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복음이란(3) : 복음의 첫 단계” (The First of the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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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로마서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오늘은 시리즈 두 번째 설교가 되겠습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이 로마서의 처음 시작부터 오늘 본문이 있기 전까지,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신에 대해, 그리고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그 모두를 포함한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해 먼저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 강해를 시작함에 있어서, 그 첫 서론에 관한 설교 제목을 ‘정체성’이라 잡았던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먼저 신앙인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가지고서야 하나님이 말씀하신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안내서가 바로 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 주 살아가시면서, 우리의 신앙을 견고히, 그리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이 복음을 알아가기 위해 성경책은 몇 장쯤 읽어보시고, 또 묵상과 기도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기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을까요..? (대답하기 곤란하니까 빨리 넘어갑시다. 아무튼..그래서..)
사도가 간절히 로마의 성도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그 신령한 은사, 즉 ‘복음’ 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주제에 대해 이제 더 자세히 들어가보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사실 처음에는 ‘복음의 첫 걸음..’이라 지었는데, 말이 뭔가 이상한 거 같아서 다시 ‘복음의 첫 단계’라 정해보았습니다.(강조 *복음의 첫 걸음)
우리가 복음을 깨닫고 누리기 위해 가장 먼저 ‘경험되어야 할 것’ 그 첫 번째 단계에 대해서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첫 걸음마를 떼지 않고서야 걷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넘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첫 걸음은 미숙하기 마련입니다.
“첫 걸음” 이라해서 단순히 우리의 다리, 즉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닐겁니다.
우리 인생에도 첫 걸음, 즉 시작이라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다 있었습니다. 그 시작이 어떠했습니까..? 늘 좋았습니까..? 개인적으로도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하면서 자주 넘어지고 다시 일어섬을 반복하면서 그 경험치가 쌓여서 마침내 익숙하게 걷게 되듯이...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수많은 경험들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도 처음엔 무엇인가 어설프고 시행착오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 시행착오를 통해 우리는 초보자의 길을 서서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여정에도 어쩌면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본래 바울은 주님을 만나니 기전 ‘사울’의 이름으로 타고난 열정으로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서는 자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13절에 “그가 예루 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ppt)
이처럼 바울 역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모두가 알 듯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시행착오를 다르게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섭리..’라는 단어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궁극적으로 다스린다의 의미 섭리 말입니다.
신앙인에게 우연이나, 운명이라는 개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라는 단어를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깐 멈추어 서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때, 그제서야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우리 입에서 섭리가 비로소 ‘은혜’라는 말로 바뀌어집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였구나..”라는 것을 되내이게 됩니다.
사울이 바울 되었던 것은 단순히 바울 자신 스스로 돌이켜서 하나님께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 악독한 핍박자에게 어느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며 잠시 잠깐 그의 눈을 멀게 하심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이라 말합니다. 그가 그를 강권하여 부르셨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있었으니..” (ppt)
여기서의 ‘부르심’이란 원어의 의미는 공식적으로 참여나 출석이 요청되는 사람을 특별히 지정하여 특별히 거부할 수 없는 요청으로 부르신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 ‘강제소환’이란 의미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소환, 부르심..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이 마치 이와 꼭 같다는 것을 아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을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강제소환이라는 것을 아시길 바랍니다.
또 14절에 자신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내가 ’빚 진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는 하나님께 분명히 다 갚을 수 없는 어떤 빚을 진 모양입니다.
어쨌든. 우리 중에 그 누가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에 하나님보다 먼저 “오 신이시오, 오 주여! 오시옵소서!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라고 외쳐 신앙을 갖게 된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계시다면, 가까오 오지 말길 바랍니다. 무섭습니다).
우리가 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치이고 저리 치이고 구르고 구르다가 만신 창이가 돼서 교회당에 굴러들어온 것 아닙니까..? (아 나만 굴렀나보다..다들 폼나게 들어오셨고..‘이제 살만큼 살았는데 이제 뭐 한번 믿어 볼까..?’)
