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7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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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비유
포도원 비유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도 함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를 깊이깊이 누리는 우리 모든 친구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부터 우리는 새롭게 마가복음 말씀을 읽고 있는데요, 지난주에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었죠?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죠. 게다가 서로 누가 크냐를 가지고서 싸우는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죠? 너희 중에 먼저 되려고 하는 자가 나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데려오셔서 어린아이를 영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뭐다? 바로 어린아이와 같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지 않는, 어쩌면 버림받은 이들을 향해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 영접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 모든 공동체가 하나될 때, 우리는 하나되어 첫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지난 9장에서 조금 시간이 지난 후인 12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들 읽으셨겠지만, 오늘의 말씀은 어떤 내용이에요? 예수님께서 비유로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예수님의 비유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으신가요?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탕자의 비유 등 여러 비유들이 있죠.
이처럼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을 즐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비유로 말했을 때에 주어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인데요,
첫번째로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이해하기가 쉬워집니다. 그냥 전달하는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를 하면, 그 내용에 대한 선이해가 없는 이들에게는 전달받는 내용이 잘 이해되지가 않을 수 있겠죠.
그래서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서 같은 내용을 설명한다면 조금 더 이해가 빠르고 쉬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내용들을 설명할 때 비유를 사용하죠. 사실은 설교때도 그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지난주에도 사실 삼국지를 가지고서 비유하기도 했잖아요? 그런 것이죠.
자 그러면 두번째로는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특정한 비유를 했을 때, 특정한 이들만이 알아듣도록 할 수 있는 효과가 있을 수 있겠죠.
당장 제가 삼국지 예를 사용했다고 했죠? 만약에 제가 이 비유를 동양권 학생들과 서양권 학생들 모두 있는 상황에서 사용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 비유에 대한 이해는 동양권 학생들이 더 쉽게할 수가 있겠죠.
그래서 만약에 제가 동양권 학생들만 이해시키려고 했다면, 그런 특정한 비유를 사용해서 동양 친구들만 이해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두 효과 모두를 바라신 것이 있겠지만, 말씀에 따르면 두번째 효과를 더욱 바라셨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말씀에 나온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어서 알 수 있는 자들에게만 하시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비유의 말씀은 어떨까요. 이시간 함께 이 비유의 말씀을 천천히 살펴보며 확인해봅시다.
일단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비유는 듣는 대상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 1절에 보시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라고 하고 있죠?
그럼 대체 그 대상이 누구냐, 바로 이전 말씀에 등장합니다. 성경책이 있는 친구들은 11장 27절을 볼까요?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네 이 말씀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대체 무슨 권위가 너에게 있길래 이런 일들을 하느냐라고 묻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그러자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온거냐 라고 물으셨고, 그러자 그들은 군중들 때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고, 예수님도 그러면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오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1절에 등장하는 그들은 바로 방금 보았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떻게 보면, 그들이 먼저 예수님께 선공을 했고, 예수님께서 방어하신 후에 이제는 예수님께서 공격을 하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공격을 하시냐, 포도원 농부에 대한 비유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한 사람이 포도원을 새롭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다른 나라로 갑니다.
아마 그 사람은 꽤나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겠죠? 그래서 가진 돈으로 포도원을 조성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이나 시간이 없기 때문에, 돈을 주고 소작농을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2절에 보면 때가 이릅니다. 아마 포도원을 처음 조성한 상황이었으니,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4년정도를 예상하더라구요.
그렇게 포도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열릴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종을 시켜 포도원 소출을 받아오라고 하죠.
그런데 그 종이 돌아왔는데, 상처투성이로 돌아온거에요. 게다가 손은 빈손입니다. 무슨 상황인거에요? 소작농들이 계약대로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종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죠.
사실 이렇게만 해도 주인 입장에서는 아주 화가 날 노릇일 것입니다. 왜냐? 포도원 주인이 종을 보낸 것은 어떤 자격으로서 보낸 거에요? 자신의 대리인으로서 보낸 것이겠죠. 그러니 실제로는 그 사람이 종일지 모르지만, 그 포도원에 도달했을 때에는 주인으로서 소작농들에게 말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 예를 찾자면, 조선시대 우리나라는 사대외교라는 것을 했습니다. 다들 아시죠? 명나라나 청나라를 우리의 윗 나라로 모셨다는 거에요. 그러한 상황에서 종종 중국에서 사신이 파견될 때가 있습니다. 황제의 말을 전하거나, 아니면 뭔가를 요청할 때 그렇게 하겠죠.
