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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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εἶδον 30
우리 지난 시간에 봤던 요절 말씀을 한번 암송 한번 해볼까요? 요한복음 1장 1-3절, 12절, 14절 말씀을 암송해봅시다. 2주전 말씀의 마지막은 14절 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올해 요한복음 강해를 2주에 한번 설교로 모두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15-42절을 넘어서 43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독하여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43-51절]
43.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인사말-도입]
오늘의 주제는 ‘보라’ 입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에이돈’ 이라고 읽습니다. 이는 ‘보다’라는 미래 능동태 동사로서 신약에 339번 쓰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7번에 걸쳐서 나오는 중요한 동사입니다. 사실 신앙과 믿음은 기대하고 바라고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볼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지나온 15-42절 말씀은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세례 요한은 그 당시에 표적을 베풀고 능력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구절은 그 세례 요한의 많은 제자중에 2명이 그를 떠나 예수님을 따라 가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바로 안드레와(40절) 요한 입니다. 예수님의 12사도중 이 두 명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안드레는 그의 형 베드로를 데리고 오고 요한은 그의 형 야고보를 예수에게로 이끌어 옵니다.(41-42절) 그리고 오늘 본문에 또다른 제자인 빌립이 나오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에게로 초대하면서 ‘와서 보라’ 고 합니다.(46절) 앞 단락 38-39절에 “ 38,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이 따르는 자들에게 물어 보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그리고 “와서 보라’로 말씀 하시고 이어서 제자들도 전도를 하는데 ‘와서 보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후 ‘보라’는 동사가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계속 사용 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이 ‘와서 보라’고 하신 것은 믿음에 있어서 관찰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주의하여 살펴보는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12제자중 하나입니다. 벳세다에서 베드로,안드레와 같은 동향 사람입니다.(44절)야고보와 요한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후에 곧바로 자신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가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12제자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바돌로메를 나다나엘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오늘 본문에서는 이 나다나엘을 비중 있는 인물로 다룹니다. 이제부터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말씀 강해]
첫번째는 오늘의 주제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εἶδον 이라는 ‘보다’라는 미래 능동태 동사는 오늘 7번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46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초대의 말로 ‘와서 보라’는 곳에 쓰입니다. ‘보라’는 말에는 자신이 미리 보고 경험한 일과 사람에 대한 자신감이 들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설명하다가 나중에는 같이 가자고 말합니다. 좋은 영화를 보거나 좋은 사람을 만난 경우에도 우리는 가까운 친구에게 그 영화를 소개하거나 사람을 소개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리버풀fc)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사도 요한이 예수님에게 와서 묻습니다. 랍비여 어디에 계십니까? 묻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보라’ 말씀 하셨고, 빌립도 편견을 가진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와서 보라’고 권했습니다. 모두 소개하는 대상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가진 동사적 표현입니다. 47절은 또 “예수님이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7번의 ‘보라’는 동사는 빌립이 사용한 첫번째 ‘와서 보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님이 사용을 하십니다. 보는 것은 목격하는 것입니다. 목격한 것을 증언 하는 자를 증인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시작은 보는 것 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보았고 따랐으며 그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 우리는 ‘와서 보라’는 빌립의 카드를 더 이상 쓰지 못합니다. 어느 목사님을 교회에 ‘와서 보라’이렇게 설교 하시는 것을 봤는데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를 보라’는 카드를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형상을 보여줄 정도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와서 보라’는 초대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목격은 주체적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행하거나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누군가가 이루어 놓은 것, 누군가가 하는 것을 옆에서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을 부르는 예수님은 무엇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와서 보라’고 제자들을 초청하셨던 것일까요? 51절에서 말씀 하십니다. 51절’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확정적인 표현으로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아멘! 아멘!이라고 하시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마치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밧단 아람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돌베게 배고 잠들었다가 꿈에서 목격한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하늘과 땅이 가로막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공중 권세 잡은 자들로 인하여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가 없던 존재였던 우리가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막힌 구멍이 뚫려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본다는 의미는 육안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안을 통해 보이지 않는 믿음의 영역까지도 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일을 누가 하셨습니까? 51절에 ‘보리라’는 미래에 보게 될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심을 통해 실현 됩니다. ‘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일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어떠한 노력과 기여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냥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눅14장에 보면 16-24절에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서 모두가 변명으로 일관하며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자 주인이 종에게 길과 산울타리에 가서 강권하여 사람을 채우라는 장면이 나옵니다.(밭을 사고,소를 사고,장가들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보라’는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셨으며 또한 주님의 와서 보라는 부르심에 순종하여 이 자리에 있음을 믿습니다.
