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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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시는 일

지난 주 우리는 9장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참석하지 못한 분이 있었기에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구걸하는 맹인을 만나서 눈을 뜨는 기적을 베푸시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8절 이웃사람들과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 그리고 13절부터 바리새인과 20절 맹인의 부모가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한 부류가 더 있는데 ‘제자’입니다. 당연히 제자가 있었을 것으로 알고 있지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9장 본문에서 다시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35절부터 예수와 맹인의 대화가 나오는 구조로 진행이 되는데 특이한 것은 맹인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라는 것과, 맹인의 고침받고자 하는 요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화의 구조도 처음 제자들과 맹인이라는 사람에 대한 것보다 맹인이라는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인데 2절에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라는 주제입니다. 이상하죠. 맹인과 죄를 제자들이 묻는 것입니다.
조금 더 범위를 살펴서 공관복음 중에서 마태,마가복음서에 7번의 맹인 치료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는 ‘두 맹인이 따라오면 소리 질러 이르되…우리를 불상히 여기소서’라고 했고 12장에는 귀신이 들려서 눈 멀고 말못하는 상태로 다른 사람에 의해 이 사람을 고쳐달라는 상황에서 고쳐주셨다고 나옵니다. 대부분의 기사가 자신이 또는 타인에 의해 예수님 앞으로 나왔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즉 이 사건은 3절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제자들과 연결이 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갖고 싶은 것에 의미를 둡니다. 제가 어릴 때 부모님께서 서울에 다녀오실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을 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는데 돌아오시는 길에 권투 글러브를 선물로 사다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권투에 대해서 좋아 했던 것도, 배우겠다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일방적으로 권투 글러브를 사다 주신 것이죠. 그러고 보면 어릴 적 태권도 도장에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갖다가 너무 무서워서 한 두번 다니다 안다닌 기억을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로망에는 남자는 씩씩하거나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저의 시절에는 그렇게 선물을 주시는 분에 대한 고마움이 늘 먼저였지만 언젠가부터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갖고 싶은 것’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생일이 되면 ‘뭘 갖고 싶나요’라는 질문이 저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갖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야 이러저러한 것들을 갖고 싶다곤 하지만 선물하는 사람의 형편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 맹인은 여러분 생각에 ‘눈을 뜬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본문에 보이지 않는 내용을 그래서 공부를 했으니 여러분에게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제자들과 이야기하신 후 예수께서는 맹인에게 직접적으로 6절에 관계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전체 이야기의 주제는 1-5절에 있는 이야기이며 대상은 제자이며 주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6-7절 두 절은 설명도 없고 그저 팩트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6절 중반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절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가 끝입니다.
사실 1-5절만을 설교의 주제로 잡아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일과 맹인이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일에 관계가 제자된 자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요6:37, 절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런데 대상이 있습니다. 여기 맹인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일이 하나님 편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이지만 우리 편에서 내가 원하는가? 아니면 내가 원했던 것인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생각해보겠습니다. 나의 부모가 믿어 모태에서부터 믿음의 길을 갖는데 그렇지 않고 여러분이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할 때 과연 나는 예수를 믿을 것인가를 냉정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만 14세가 되어 여러분 스스로가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고백한다면 적어도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맹인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는 가를 분명하게 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8절에 이웃 사람들이 그가 앉아서 구걸하던 자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가 성전 앞에 있었음으로 추측하게 합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에 구걸하기 제일 좋은 장소라는 것이죠. 그런 장소에서 실로암이라는 연못까지의 거리는 대략 400-500미터 거리입니다. 어린 나이가 아니라는 정보는 21절 그의 부모의 증언에서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라는 정보를 통해 꽤 오랬동안 이웃들이 알았던 성인이었습니다. (사진)실로암은 예루살렘 성에 거의 가까운 기혼 샘이라는 곳에서 물이 나오는데 역사적으로 이곳이 자주 침범을 당하는 지역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윗쪽이 다윗 성으로 성전 아래 그러면서도 왕이 거주하는 위치이다 보니 공격이 되면 늘 식수 문제가 컸기 때문에 이곳에서부터 터널을 파서 가장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물 길을 낸 것이죠 그러니까 실로암은 일종의 물 저장소 같은 역할을 합니다.
7-8장에서 소개된 초막절 행사 중에서 이곳부터 물을 길로 성전의 재단에 붓는 명절 행사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수’라고 비유하셨던 기억도 같이 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성에 거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이곳을 찾는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장소가 실로암 못이었고 맹인은 비록 거리가 있더라도 익숙한 발걸음으로 이곳을 향했을 것입니다. 7절 중반에 씻으라 하시니 맹인의 반응은 ‘이에’라고 바로 이어서 행동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정말 좋았습니다. ‘밝은 눈으로 왔더라’고 했으니 다시 그곳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자신을 낫게 해 준 분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35절에 ‘그를 만나사’라고 했을 때 맹인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죠. 36절에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라고 말하죠. 3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자신을 맹인에게 밝히십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눈을 밝혀 주신 분이 예수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이미 본문을 함께 읽었으니 11절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라고 말함으로 그가 예수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12절에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는 말로써 그가 돌아왔지만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알았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좀 더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합니다. 글을 쓴 요한 사도는 제자와 하나님의 일을 맹인 그리고 그를 알던 사람들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의 흐름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5절 특히 2절의 맹인으로 태어남과 죄의 관계계와 3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냄의 관계를 알아야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4-5절의 깊은 의미를 살펴야 앞으로 바리새인들과의 대화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했을 때 현실의 문제와 우리의 믿음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출발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에서 출발하는데 여기에 주의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 범죄했다는 의미가 남의 물건을 도둑질 했다처럼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들에서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를 자꾸 한 문장으로 정리하려고 한다는 것이죠. 눅15장에는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이 나옵니다. 그가 실패를 경험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와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15:21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에덴 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통해 하나님과 아들 그리고 성령의 삼위 일체의 본질적 사랑을 나누신 것입니다. 마치 한 가정이 남자와 여자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다시 자녀가 태어나면 그 사랑이 함께 하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떠난 배신, 아버지의 집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아들로 살았던 삶을 떠난 것을 알았기에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를 깨닫는 것이죠. 그래서 요한복음의 시작은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아예 못을 박아 두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결과는 이땅 모든 인생의 불행에 시작이 됩니다. 죄라는 뿌리에서 출발한 시기, 미움, 욕망 이로인한 고통과 스트레스는 육체의 건강까지도 파괴합니다.