자 그렇게 사신이 파견되었을 때, 사신은 본인은 신하이겠지만, 조선에 올때는 어떻게 되는거에요?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오는 겁니다. 특히 그 사신이 황제의 칙서를 가져왔다면, 거의 황제를 모시듯 그 사신을 대하게 됩니다.
사신이 칙서를 읽을 때 조선의 왕이 그 사신 앞에 신하로서 엎드려야 하는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포도원의 소작농들도 그 종이 돈을 받기 위해서 왔다면, 마치 주인을 보듯이 잘 대해주었어야 했던 거에요. 그런데 어떤 결과가 찾아왔죠? 오히려 그를 막 대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도전장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하고 싶다’라는 의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죠.
아까 말한 조선시대에서도 사신을 때리고 욕보였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당장 중국에서 쳐들어오겠죠.
실제로 성경에서도 이러한 사례가 등장합니다. 다윗 왕이 이웃 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그 사신이 정말 수치스러운 모욕을 당하고 돌아온거에요. 그러자 다윗은 곧장 그 나라로 공격해들어가 승리를 쟁취하게 됩니다.
이렇듯 대리자에 대한 예우는 만국 공통이기 때문에, 이 주인은 당장 달려가 그들에게 소출은 커녕 목숨을 없애도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한번 더 종들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러자 다른 종이 머리에 상처가 나고 모욕을 받고 옵니다.
그래도 한번 더 보냈는데, 이제는 맞고 오는건 기본이고, 아예 목숨을 잃고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지경까지 왔으면 왜 직접 가지 않는지가 이상할 정도인데, 주인은 엄청난 벼랑 끝 선택을 합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는 것이죠. ‘설마 아들은 저렇게 안하겠지’라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작농들은 주인의 생각보다 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 멀리서 아들이 오니, ‘저 아들은 상속자니 죽이고 우리가 그 유산을 다 차지하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결국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에 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주인은 포도원으로 직접 찾아가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이들에게 주는 것으로 비유의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에 성경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시편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역전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당장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낮은자가 첫째가 되었던 역전의 아이러니가 떠오르는 말씀이죠.
자 그런데 마지막 12절에서 이 이야기를 듣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한 것이죠. 왜요? 이 모든 이야기가 자신들을 가리켜 말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선 이야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주위에 많은 군중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생각을 실행하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따져봐야겠죠. 첫째, 이 비유가 대체 무슨 이야기이며, 둘째, 어떻게 그들이 이 비유가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았을까.
먼저 이 비유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이 포도원 농부 비유는 다른 씨뿌리는 비유와는 다르게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해주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비유를 들어야 할 대상이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도 내용을 자세히 보면 어떤 이야기인지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포도원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혹시 아시겠나요? 바로 하나님이시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포도원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의 빌런, 소작농들은 누구일까요. 이건 확실하겠죠. 바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같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니 기분이 나빴겠죠.
자 그러면 상황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시고 유대인들에게 그 나라를 관리하도록 말씀하신거에요.
그리고 이제 소출의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바로 하나님의 때, 구원의 때라고 할 수가 있겠죠.
하나님의 때가 왔기에, 하나님은 그의 종을 보내십니다. 그 종은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은 대부분이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이들은 그의 사역 내내 동족들로부터 비난과 모욕을 당했고, 엘리야도 목숨을 노려져 쫓겨다녔으며, 바로 최근에는 세례요한도 결국 목숨을 잃었죠.
사실 유대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좋지 않게 대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크신 벌이 임해도 벌써 임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과 크신 사랑으로 인내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누굴 보내신 것이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어떻게 한 거에요?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죽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큰 죄악을 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모든 유대인들을 진멸하시고 택하신 이스라엘 나라를 다른 이들에게 주시게 되죠.
