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하나님의 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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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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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8-9page.
Romans 3:24–26 NKRV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핵심인 ‘속죄’에 대한 서술을 보게 된다. 누군가는 일찍이 이 구절을 ‘기독교 신앙의 성채’로 묘사한 바 있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이 말씀을 통해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했고, 또 많은 불쌍한 죄인에게 구원의 지식과 확신을 주셨다고 확신하고 있다.
시인인 윌리엄 쿠퍼는 깊은 가책으로 영혼의 고뇌를 느끼고 있었다.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극도의 절망을 느끼며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문을 통해 들어온 세찬 바람 때문에 그는 떠밀리다시피 의자에 주저앉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바로 성경 한 권이 놓여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말씀을 찾았는데, 눈이 멈춘 곳이 로마서의 3장 25절 말씀이었다. 그 때의 상황을 자신이 직접 묘사한 글이 있다.
“내 눈이 멎은 구절은 로마서의 3장 25절 말씀이었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내 속에 믿음의 힘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의로운 태양빛이 충만하게 비치어 왔고,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과 나를 온전히 의롭다 하기 위해 이루신 완전한 속죄를 깊이 맛보았다. 나는 평화의 복음을 믿었으며 영접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이 나를 붙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아마 나는 감격과 기쁨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두 눈은 눈물로 가득 찼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사랑과 경이로움이 넘쳐흐르는 하늘을 응시할 뿐이었다.”
Romans 3:24 NKRV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구절을 다른 말로 하면 이제는 ‘율법 외에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이며 ‘구원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무관하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로운 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25-26절은 그 ‘구속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13page.
구속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구속을 설명하는 의미깊은 두 단어, ‘화목(Propitiation)’과 ‘피(Blood)’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화목과 피를 통해 얻은 구속이 믿음이라는 도구로 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25,26절의 의미를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세우셨다” (set forth)는 말을 보자. 그것은 ‘명백히 하다’ (to manifest), ‘분명하게 하다’ (to make plain)를 의미한다. 어떤 의미일까?
첫째, 갈보리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거기에 예수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감상적으로 다루며, “나쁜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쉽게 희석되고 만다. 십자가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경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세우셨다’는 단어는 행동의 공개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이 일은 공개적으로 행한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행동이 외적으로 드러나도록, 또 다른 사람들이 그 행동의 의미를 고찰할 수 있도록,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기록될 수 있도록 세계 역사의 무대에서 공개적으로 그 일을 행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공개적으로 “예수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다.
*17page.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는가?
하나님이 이를 행하도록 할 마음이 생기도록 한 동기는 무엇이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것을 행하시도록 결심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가장 좋은 답은 바울이 사용한 단어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가운데 그 말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는 것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단어는 ‘나타내다(to declare)’이다.
이는 ‘그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보이다’(to show), ‘명백하게 하다’(to manifest),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다’(to give an evidence token), ‘증명하다’(to prove)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물로 사용했다고 말한다. 이에 더해 하나님은 그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고 계신다.
21절을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바울은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길’, ‘사람들에게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의를 나타내심을 통해서 무엇을 행하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런 속성들 중의 하나이다. 즉 하나님의 공평을 의미한다.
*21-22page.
“간과하심”이란 무엇인가?
흠정역(AV)에선 ‘용서하심’으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잘못을 범한 것이다. 헬라어에서 사용된 실제의 단어를 찾아보게 된다면, 바울 사도가 여기서 사용한 ‘용서하심’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용서하심’이라고 번역된 다른 단어들은 여러가지 형태로 신약성경에서 17번이나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보고 있는 이 단어는 유일하게 이곳에서 한 번 사용되었으며, 실제로 ‘용서하심’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의 올바른 의미는 ‘간과하심’(preterm-ission)이다.
죄를 ‘간과하는 것’은 죄를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간과’라는 말은 로마의 법률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로마법에서 이 단어는 어떤 사람이 유언을 했는데, 그의 유언에서 당연히 언급되어야 할 누군가를 그냥 지나쳐버린 경우에 사용되었다.
유언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는 많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것을 주겠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한 친구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간과하심’이다. 그 친구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넘어간다’(pass over)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빠뜨리다’(to overlook intentionally)의 의미를 지닌 ‘간과하심’이란 단어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전에 지은 죄를 용서하심으로’라고 번역하는 대신에, ‘전에 지은 죄를 넘어가심으로’,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라고 해야 한다. ‘용서하심’과 ‘간과하심’의 차이는 ‘용서하는 것’과 ‘벌하지 않는 것’의 차이이다. 쓸데없는 불필요한 구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결론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같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을 벌하지 않고 넘어가면, 어떤 면에서 나는 그를 용서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차이가 있다. 뒤집어 생각해보자. 만일 내가 그를 용서했다면 나는 확실히 그를 벌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는 것은 벌하지 않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간과하심’, ‘넘어감’이라는 이 용어는 ‘용서하심’에는 미치지 못한다.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간과하심’은 하나님이 갈보리에서 행하신 이 공공연한 행위가 구약 경륜 하에서의 행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의 자제하심과 용서하심 안에서 그 시대 사람들의 죄악을 넘어 가셨고 간과하셨으며 지나가셨다.