그런데 말입니다. 희안하게도 굴러들어오긴 내가 굴러 들어온거 같은데, 하나님은 참 애매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택하였고 너를 불렀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린 늘 헷갈리고 어안이 벙벙할 노릇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사 4장에서10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 (ppt) 이라 말합니다.
이처럼 로마서는 바울의 신앙여정 가운데 경험한, 즉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경험한 모든 시행착오가 녹아져 있는 위대한 책입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 즉 자기 자신을 들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16절에 바울이 말합니다. 바울 자신의 삶을 걸어 전하는 즉, 오직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믿게 나의 복음은 나를 비롯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단어를 유의깊게 살펴야 합니다.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이 ‘구원’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자 복음이 무엇을 주는 것이다? 바로 ‘구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라는데..
여기 구원이라는 단어는 원어적으로 이러한 의미를 가집니다. (ppt)
σωτηρία sōtēria 구원, 구출, solvation
구원이라는 단어가 아무생각없이 들리실 것 같아서 사전적 의미를 좀 더 찾아보면 이러합니다. (ppt)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 내는 일}
이러한 개념의 구원이 16절에 ‘먼저는 유대인 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 이 유대인과 헬라인의 개념에 대해서는 제가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린바, 바울의 이 단어를 쓴 의미는 곧 ‘모든 사람’을 지칭할 때 이러한 단어를 쓴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는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아! ‘모든 믿는 자에게’ 즉 사실 모든 사람에게는 “구원”이 필요하구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이 필요하다라는 것은 곧 사람이 사실은 지금 어떤 깊은 곤경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구출의 의미가 있다는 것에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현재 상태는 어떠하십니까? 혹시 여러분에게도 지금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십니까..? (나 이미..구원받았는데 뭔소리요..?, 허, 나 지금 꽤 괜찮오..~지금 잘나가~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제가 인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직장도 옮기고 했는데, 허, 급여가 더 올랐습니다~ 이사도 전에 집보다 더 넓고 좋은 집니다.
물론 인천이라는 변두리 동네 특성상 가격은 더 쌉니다. 변두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놀러오십시오, 맛있는 음식으로 섬기겠습니다.
이만하면 됐지머..사실 저도 뭐 부족함이 없다 싶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 밥 굶는 사람 있습니까..? 없는 것 같습니다. 있으면 큰일 납니다. 교역자 분들에게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사실 그 모든게 “겉 보기에 그렇다..”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을 누가 다 알겠습니까..? 저마다 다 삶의 고충이 있길 마련입니다.
최근 기사를 좀 보니까
OECD 국가 중에 한국의 행복지수가 거의 최하위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쉽게 말해 개발도상국이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전쟁 중에 있는 나라를 제외한, 그나마 먹고 살만한 나라 중에 거의 꼴등이라 말입니다.
보시면 이혼률, 자살율 등등 나쁜건 거의 1등입니다. 참 아이러니했습니다. 대한민국? 그래 겉 보기에 그럭저럭 꽤 살만한데..이 뭐 이래..?
물론, 어느 나라나 사회 속에 빈부격차가 있고, 삶의 수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들, 사회 취약층이 있길 마련입니다. 그러나 저러한 통계는 비단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지들이 둘이 좋아서 결혼했자나..? 아닌가? 왜 그렇게 이혼들을 하는지 모르겠네. 요즘처럼 결혼 안하거나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저러나. 한국사회의 큰 문제는 자살률은 늘어나고 충샐률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랍니다.
청소년 우울증은 또 세계 1위랍니다. (현민형제 아유 오케이..?), TV를 키면 온통 아이돌 가수에, 트로트 가수에, 오디션 프로그램에..무슨 한국에는 노래쟁이들만 있나..직업이 가수 밖에 없네..그게 아니면 여행프로그램, 먹방, 등등
청소년들이 이 세상을 좀 다양한 시각에서 좀 봐야 하는데, 맨날 접하는 미디어들이 그런 것 뿐이라는 생각에 씁쓸합니다. 물론 좋은 프로그램도 있겠지만, 대부분 아이들이 소위 꽃히는 것들은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사회를 분석한 학자들은 이러한 의견들을 냅니다. 급격한 1950년 전쟁을 이후로 거의 50년만에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부작용들 때문이라 말합니다. 급격한 성장이 낳은 부작용, 빈부격차, 치열한 경쟁사회 등으로 인해 사람들의 피로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뭐든지 ‘빨리 빨리 빨리 빨리,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이 ’빨리 빨리..‘라고 할 정도로..)