그게 누구일까요? 바로 이방인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야기했던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원래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통해 그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셨는데, 유대인들이 어떻게 된 거에요? 넘어지고 말았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괴롭히고, 심지어는 그의 아들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 그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갈 수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이 가꾸신 포도원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이방인들에게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편의 말씀을 첨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천하게 여기고 무시했던 그 이방인들이 이제는 너희가 그렇게 바랐던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들이 될 것이라는 그 사실을. 버림받은 돌이 건물의 머릿돌, 그러니까 가장 중심이 되는 돌이 되었다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의 놀라움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에서 철저히 멀어졌던 이방인이라는 존재들, 어쩌면 구약에서는 빌런으로서 죽어져야만 했던 이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전에 함께할 수 있게 되는, 오히려 그 일에 앞장서는 역전의 아이러니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들이 지금 현재 우리에게도 벌어지고 있죠. 우리도 사실 뭐에요? 유대인인가요? 아니죠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을 이제는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이 전 세계 곳곳에 전달하는 복음의 선봉장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가 나타내는 하나님의 크신 복음의 역사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두번째를 살펴봐야겠죠. 어떻게 그들이 이 의미를 알 수 있었는가.
일단 먼저 첫 구절을 볼게요.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만드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좀 상세히 적혀있죠. 포도원을 만들어 울타리를 두르고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는다고 적혀있습니다.
왜 굳이 이렇게 상세하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냥 포도원을 만들었다 하면 될텐데.
이 역시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 단어들을 나열하시면서 이것을 듣는 이들에게 한가지를 떠오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노래한 포도원 노래의 일부입니다. 이사야가 선지자였기 때문에, 이 역시도 예언의 말씀이었죠. 여기서의 포도원도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만드시고 좋은 백성들이 나오기를 바랐는데, 품질이 좋지 않은 포도, 즉 죄악된 백성들이 나타났음을 한탄하시는 것이죠.
자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이들이 누구라고 했어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라고 했죠.
이들이 이 말씀을 몰랐을까요? 너무나도 잘 알았겠죠. 그리고 그 포도원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알았을거에요.
그러니 이들은 예수님께서 첫부분에서 하신 말씀을 듣자마자 이스라엘 이야기를 하겠구나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을 것입니다.
최근에 유행한 영화중에 파묘라고 있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 중간에 아주 의미심장한 문장이 등장하죠.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우리는 그냥 들으면 뭔소린가 싶지만, 최민식 배우가 연기한 등장인물은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단박에 알아채죠. 풍수사들 사이에서는 범이 우리나라를 상징했던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처럼 그들도 바로 이스라엘을 말한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주인이 하나님이고, 그것을 맡은 소작인들이 자신들임도 알았겠죠.
그런데 그 소작인들이 이 이야기에서 어땠어요? 완전 빌런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뭘 했어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죽여버린다고까지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모욕하는 것이라 여겼을 것이고, 심지어는 신성모독까지 한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그러니 예수님을 잡고자 했겠죠.
하지만 그들은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는 그 생각자체가 바로 소작농들의 아들을 잡으려는 생각과 동일했음을 말이죠.
결국 이 당시에 그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나요? 그들의 뜻을 이루죠.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비유 그대로 예수님을 죽여 던지게 됩니다.
이를 통해 처음 단순히 비유였던 그 이야기는 마침내 예언이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이미 아셨죠. 자신의 이야기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곧 이루어질 예언임도 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예언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그 자신을 통해 바로 눈앞에 자신을 죽이려하는 저 사람들의 죄,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포도원에 들어갈 기회조차 못얻고 있는 이방인들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였죠.
자. 이제 우리에게로 돌아와봅시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나는 저 소작농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어쩌면 우리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한번 살펴봅시다. 여러분, 이 비유에서 소작농들은 왜 갑자기 저런 일들을 벌였을까요? 그냥 포도원 갖고 싶어서? 원래 이들이 나쁜 사람들이라서?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한 가지 사실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1절과 2절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1절에서 2절로 바로 넘어갔으니 왜 저렇게 은혜도 모르고 저럴까 싶겠죠.
