니아는 일부만 바쳐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감추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감추었다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부를 냈지만, 일부는 가져간 것입니다. 모두 다 드린다고 하고, 일부만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가 알고, 아나니아를 질책했습니다. [(3~4A)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아나니아가 전부 인체 하지만, 일부를 감춘 것을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 지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베드로는 그 사실을 알고서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전부를 내든 일부를 내든 내지 않든, 베드로가 간섭할 일은 아니었지만, 베드로는 그들이 속이고 있는 것을 잡아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4절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 재산을 팔고 안팔고는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오. 그리고 판 후에 그 돈의 얼마를 남에게 주는가 하는 것도 전적으로 당신 자유의사에 달린 것이오.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하시오? 당신은 우리를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 베드로가 문제 삼는 것은 액수도 아니고, 욕심도 아니고 바로 ’속이는 행위‘입니다. 아나니아의 속임은 욕심에 의한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그 배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베드로는 지적합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질책했습니다.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다고 할 때, 가득하다는 원어 ‘플레로오’로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으로 ‘온 집에 가득하다’고 할 때 그 가득함과 같은 말이고, 13:52에서 ‘제자들이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할 때 ‘충만’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아니아는 ‘성령 충만’이 아니라 ‘사탄이 충만’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사탄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과거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한 사건에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는 질책을 베드로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탄이 생각하는 사람의 일’은, 십자가가 아닌 인간적인 영광을 취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나니아 또한 인간적인 영광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당시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된 예루살렘의 초기 교회에서 바나바와 같은 명예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4B)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음의 동기를 모를 수 있으나 하나님은 아시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그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의 중심도 보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함(5-11)]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베드로가 말한 후,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서 죽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즉시로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아나니아가 왜 죽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아나니아가 한 일과 그 일의 결과를 그 자리에서 다 보고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는 아무도 손댄 사람이 없는데 엎드려져 혼이 떠났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이 누구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재 교회를 다스리고 감독하고 계십니다. 베드로와 사도는 그 대리자로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얼마 후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가 들어왔지만, 그녀도 아나니아와 같이 거짓말을 했고 엎드려져 혼이 떠나, 장사되었습니다. [(10-11)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반복된 삽비라의 죽음은, 아나니아의 행위가 불법임을 확증합니다. 논란의 여지를 없에며, 믿음으로 가장한 불순한 동기는 불법임을 확정케 합니다. 이 일은 믿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외부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속에 있는 마음이 다 탈로나고 그 문제로 인해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13절에서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이 사건 이후로 교회는 세상과 구분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체하며 교회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초기 교회가 더욱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 되도록 합니다. 하나님 나라도 믿음 외에는 들어갈 수 업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거듭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다(3: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어떻게 교회의 일원이 되고, 어떻게 거듭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것에 대해 베드로전서의 말씀은 ‘너희가 거듭난 것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23,25B)고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행하신 일과 그 일이 우리에게 미친 결과가, 바로 복음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교회는 세상과 구분됩니다. 교회는 기업이나 비영리단체 혹은 복지기관과 혼동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선교단체도 교회와 혼동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 자체이지, 사람이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와 같습니다. 교회가 지키고 회복해야 할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사랑도 아니고 행복도 아니고 성공도 아니며 정의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가장된 다른 동기와 목적들을 교회는 끊임없이 분별하며, 교회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게 해야 합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가 싸워야 할 영적 싸움이며,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마땅한 일입니다. 교회로서 우리는 세상의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변함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이 시기를 통과하며,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승리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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