그 물질만능주의, 성과주의 사회가 낳는 필연적인 부작용들이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요즘 처럼 기상천외한 살인사건이 한국사회에 많이 일어난 적은 적어도 저 살아온 시절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참 겉보기에 그럴 듯 하게 잘 살아가는 연예인들만 봐도, 그렇게 우울증이 많고 사건 사고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이 허다합니다.
각종 추악한 성범죄 등..또..이제 한국도 곧 마약 공화국이 될 거란 의견들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싸우지 않으면, 생각보다 이 약물 문제도 심각한 수준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개발도상국과 전쟁에 온 국민이 신음하고 있는 가난한 나라도 참 문제입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많아도 문제, 온갖 질좋은 삶을 누리는 나라들도 다른 문제들로 신음합니다.
사실은 문제 없는 개인도 없고 나라도 없습니다.
과거 영국의 C.S Lewis라는 작가가 참 의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ppt)
“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지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I believe in Christianity as I believe that sun has risen, not only because I see it. but because by it I see everything else.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가 마치 어느날 강권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신앙을 가지게 된 후 그가 경험하게 된 ‘변화’에 대해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바, 기독교 신앙은 나 자신과 그리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렌즈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다른 렌즈, 즉 ‘신앙적 관점’이라는 것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마치 내가 태양 빛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신앙으로 감겨져 있던 나의 눈의 띄여지자, 나란 존재가, 그리고 이 세상이 이 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주님을 믿고 나니 이제는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경이 직언하는 바, 여기 새롭게라는 단어보다. 본래 인간과 세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참 모습”, 즉 실상을 볼수 있는 안경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세상은 겉보기에 그럴 듯 하게 꾸며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서는 음식이 남아돌아 버리는데, 어디서는 마실 물도 없거나, 혹은 먹을게 없어서 사람이 죽어가니 말입니다. 좀 차분하게 생각하면, 우리 모든 인간 세상사는 온통 불의, 불공평이 만연해 있습니다.
개인도 그러하고 세상도 그러합니다. 철학자들도 인간이 날 때부터 존재해온 것만 같은 이 악에 대해, 고통에 대해 그렇게 고뇌하며 스스로 해결책을 가져보려 하지만, 결국 하는 소리가 쉽게 말해 “원래 인생은 고통의 바다야..”, ‘넌 그저 이 세상에 그저 던져진 존재야..’, ‘넌 자신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해..’
결국 실존주의나, 낭만적인 회피로 얼버무리곤 합니다. 참 신기하게도 믿지 않는 자들이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이 지나간다는 말을 참 많이 하는걸 들었습니다. ‘다 지나가는거야..’
문제는 지나가서 어디로 가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 비티버시기 애들처럼 ‘아 몰랑’ 춤이나 추자, 하는 거지요 솔직히 말해서)
결국 세상의 대답은 ‘아 몰랑’, 리듬에 몸을 맡겨, 우선 춤을 추자, 즐겨, 어떻게든 되겠지..실제로 비티애들이 미국에서 1위한 곡 가사가 그런 내용이더라고요 ‘퍼미션투 댄스라는 곡’ 그래서 저는 그 제목을 제 나름대로 새롭게 붙이기를 ‘아 몰랑’이란 곡이다. 하하.
그래서 16절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알 수 깊은 수렁에서 구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즉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 사도가 16절에 그 구원의 필요를 제시한 후 그 복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17절을 함께 읽습니다. (Ppt)
먼저 바울이 그토록 자랑하는 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난다..“의”라는 단어를 생각해봅시다.
원어적으로 δικαιοσύνη dikaiosynē (ppt)
이는 일반적으로 올바름, 즉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착한 생실이나 정직한 삶의 규범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그러한 의를 넘어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바름, 공의라고도 합니다. 공평하고 의로운 도의 의미입니다.