장례식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에 그곳에가면 아픔과 슬픔이 없는 곳이라는 표현을 기독교 장례가 아니어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이 땅의 고통이 ‘죄’라는 곳에 출발은 했지만 그럼에도 여기 ‘맹인’ 즉 태어날 때부터 모든 불행을 갖고 태어난 이를 향해 ‘너는 죄 때문에 그래’라는 잘못된 믿음관을 예수께서 바르게 교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전통에서 잘못에 대한 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한다는 출20:5절의 말씀을 이고지고 살았습니다. 특히 그들이 우상숭배를 함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앗수르에게 바벨론에게 그리고 지금 로마의 압제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맹인과 같은 자들을 범죄에 대한 결과로 낙인찍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어 ‘구걸’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죠. 유대인들의 삶은 철저히 ‘죄를 범하지 않는 삶’이 목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학수고대하는 메시아야 와서 자기들을 다시 모세처럼 구원해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그렇게 철석같이 지키는 ‘안식일’ 규정을 무시하고 조인인 병자를 가까이하고 고치는 모습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과 같이 여기는 예수님을 죽어 마땅한 범죄자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죄인을 향해서도 사랑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배신을 당하면 반드시 복수해야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랑이 있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즉 독생하신 아들을 보내시는 방법으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니 그것을 보고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다시 한 번 노파심에 그렇다고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야라고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맹인처럼 먹고 살고 있다고 해도 그가 마땅히 해야 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인 성전을 앞두고도 그 앞에서 인생을 마쳐야 함에도 예수님께서는 1절에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그분의 시선이 여전히 저와 여러분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살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절에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하신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실 때나 그분이 보내신 영으로 우리 마음에 거하시며 여전히 기회의 시간을 얻고 있는 지금의 때는 동일한 것입니다. 빛이 있을 때 행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시선을 주셨다고 믿는다면 지금 여러분께서 하나님께 응당 돌려야할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저는 인생이 다 지나고서야 한번 아프면 빨리 낫지도 않는 시간에, 보아도 침침해서 안경을 껴야 하는 시간에,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매일의 걱정이 떠나지 않는 시간이 되서야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어쩌면 저 개인 인생에 마지막 빛이 있는 시간이라 생각하면 조금 일찍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교회와 집 그리고 학교 밖에 몰랐던 고등학교 그때의 시간에 하나님을 향하여 더 기뻐하면 예배하고 내게 주신 재능을 드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지금이라도 이렇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지금이라도 후딱 지나갈 시간인데 이렇게 붙잡아 주시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보다 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는 75세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신 말씀은 이렇게 긴 예수님의 말씀과 달랐습니다. 창세기 1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렇게 시작한 그의 여정은 나라 수메르에서 앗수르 다시 아람을 거처 애굽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말 그대로 대장정이었습니다. 대형 사건은 얼마나 많았는지 집안 안밖으로 시끄러웠습니다. 결국은 자녀가 없어 부인이 몸종을 들여보내 대를 이어야할 정도의 상황까지 내몰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난 시간은 17장에서 99세 였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17장 3절에 ‘엎드렸더니’ 였습니다.
저 같으면 그렇게 못합니다. 단언컨데 그렇습니다. 엎드린 그에게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야속할 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의 인내가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 받는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삶의 태도가 궁금하신 분들은 창18장을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12장에서 우리 한글성경에는 보이지 않지만 ‘너는 가라’는 말씀에는 이런 표현이 숨어 있습니다. ‘너를 위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너를 위해 가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맹인의 의도와 상관없어 보이는 이 기적은 기적보다 더 큰 ‘믿음으로 인한 구원’인 ‘너를 위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드러난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 제자들이 6장 이전에 등장해 그렇게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 했을 때’ 요한복음 6: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는 이어 29절에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하신 일이 지금 맹인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미 1장에서 예수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에 맹인은 각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신 생명이 즉 믿음의 씨앗이 맹인의 마음 속에서 발아해서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일을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게 좋은 것이 있거나 생겼다면 누가 가장 먼저 누리겠습니까? 당연히 여러분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기 교회가 세워지고 제가 말씀 사역자로 세워진 것이 좋은 일입니까? 분명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앞으로 있을 아니 없을지도 모를 사람들과 나누는게 맞습니까?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것이 맞습니까? 물어보나마나 아닌가요? 여러분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피아노도 강대상도 저 공간도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방편을 통해 일하십니다. 긴 시간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 결과가 자기와 자기 밑에 속한 모두가 받는 복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도 늦은 시간에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맹인처럼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있는 자가 되지 마시고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일들이 믿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저자 요한은 오늘 우리와 여전히 비슷한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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