‘보라’는 의미는 우리가 잘 아는 민수기21장 광야에서 불뱀을 만나 이스라엘의 사건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2세대들이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에서의 자손인 에돔이 길을 내주지 않아서 바로 가면 반나절이면 될 길을 1주일을 광야로 돌아서 가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과 불만을 터트립니다. 심지어 40년을 하나님이 내려 주신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불평을 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이 불뱀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불순종을 징계하실 때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합니다.그때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불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매달아 물린 자마다 그 것을 보면 살리라’고 하십니다. 민수기21장 8-9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를 바라보면 우리는 죄의 중독으로 사망에 이르는 운명으로부터 벗어나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는 참 보는 것을 어려워 합니다. 현대사회는 자기주도의 시대라고 합니다. 내가 결정하고 내 뜻대로 하기를 원하고 그것이 바로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지 않고 누군가에 의지하는 삶은 나약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있는 문제를 당신이 해결하시고 청구서를 우리에게 내미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불순종과 반역의 죄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경험하게 되는 두려움의 근원과 채어지지 않는 허무함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이 믿어지든 믿어지지 않던 이것은 진리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우리를 위해서 다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와서 보라고 하실 때 우리는 그 초대에 순종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보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두번째는 나다나엘에 대한 나눔을 가지고자 합니다. 처음에 나다나엘은 빌립의 초청에 이렇게 답을 합니다. 45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은 먼저 구약에 정통한 이스라엘 사람으로 예수님을 말씀에 근거하여 소개 합니다. 성경에 기록한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의 반응을 보세요! 46절에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사실 성경은 삶의 의미가 어떤 추상적 합리체계가 아니라 한 인격체라고 말합니다. 그 인격체는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한 인간 예수를 말합니다. 기독교가 진리라면 우리의 삶은 우리가 만나서 관계를 맺는 한 인격체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요한은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그대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나다나엘은 그분의 초대에 이렇게 최악으로 반응합니다. 나사렛?그 후진 동네에서 그리스도라고? 지금으로 실감나게 말하면 ‘초졸에게 대입과외’를 받으라는 말처럼 어이없다는 반응이 아닐까요? 용인에서 무슨 사람이 있다고?여러분 그런데 나다나엘도 보면 갈릴리 출신입니다. 예루살렘 출신이 아닌거죠! 그런데 무시를 합니다. 멸시를 당하는 사람은 자신도 멸시할 사람을 찾습니다. 나사렛은 그렇게 낙후된 곳입니다. 옳고 똑똑한 부류에게 당신도 그들 편이라고 신호를 보내려면, 그들이 무시하는 사람들이나 지역이 언급될 때 함께 조롱의 눈빛을 보내면 됩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눈에 유능하고 똑똑하게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정체감은 정중하고 탄탄한 논증이 아니라 조롱과 멸시를 통해 얻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을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갈릴리에 유력한 자들의 시선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나사렛을 무시하고 조롱의 시선으로 본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가 바로 세상에 이런 시선으로 보여 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사렛’이라고 불려집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하면 내가 이미 경험해 봐서 아는데 너무 뻔해! 이러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알아보기도 전에 그 자리를 떠나 버리거나 아니면 심하게 조롱을 합니다.기독교가 그저 구식이거나 지적으로 세련되지 못하다는 생각에 속아 기독교에 담긴 진정한 보화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우리는 우리의 교만과 편견을 늘 주위해야 합니다. 나다나엘처럼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나다나엘은 그 내면 깊은 곳에 영적인 욕구가 있었습니다. 빌립의 와서 보라는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에 대하여 믿을 만한 증거를 조금 보여 주시자 즉각 충성의 대상으로 받아 들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욕구를 채워 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고 다가오는 상대방에게 예수님은 온유함으로 대하십니다. 그의 좋지 못한 태도속에서도 그의 마음 중심을 보고 칭찬하십니다. 나다나엘의 대단한 점은 49절에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실제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모두 알아서 이런 고백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다나엘의 이 고백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사역의 시작 시점에서부터 성육신 하신 당신의 목적을 볼 수 있게 됩니다. 51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은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화평케 하십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의 기대 / 하나님의 은혜
[마무리]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현대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라고 하는데요! 그들은 세상에 하나님은 없고 그러므로 당연히 절대적인 기준도 없고 삶의 목적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이 흐르는 대로 살라고 합니다. 삶의 목적 같은 것이 없다면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판단이 없다는 것에 저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솔직하게 자신에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양심에 비추어서 판단하시길 요구합니다. 도덕적인 기준이 아니더라도 부끄러운 일이 없고 타인의 것을 힘으로 취하거나 빼앗는 모습을 볼 때, 강자가 무력으로 약자를 억누를 때 화가 나거나 분노하지 않나요? 그 분노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팀 캘러 목사님의 책 “인생질문’에 나오는 글입니다. ‘알래스테어 매킨타이어’라는 스코틀랜드 기독교 윤리학자이자 도덕철학자는 그의 유명한 저서 [덕의 상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물의 목적을 모르고 서는 그것의 좋고 나쁨을 결코 분간할 수 없다”예컨대 시계가 좋은지 나쁜지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것입니다. 시계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시계로 못을 박으려다가 망가지면 ‘나쁜 시계’라고 불평을 하지는 않지요! 시계의 목적은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원리가 인간에도 적용됩니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지어졌는지 모르고서 어떻게 특정인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존재 목적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람에게 삶의 목적이 없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선악에 대해서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부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 1문이 무엇입니까?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웨스터민스트 소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인 무엇인가? 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내어 주시고 이르시되 요20:27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선언 하신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14절은 증언합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가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을 사랑하고 보고 또 봅시다. 암송합시다. 날마다 읍조립시다.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되신 말씀을 즐거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 갑시다. 우리에게는 매우 특별하고 탁월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 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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