설교 서두에 제가 언급하였듯이, 그럭저럭 살만한 이 세상에는 어딘가 모르게 냄새나고 괴상한 삶의 요소들이 발견됩니다. 여러분 생각에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이 정말 바른 세상 같습니까..?
물론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은 분명히 하는 듯 합니다. 진보주의자들이 외치는 공정한 사회가 이 땅에 도래할 것 같습니까..?
언젠가 영화에서 들었던 대사가 생각이 납니다. 사기 화투 도박꾼이 화투로 사기치는 연습을 하다가 뉴스에 다리가 무너졌던 소식을 듣고, 그 사기꾼 스승에게 하는 말이 ‘아니 다리가 무너져요..?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될라 그래요..?’ 그러자 옆에 있던 그 사기꾼 스승이 ’너는 이 세상이 공평하다 생각되니..?‘ 그러자 그 사기꾼 제자가 ’아니 당연히 그래야 되는거 아네요..?‘ 그러자 스승이 호통을 치며 말합니다. ’이런 간나새끼, 이 세상이 공평하면 우린 뭘 먹고 사니..? 연습이나 더 하라!‘
공평한 세상은 이 땅에 적어도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절대 이루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진단하는 인간은 애초에 글러 먹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5절을 보면..(ppt)
나중에 다시 살피겠지만 뒤 이어 나오는 로마서 3장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우리 인생에 고난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저 우연히, 운명론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나서 일평생 죄의 영향력 아래서 신음하다 죄인으로 죽기 때문입니다.
일 평생 죄의 영향력 아래 신음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 깊은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허물 많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6절에 나타나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에서 모든 영어성경은 믿는다를 believe로 번역하였습니다.(ppt) 이것은 믿고 맡기다의 의미를 지닙니다.
또 17절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에서의 믿음은 ’faith‘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에서의 faith는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닌, ’신뢰, 확신‘의 의미와 가깝습니다.
이제 여러분 신앙의 첫 단계가 무엇이라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죄송하지만 한 번 따라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믿고! 2. 맡기는 것!”, 예 그렇습니다.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거나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한테나 맡길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믿는 분,그 대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 대상을 신뢰하고 맡길 것 아닙니까..? 또한 내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것의 실체와 그분을 아는 것이 지향하는 목적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그분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주는가가 분명하게 있다.
오늘 본문 편지의 수신자인 로마의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왜 그런 그들에게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다시 재차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들이 선물로 받은 그 ‘그 믿음’ 그 믿음의 실체, 그 믿음이 지향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당신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는가?는 또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믿고 맡긴다.’ 무엇을..?
그래서 이제 17절로 나아가겠습니다. 앞에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PPT)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논리는 이겁니다. 하나님의 의에 모든 것을 믿고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라는 것입니다.
그 신앙에 대해 아주 논리적으로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 번 째 단계, 궁극적으로 복음에 나타난 우리가 믿어야 할 하나님의 의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에 관한 설명을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증거로 하여 설명합니다.
하박국 2장 1절에 보면 (ppt)
“내가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하박국 선지자는 특별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절에 주님이 무엇이라 하셨는지 봅시다. (ppt)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중략)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묵시란, 곧 ‘약속’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에서 인용한 하박국서 2장 4절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는 말씀의 배경이 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복음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의란, 바로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구약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구약의 믿음이 동일하게 이제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의 믿음에 이르는 의입니다.
아, 그냥 믿으면 간단하지 않나요? 아닙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로마서에서 아주 길게, 그리고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 암적인 방해요소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의’,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의’를 다루었습니다. 이제 그와 반대되는 개념 ‘불의’가 18절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우리를 가로막는 요소. 이 불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불의란 쉽게 말해서 의의 반대 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르지 못한, 악한, 공평하지 못한, 등 모든 악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악이 '진리'를 막는다고 말합니다. 진리, 즉 분명한 사실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이미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알만한 것을 그들에게 보임이라.." 여기서 “보임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마음, 감각, 판단' 등에 명확하게 드러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을 본래 '인식하게 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9절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들에게 분명하게 보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하나님? 신? 그런게 어디있어..?' 그런 그들에게 말하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 온 세계를 보고 과연 신이 없다고 핑계할 수 있는가..? 그래서 인간들의 핑계가 무엇입니까..? 빅뱅이론, 팽창과 폭발로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한물 간 이론이지만, 진화론 등..
