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Basic2. 죄(가인과 아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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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반적으로 ‘살인자’라고 하면 굉장히 다른 범주의 사람처럼 여기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들 또한 사연이 있고, 이유가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그 사연과 이유가 그들의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마주한 충동과 씨름이 우리의 일상적인 죄와의 충동과 씨름과 한편으로는 닮아있고 유사함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 또한 때때로 범죄자를 뉴스에서 다룰 때에, 나 또한 죄에 한 없이 기울어졌다면 저럴 수 있었겠구나. 그런 몸서리를 친 적이 몇번 있습니다. 내 안에도 크기와 밀도는 다르지만, 동일한 본성적인 죄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인물 중에서 특별히 가인을 초점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가인의 모습’은 나에게도 있다.
가인의 모습은 곧 내게도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원래를 ‘부모’에게 기쁨과 같던 자녀였습니다.
창세기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를 보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이렇게 감격에 차서 소리 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즉, 가인의 처음 출발은 부모에게 큰 기쁨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동일하게 있었던 자였다.
또 한편 창세기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을 보면, 그에게는 아벨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양을 치던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음을 보게 된다. 아들 2명의 가정 중 첫째가 가인이다. 그리고 그의 동생과 하는 일과 성향은 달랐지만, 성실한 삶을 살았던 자였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꽤나 고단한 일이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여야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농사를 위한 준비 기간과 한창 작물을 돌보는 시기, 그리고 수확기 등 1년 내내 보통 바쁘기 마련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가인의 모습은 성경 곳곳에서 유사한 테마로 다시 재현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등장한, 탕자의 이야기와 맏아들의 이야기이다. 스토리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 결과적인 측면들이 상당히 유사하다.
창세기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오늘 본문의 결과와 누가복음 15:27–28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의 내용이 사실상 거의 동일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특히나 팀 켈러 목사님이 이를 잘 분석해내었는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외국에서 다 탕진하였다. 이미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속을 다 썪였고, 사실상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다고 말할 정도의 패륜을 저지른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아버지께 자신을 종으로 써주시길 간구하는 마음으로 돌아간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이킨 것이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그런 둘째 아들이 집에 돌아왔으나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실루엣만 보고서도 달려가 그를 맞이했는데, 첫째 아들은 오히려 분노한다.
즉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 말과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이 공명하고 있다.
또 마태복음 21장에서도 겉으로는 순종한 첫째 아들과 겉으로는 불순종했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순종한 둘째 아들 모티프가 등장한다. 에서와 야곱 이야기도 유사성들이 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가인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우리들의 이야기와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가인이 곧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이야기이다.
가인과 아벨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예배’, 즉 ‘제사’이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가인의 것을 받지 않으셨고, 동생 아벨과 아벨의 것은 받으셨다.
이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 것인가? 창세기 4:3–4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도 자신이 수고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아벨도 마찮가지로 자신이 수고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런데 하나는 받고, 하나는 받지 않으셨다. 또 그로 말미암아 가인은 시기심과 분노가 촉발된다.
가인은 사실 탕자 이야기에서 맏아들과 동일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겉 모습의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속 모습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다. 쉽게 분노하고, 쉽게 시기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도 가인의 것을 받지 않은 이유는, 이처럼 겉과 속이 달라서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가인은 그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여기서 유사해보이지만 확연한 차이가 발생한다. 제사는 곡식으로 드릴 수도 있다. 곡식 가루로 드리는 소제와 또 포도주를 부어드리는 전제 등이 이와 유사할 것이다. 제물의 종류가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가인은 그저 땅의 소산 중의 일부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아벨은 철저하게 구별하였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다. 농사나 가축을 길러 본 사람들은 처음 태어나는 것, 처음 열매 맺힌 것의 소중함을 너무나 잘 안다. 바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가장 내가 애정했던 것, 가장 사랑한 것보다 하나님을 더 높이며 드린 것이다.