그런데 아까 제가 학자들에 따르면 얼마나 지났다고 했죠? 4년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대로 4년을 적용시켜봅시다. 이 소작농들은 주인이 어느정도 구성만 해놓은 포도원을 자신들이 4년간 열심히 길렀을 것입니다. 물도 주고, 벌레 안먹게 보호도 하고, 여러가지 일들을 했겠죠.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마치 자기 자식인 것 같은 생각이 들정도로 애착이 생겼겠죠.
그런데 4년 후에 갑자기 처음 본 사람이 와서 우리 주인이 포도 내놓으래 라고 한겁니다. 그러면 소작농들의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왜 우리가 한걸 날름 가져만가지?’ ‘괘씸하네’라는 생각이 들었겠죠.
그리고 결국 그 종을 때려서 보내고, 또 오니까 모욕도 주고, 또 오니까 목숨까지도 빼앗은 것이죠.
자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왜 그들이 그렇게 행했는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잘했다고 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그들은 큰 죄를 저질렀어요. 그러면 왜 우리는 그들이 죄를 저질렀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이니까? 바로 그 주인이니까.
물론 소작농들이 4년간 열심히 모든 것을 키웠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 노력도 포도원 자체가 있었으니까 가능한 것이죠. 포도원이 없으면 그 노력도 존재할 수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심지어는 그 주인이 힘들겠지만 스스로 모든 포도원을 관리할 수도 있었을거에요. 그럼에도 소작농들에게 맡긴 것이죠.
그런데 소작농들은 착각을 한 것이죠. 자신들이 노력을 할 수 있었던 것조차도 사실은 주인의 허락 때문이었는데, 반대로 자신들 때문에 포도원이 존재했던 것처럼 생각을 한 것입니다.
결국 이 소작농들에게는 뭐가 없었던 것일까요?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원래 있었고 원래 가능한 것처럼 여겼다는 것이죠.
자. 그럼 다시 한번 우리에게 돌아와보자구요.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단호하게 저는 소작농과는 다릅니다! 라고 선포할 수 있나요?
어쩌면 우리도 나도 모르게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살아가고 숨쉬는 것, 함께 모여 공부하고 또 예배하고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대하는 것. 이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의 우리 삶이 나 스스로 이뤄낸 것이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점차 커져나가 우리의 삶에서 주님을 지워버리게 되는 죄악으로 변하게 되겠죠.
하지만 우리 삶은 절대로 우리 홀로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하고 또 이후에 밥을 먹고, 저녁에 공부하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셨기에 가능한 것들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주님이 원하시면 바로 당장 끝나더라도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이런 것들이 주어지니 원래 있었던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이죠.
마치 당연히 숨쉬기 때문에 공기의 존재를 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된거에요? 유명한 영화대사처럼, 호의가 계속되니 우리는 그것이 권리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살 수 있는 것임에도, 포도원 주인에게 따지고 요구하고, 그것이 정당한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어쩌면 뻔뻔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인데도, 주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그 모든 것을 계속 허락해주시고, 심지어는 권리인것처럼 요구하는 모든 것들까지도 더 허락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우리는 깨달았죠. 우리가 앞선 소작농들이 쫓겨나서 겨우 자리잡은 소작농인데도 또 똑같이 행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이제는 바뀌어야겠죠. 뭘 가져야 할까요? 감사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모든 것들에 감사하고, 그것보다 더 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할게요. 우리는 오늘 포도원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심에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순종하셨다는 것을, 또한 우리도 어쩌면 저 소작농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떠도는 명언들 중에 이런 말이 있죠.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바랐던 내일이다’ 무슨 의미에요? 우리가 그렇게 허무하게 살았던 하루가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하루일 수 있다는 거겠죠.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아가는 이 하루, 더 나아가서 이 한시간, 모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허락하신 선물과 같은 시간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주셨을까요? 우리가 뭔가를 잘해서? 아니겠죠.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또한 우리에게 큰 계획을 주셨으니까. 모든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셨고, 또한 우리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이들을 향해서도 사랑을 베푸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일들을 바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십니다. 우리 모든 하임 친구들,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것들, 모든 시간들을 허투루 사용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향해 그 모든 것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선물과 같은 것임을 기억하고, 정말 다른 이들도 함께 포도원에 들어올 수 있도록,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도록 함께 나아가는 모든 하임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찬양 : Born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