오늘날은 과학과 철학이 아주~~ 그럴듯하게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서 들으면 "오 그런가보다.."하는 똑똑한 사람들이 정말 이 세상에 많습니다. 이 자리에서 다 다룰 수 없으니 서점가서 한번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말입니다...참 이상하게도,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면서부터 오늘날 까지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종교.."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종교심.."이라는 것이 이상하게도 인간 세계에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과 철학이 발전해도 말입니다. 그 스스로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종교심', 즉 신을 향한 무언의 갈망과 영원에 대한 생각이 인간 속에 끊임없이 존재해 왔다는 것입니다.
종교, 종교심이라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두렵기 때문에, 내가 믿을 만한 대상을 경외함으로 우러러보고 그것에게 의지하는 것을 종교심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종교가 전 세계의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통계적으로 가까운 나라 일본만 해도 2~3만개의 무속신앙이 존재한답니다. 근래 제가 아내랑 일본 여행을 다녀왔는데, 세상에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죽으면 그 고양이 신을 집에 모시더라구요, 그러한 것이 일본에 ‘신사’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로마서가 씌여진 이 당시 로마의 종교심 또한 강렬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역시 ‘신에 대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인간은 결국 ‘죽을 운명을 타고난’ 존재지만, 이에 반해 신은 ‘죽지 않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로서의 신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이 이 자연세계나 인간의 사회적 활동, 그리고 다른 나라와의 관계, 전쟁에도 개입하고..인간의 모든 삶에 관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고향이나 가정에서 각기 모시는 토착신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로마인들은 항상 신을 염두해두고 살았습니다. 항상 그 신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에 힘썼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본래 심어주신 '경건..' 종교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을 알만한 것이 이미 인간의 종교심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말입니까 그분이 만든 이 자연 우주 만물과 이 세상을 보고 하나님을 우러러 보라는 그 종교심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종교심이 다른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러러 봐야하는 그 종교적인 마음을 제 멋대로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과 모양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에 대한 설명이 23절에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23절을 함께 성경책으로 읽습니다.
일본이란 나라에 온 갖 잡스러운 신사가 있듯이, 로마에도 정말 다양한 종교적인 행태들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삶의 각 요소의 필요에 맡게, 몇가지만 얘기해보면,
당시 농사를 짓는 사회였으니까,‘곡물의 신’이란 것도 있었습니다. 또 로마처럼 전쟁을 많이 하는 나라는, 전쟁을 관장하는 ‘야누스’란 신을 따로 모셨습니다. 머리 뒤통수를 뒤로 붙여서 눈이 양쪽으로 4개인..그래서 그 신과 평화를 이루면, 전쟁도 승리할 것으로 보고 그 야누스란 신을 숭배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의 특징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것은 본래 그것의 의미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도대로 각자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원함대로 그것을 바꾸어서 숭배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원함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대로 각기 상황에 맞게 숭배하는 것, 그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입니다.
사실 그것이 소위 '역사'라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입니다. 신앙인의 관점에서 본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대단할 것이 없습니다. 일평생 죄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간들의 시행착오의 열매들을 기록에 남겨진 것에 불과합니다.
(또 역사학자가 이런 설교들으면 또 들고 일어날 일인데 아무튼..)
21절에, 우상숭배자들의 태도가 무엇이냐 보면,
그들은 '감사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 생각이 아무런 쓸모없이 되어, 어두움으로 가득차게 되어 아무리 스스로를 지혜있다 말하지만,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우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무례한 말 같지만, 이 세상의 소위 ‘인기’라는 것을 어떤 분이 실랄하게 표현하셨는데, ‘인기란 죄인들의 변덕이다..’ 개인적으로 여기에 동감하는 사람입니다.