그리고 또 그 기름으로 드렸다는 것은 고기를 해체하고, 각을 뜨는 과정들 속에서 그 기름이 나오게 된다. 철저하게 자신의 상한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김수만 목사님께서도 수요일 파노라마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삶의 제사라고, 그냥 주일에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정말 그의 인생과 삶을 받으신다고. 그래서 아벨과 그 제사이고, 가인과 그 제사이다.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서는 받으신다는 것이다. 또는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서 정말 진정으로 상한 중심의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가인과 같은 맥락 속에 있을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가 본격적으로 다룰 문제는 ‘죄’이다.
2. ‘죄’는 우리를 ‘기만’하고 ‘전부’를 요구한다.
창세기 4:5–6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은 예배에 대해서 거절당한 가인의 반응입니다.
그의 가장 처음 반응이지만, 이 또한 우리에게 크게 어색함이 없습니다.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거절당하고, 수치를 당하면, 가장 먼저 안색이 변할 겁니다. 불쾌감과 분노의 감정 등이 얼굴로 바로 표시될 겁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지 않았음에 대한 분노입니다. 이미 그의 첫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시작됩니다.
우리 또한 어떻습니까. 우리도 때때로 상황이 마땅치 않아서 쉽게 분노하고 화를 내곤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 상황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 또한 분노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또한 이 분노의 감정 자체도 이미 선한 것이 전혀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심지어 안색이 변한다는 것은 이미 상당히 주변 사람들도 그의 선하지 않는 감정의 상태를 알아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이를 분명하게 깨닫게 하십니다.
창세기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은 현재 전혀 선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가 선을 행했다면, 얼굴을 가릴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얼굴을 숙이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늘 선이 우리를 주장하도록 해야합니다. 로마서 16:19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찬양에도 있습니다. Roman 16:19 Say!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 원하노라” 중립적인 영역은 없습니다.
선과 악에서 중립지대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즉각적으로 찾아오셔서, 가인에게 보이는 그 죄를 즉각적으로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분노하고 있는 상태, 이 상태가 상당히 위험한 상태라는 겁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는 이러한 말들을 그저 죄가 참 가까이 있구나 이렇게만 생각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모습을 가리켜서 ‘사자가 웅크려있다가, 곧 이내 덮칠 모습과 같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유사하게 생각되지만, 좀 다릅니다. 이것은 죄가 우리를 미혹하는 모습과 너무나도 유사합니다. 마치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먹은 것처럼 말입니다. 처음에는 ‘진리’를 왜곡시킵니다. 그리고 탐욕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범죄하게 합니다.
죄는 처음부터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아주 저 자세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왕이고, 자기는 철저한 신하처럼, 정말 굴종적인 자세처럼 다가옵니다. 마치 사탄이 하와에게 뱀의 모습으로 찾아온 것처럼요. 그리고 속삭이는 것이지요.
동일하게 진리를 서서히 왜곡시키기 시작합니다. 거기게 하나씩, 하나씩 내어주면, 급격하게 기울어집니다.
이런 모습이 사실 남자와 여성의 관계와도 유비적으로 통합니다. 4:7절의 말씀이 곧 3:16의 말씀과 구조와 사용되는 단어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3:16절은 여성을 악하게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여성은 남성의 사랑을 보통 온전히 요구합니다. 특별히 다른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 남자의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남성들은 늘 방향성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또 달리 말하면, 성공에 대한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움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4:7절에서는 죄가 마치 사람들에게는 여성의 모습처럼 전체를 요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죄는 조금도 선한 것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달콤해보이지만, 그 끝은 결국은 사망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죄는 블랙홀과 같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모든 생명을 요구하는 것이 죄의 본 모습입니다. 우리의 전부를 요구합니다.
이 4장 7절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 죄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잠언 6:26 “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의 모습과 너무나도 유사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잠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와 음녀입니다. 서로 정 반대에 있는 것인데, 이전에는 한번도 잠언에서의 음녀를 ‘죄’와 동일시하여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4장 7절의 모습을 보니, 죄는 음녀의 모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달콤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아주 매력적인 모습입니다. 또 굉장히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끝은 한 조각 떡만 남게 되고, 생명이 사냥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죄는 자신만 파멸로 치닫지는 않습니다. 죄의 파괴력은 훨씬 더 심각합니다.
