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행복을 누리는 삶 2024 0323 마5:1-12
Notes
Transcript
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가며 /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마태복음 5:1–12 (NKRV)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예화. 누구랑 있으면 행복한가? 같은 드라마를 봐도. 같은 영화를 봐도. 같은 취미를 해도.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행복의 질을 결정한다.
축복이 아니라 행복.
이스라엘에 멘토. 언어유희 잘함.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설교인 팔복은 여덟가지 복. 이 팔복에 대해서는 고유명사가 있다. beatitude. 한글로 번역하자면, 참 행복, 지복, 더할 나위 없는 행복.
be attitude 복을 위해 심령이 가난해져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그 태도가 그 상태가 이미 복이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이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복을 읽을 때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읽으면 이해가 쉽다.
이 팔복은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 땅에서 이미 누리고자 하는 제자들의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축복을 받기 위한 도덕적 윤리적 행동방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주석---
팔복의 형식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요구 조건으로 이해한다. 말하자면, 모든 자질을 보여 주는 사람들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도록 인정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더 넓은 정경의 문맥에서 팔복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팔복은 예수가 선포하고 시작한 하늘나라에 반응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내용이다. 팔복은 “선포와 반응이라는 역동적인 문맥에서” 이해돼야 하며, “미래의 복(구원)은 예수의 권위 있는 말씀을 듣는 자에게 선언되기 때문에 듣는 자는 예수의 부름을 통해 새 사람, 즉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래서 복을 받게 된 사람이 된다”(Guelich 1976: 433; Schweizer, NTS 19 [1973]: 126을 인용함).
주석---
팔복은 하나님 나라 회원 조건문이 아니다. 규칙이 아니다. 오히려 축복의 선언이다. 이미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을 향한 위로와 은혜의 메시지이다.
성경해석학: 성경해석의 일반적 규칙과 각 권의 개별 규칙 1. 규칙에 따른 경기 - 의미와 문학 양식
팔복문의 문법적 형식은 사실상 조건이 아니다. “만약 심령이 가난하면 너희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는다. 문법적 형식은 오히려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5:3과 10절은 모두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로 끝나는데 이것은 복음서 기자가 마태복음 5:3–10에 있는 모든 부분이 같은 기본 주제로 다루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팔복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포된 축복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들은 모두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마 5:10) 사람들이거나 미래에 믿음 때문에 박해받을 사람들일 것이다.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 “의”, 그 “절대적 진리”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받을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는 그 사실만은 외로워지게 된다. 세상 속에서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이 된다. 악한 사탄, 마귀의 전략은 우리가 다르다는, 유별나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그러한 시선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심령은 가난해지고, 애통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기로 다짐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 된다는 것이다. 이땅에서의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오쉐르. 사람이 생각하는 “받는” 복이 아닌,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는, “동행”하는 행복.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행복의 질을 결정한다고 했잖는가. 작은 일을 하더라도 함께 할 때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의 전 인생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나의 인생의 희노애락의 모든 순간 순간에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래서 신앙은 관념적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이 성경 속 행복이 문자로 좋은 글귀로 끝나면 안된다. 체험해야 한다. 내 삶에 실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체험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별의 별 조건들을 맞추고 채우기 위해 우리는 애쓰며 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야단이다. 언제 행복해지려고 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함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조건이 아니라, 축복이 내게 있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4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왜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는가? 그 위로가 무엇이기에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인가? 어떻게 나는 지금 상실, 좌절, 절망 등으로 애통해 하고 있음에도, 복이 있다고 선언하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애통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애통은 내 곁에 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미래이다. 나의 마음이다.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4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데살로니가전서 4:14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장한이 사모님의 찬양. 같이 팔복동산에 올라가 이 찬양을 불렀음. 저는 이곡이 현대 크리스천의 삶 속에서의 실제적인 팔복의 적용판이라고 생각함.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 이것이 행복이라오.”
이 찬양 팔복 동산에서 갈릴리 호수를 바라보며 함께 부르는 날이 오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