티비 메체에 등장하는 아이돌, 연예인, 혹은 어떤 것 죄다 끊임없이 마치 새 상품처럼 등장합니다. 한 사람이 지면 또 다른 사람이 나오고, 세상은 끊임없이 이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형상”을 쏟아 놓습니다.
형상, 즉 이미지로 온통 지배된 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 이왕이면..이뻐야지..물건이든 사람이단..”
온통 그 껍데기 사랑에 가득합니다. (아무튼 교인들 중에 연예인에 빠진 사람처럼 그렇게 개인적으로 상종하기 싫은 사람이 없습니다. 솔직한 말로..다행이 여기는 없는 것 같긴 합니다만..)
신제품, 새로운 먹거리, 그럴듯한 옷, 등등..온통 티브 드라마 영화 광고에 이 물질이 도배되어 있는듯 합니다. 그놈의 광고 수입으로 마치 세상이 돌아가는 듯 보입니다.
오늘날 유튜버들 미쳐 날뛰는것 보십시오. 구독 좋아요..! 좋은 것을 공유하고 나누는 의미는 참 좋은 듯 하나, 사실은 자신을 광고하고 팔아먹는 행위아닙니까..? 자신을 팔아서 돈을 버는 행위..
마치 오늘 하지 않으면, 마치 오늘 구입하지 않으면, 그것에 푹 빠지게 만드는 물질,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집착하는 그 순간 인간은 '우상숭배'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열매들을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성경에서 24절에서 이 우상숭배의 본질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절을 성경책으로 함께 읽습니다. 시작
우상숭배의 본질이 바로 "정욕"이라 정의합니다. ‘마음의 정욕’ 그 원어의 의미는 '악한 갈망', 악한 것을 원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흔히 '죄..'를 다룰 때,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인 차원에서 접근합니다. 거짓말, 도둑질, 살인, 간음, 즉 십계명의 내용을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열매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의 근원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정욕, 즉 악한 갈망..'이 우리 마음에 박혀있다는 것입니다. 그 갈망의 뿌리가 무엇이냐면, 바로 창조주이신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기는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 불경건, 즉 죄의 성격은 반드시 ‘자발성’인 특징이 있습니다.
24절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악한것을 갈망하는 인간의 그 더러운 마음의 상태로 '내버려 두셨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저주입니다. 18절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렇게 그들을 ‘내버려 둠으로써’ 임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13정 9절을 읽어봅시다. (PPT)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이처럼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의 호의를 무시합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합니다. 그것이 인간사입니다. 나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마음 때문에 자신의 정욕에 휘말리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정욕에 대한 자발성에 하나님은 아무런 책임이 없으심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으로 우리 모든 비참은 우리 모두의 자발적인 정욕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이를 원망하고 탓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어쩌면 정말 미련한 것이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책망과 교육이 필요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사의 모든 비참은 우리 인간 모두의 죄악이자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비참에서 근본적인 “건짐”을 받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의’,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의, 올바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저 그 복음을 믿는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 하나님의 의를 믿습니까..? 정말 스스로 자신을 두고 말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소망이 없는 사람이라 인정이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자들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무엇을 믿는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심, 그리고 우리 삶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앞에 베드로전서 1:5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ppt)
말씀 그대로 모든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잘되고, 내 정욕인지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르는 그런 기도가 응답되는 그런 보호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비하신 구원”을 받기 위해서 보호하심을 입는 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곧 허물많은 죄인된 나, 그리고 허물많고 죄로 신음하는 이 세계를 우리 모두가 다시 깨닫길 원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다시 회복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란 사람에 대해 그리고 이 세계를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겸손하게 나의 행위 그 어떤 의를 바라보지 않고, 복음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그 의를 바라보고 믿고 신뢰하는 것,..
그것이 참된 경건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첫 단계, 믿고, 맡기다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하나님의 알만한 것들을 다시 더듬어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비추어 과연 내 안에 어떤 것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거짓된 것으로 바꾸어 가는가..?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점검하며, 참 된 경건을 소유하는 자, 믿고 맡기다의 신앙이 우리에게 먼저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하나님을 우러러 보며 예배하는 자,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