3. 죄의 결과는 ‘모두’를 죽게 합니다.
죄는 정말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금새 한 사람을 타락시켜서 지독한 범죄로 치닫게 합니다. 그래서 살인자들 중에서는 주변 지인들을 탐문하다보면, 그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와 같습니다.
가인이 저지른 범죄 또한 동일합니다. 창세기 1:28 “창세기 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수정해서 띄워야함
8절에서 먼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게 된다. 가인이 분노에 자신을 내어주고, 내어주어서, 결국 가인 자신이 죄 덩어리가 되어버린다.
아벨을 들판으로 유혹하여 데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핑계를 대며, 아무도 없을 만한 곳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생 아벨을 잔인하게 죽여버렸다. 이것이 수평적인 측면에서 가인이 저지른 살인이다. 죄에 자신을 내어주다보니, 삽시간에 이러한 끔찍한 범죄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놀라운 것은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찾으신다. 그때에 가인은 이미 자신의 양심도 죽은 것을 보게 된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자신이 죽여놓고서 아주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가 죄에 깊이 물들면, 이토록 정직성이 죽어버린다. 양심이 죽어버린다. 그 결과 자신의 인격과 인성도 죽는 결과를 낳아버린다. 결국은 가인이 자신의 동생을 죽였지만, 이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도 죽인 것과 다름 없음을 보게 된다.
이것 뿐이겠는가. 가인과 아벨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이는 한 날에 두 자녀를 잃은 것과 진배없다. 아벨의 무참한 죽음과 또 한편 인간성을 상실한 가인, 두 자녀를 잃어버렸다. 사실상 부모의 마음을 뜯어버린 것이고, 부모를 해한 것과 다름없다. 죄의 결과는 이토록 파괴적이고, 온 주변을 망가뜨린다. 아담과 하와가 이후에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 가운데서 사실 우리를 구원하셨다. 가인 또한 참혹한 범죄, 또 되돌릴 수 없는 범죄였지만, 악의 순환은 끊어내신다.
가인 또한 사람들의 보복을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창세기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이와 같은 말씀을 주신다.
또 한편, 창세기 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과 같이 아담과 하와에게도 상처 입은 마음을 싸매시고, 새로운 자녀, ‘셋’을 주신다. 또 그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의 민족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면모가 여기를 통해서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에 가인이 되어서, 그가 분노했을 때, 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죄를 다르시라고 말씀하셨을 때, 만일 우리가 가인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을까.
앞서 인트로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사실은 탕자의 이야기와 맥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먼저는 우리 스스로 죄됨을 다스려야 한다. 분노에 자신을 내어주지 말아야 한다. 죄에 자신을 내어주지 말아야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늘 동생을 지키는 자로서 사랑해야한다. 탕자의 이야기에서는 팀켈러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맏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했다면, 동생을 찾으러 갔어야 했다고. 그렇다. 가인 또한 마찮가지로, 동생이 현재는 의롭지만, 때때로 범죄로 말미암아 어그러질 수 있다. 그러할 때에, 오히려 그를 돌이키는 자로 살아가야한다.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정말 확장해보자. 우리 또한 늘 개개인적으로 또 공동체적으로 죄와 마주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죄 가운데 가인처럼 죄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나아가야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하나님처럼 음성을 들려주어야 한다. 죄가 너의 문 앞에 엎드리고 있다고, 죄가 너를 통째로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야고보서 5:19–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야고보서는 또 다른 의미에서 로마서와 짝인데, 삶의 흔적이 있어야 진정한 거듭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 또한 누군가를 죄에서부터 돌이키게 할 때에, 우리 자신도 사망에서 구원을 받으며, 우리의 허다한 죄를 덮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개개인적인 구원의 승리는 반드시 다시 공동체적인 승리로 이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