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한 이스라엘의 시험(막 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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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혼문제를 두고 예수님을 시험하는 바리새인에게 결혼 제도를 허락하신 참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먼저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오늘 본문의 배경은 요단강 건너편으로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남자’가 여자를 버리는 것이 합당한 가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나쁜 동기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말씀합니다.
이 당시 유대에는 두개의 율법학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힐렐학파이고, 또 하나는 샴마이 학파였습니다. 특별히 이 두 학파는 이혼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신명기 24: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에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엄격하게 적용했던 샴마이 학파는 이혼조건을 오직 아내가 간음죄를 범한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힐렐학파는 간음외에도 남편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온갖 일들을 이혼조건에 포함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남자들은 마음대로 아내를 버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어본 질문은 바로 이런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찬성하던 반대하던 한쪽 학파와 충돌을 하여 알력을 빚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들은 이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헤롯 안티파스의 적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곳은 헤롯 안티파스가 관할하는 지역입니다. 이 헤롯 안티파스가 누구입니까? 자기 남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사랑에 빠져서 본처와 이혼하고 헤로디아와 재혼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는 자신의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 비판하는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였습니다. 따라서 헤롯 안티파스에게 있어서 이혼 문제는 자기의 신경을 거스르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섣불리 발언하여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하면 헤롯의 재혼을 부당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었습니다. 이미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은 예수님이 세례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생각하여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감시하고 있는 형편이었는데, 이런 덫을 놓음으로 인해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도 세례요한처럼 죽이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 질문을 받아서 이에 대응하는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율법의 이혼규정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입장을 확인한 후 그들의 입장을 반박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신 명기 24:1-4절에 근거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서 아내를 내보내기를 허락했다고 대답합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허락했다”고 말한 것은 이혼을 하나님이 허락한 것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시면 3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어떻게 너희에게 명령했는지”를 물으셨는데, 그들은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했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율법의 자기를 입맛대로 왜곡했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남자는 절대 강자였습니다. 여자들을 자기의 소유처럼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물건처럼 취급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오래 쓰면 지겨워서 바꾸고 싶은 것처럼 이 당시 남자들의 태도가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규정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 입맛대로 왜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와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왜곡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욕망을 구현하려고 하는데, 하나님 말씀이 방해물처럼 생각될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보통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해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한다는 핑계로 말씀을 왜곡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그 사실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글을 통해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 하자 예수님은 같은 모세 오경안에서 좀 더 이른 기록인 창세기 말씀을 인용하여 결혼의 본래 의미를 정당화하십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창조질서의 일부이며, 한몸이 되는 것은 그 본질이기에 사람이 임의로 나눌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이 당시 사람들이 임의로 하나님이 정한 법을 나누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남자가 바라보는 여자에 대한 생각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평등하게 창조하셨는데, 여자가 남자에 비해 열등하다고 생각하니 쉬운 이혼을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6-9절까지 말씀에서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고 말씀합니다. 11-12절도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의 동등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관계가 무너졌습니까?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죄로 인해 그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은 남녀를 차별하고, 이를 통해 서로를 비난하며 적대시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평등한 존재임을 기억하며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우열을 가리기 보다는 남자가 잘 하는 일이 있고, 여자가 잘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서로의 영역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요즘도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여성 우월자들이 득세하며 상대 성에 대해서 비난과 조롱을 퍼붓는 모습을 봅니다. 여자들은 여전히 남자들에게 차별받는다고 주장하고,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역차별을 받는다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다 바보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동등한 존재입니다. 누가 먼저일것도 없고 누가 잘난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같이 동등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살아갈때에 남자분들은 여자분들을 향해서, 여자분들은 남자분들을 향해서 쉽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을 기억하며 동등한 존재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대한 문제 제기로 예수님을 책잡고, 위기가운데로 몰아 넣으려고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보다 한단계 위에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의 신성을 강조하시면서 이혼에 대한 단순한 논리를 깨고 그 자체가 부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