*39page.
갈보리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보이셨는가?
하나님이 갈보리에서 행하신 일은 죄로 인한 그의 진노를 자기의 독생자요 사랑하는 아들에게 쏟으신 것이다. 우리의 죄 때문에 나와 당신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그의 아들에게 임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것을 행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이전부터 알고 계셨다.
성경에서 우리는 ‘세상의 창조 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 관해 읽게 된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시작된 계획이었다. 하나님이 지나간 모든 세대 동안에 죄를 넘어가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이것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단번에, 그리고 동시에 자기도 의로우며 예수를 믿는 죄인을 의롭다 할 수 있게 했다고 바울 사도는 말한다.
하나님은 지금의 죄는 어떻게 다루시는가?
또 미래의 죄는 어떻게 다루려 하시는가?
해답은 역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 있다.
갈보리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의 2장 2절에서 언급하듯,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 인 것이다.
모든 죄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처리되었다. 옛 경륜 하에서 하나님이 지나가신, 말하자면 간과하신 모든 죄,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옛 경륜에 속한 모든 신자에게서 용서하신 죄가 처리된 것은 십자가 위에서이다. 그들의 죄는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처리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용서되고 있는 죄들도 역시 거기에서 처리된다고 바울 사도는 말한다. 또 언젠가 범하게 될 모든 죄가 역시 거기에서 처리되었다.
갈보리의 그리스도는 놀랍게도 ‘단번에, 죄의 문제를 처리하고 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위대한 논증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날마다 다른 희생 제물을 바쳐야 했고, 제사장들은 계승되었으며, 그들은 계속해서 정결한 제물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이분 그리스도는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죄의 희생을 드리셨다. 그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처리했다.
이제 그 이상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거기 갈보리의 그리스도에게 짊어지우셨다. 거기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만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다.
이전에 죄가 지어졌고, 지금도 지어지며, 앞으로도 지어질 것이다. 그런데 범죄했을 때마다 어떤 죄든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여기에 있다. 바로 이것이 바울 사도가 로마서의 3장 25-26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Romans 3:25–26 NKRV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모든 죄가 이 근거 위에서 용서된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한다면, 갈보리의 십자가는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선언하면서 감사하게도 그 점에만 그치지 않는다. 만일 그 사실을 선언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바울 사도는 25절의 ‘피’라는 단어에서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상의 다른 것이 필요없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26절을 첨가한다.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를 감동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십자가는 ‘인류의 고난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이미 하나님이 각 사람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용서받음은 단지 한 측면일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용서는 왜 쉬운 일이 아닌가?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실 뿐 아니라 공평하고 의로우며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은 용서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나타낼 뿐 아니라 용서를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영광스럽게 보여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 공평하심, 거룩하심, 그리고 그의 영원한 속성들의 모든 영광을 보여준다. 그것이 모두 십자가에서 함께 빛나고 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 만일 십자가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면 왜 이렇게 말하겠는가? 단지 사랑의 표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십자가가 단순히 하나님의 용서만을 선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 또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공평하신지 아닌지를 질문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으시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사실을 말하더라도 그 후에 다르게 행동하면 훌륭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가 자녀에게 “만일 네가 이것을 하면 사탕 살 돈을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하자. 그러나 소년이 그 일을 저질렀다. 그 때 아버지는 그를 용서하면서 그에게 사탕 살 돈을 준다.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며 참된 용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처럼 행동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행동은 늘 일치하시며, 결코 모순이 없다.
*50page.
하나님은 어떻게 의로우실 수 있으며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아들 안에서 경건치 않은 죄인들의 죄를 벌하셨다는 것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은 구분의 진노를 아들 위에 쏟으셨다. 그분의 아들이 우리가 받아야 할 징벌을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행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죄를 벌하셨다. 하나님은 그가 의로우심을 보여주셨고, 그 의로우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셨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의롭다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대신에 다른 이를 벌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자제하며, 이미 저질러진 죄들을 간과하면서도 의로움을 선언하신다. 죄를 용서하는 의로우심을 하나님은 그 때에, 그리고 지금, 또 영원히 나타내려 하셨다. 하나님은 한번에, 그러면서도 영원히 그 의를 나타내려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스스로 의로우심을 드러내며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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