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를 통해 믿음의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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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eter 2:10 KRV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방금 읽은 말씀을 보면 전에는 이제는 두번 반복되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전에도있고 이제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1. 구원받기전 과거를 돌아 보면
그럼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어떠했습니까?
베드로 전서에는 전에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긍휼을 얻지 못하였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 보면 구원받기 전에는 이방인이였고, 할례받지 못한 자였고,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였고, 하나님과는 멀었던 자였습니다.
로마서 1:28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그리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도 싫어 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는 어두움에 속했던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귀에 속아서 살았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1:1–2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된 삶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삶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서에 헛되다라는 말이 38번 사용대로 있고 해아래서라는 말은 29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즉 해 아래의 삶은 헛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 아래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땅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우리에게 다 가졌어도 하나님 없는 삶, 하나님 떠난 삶은 아무 것도 아니면 허무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우리를 하나님이 건져 주셨고 이제는 하니님의 백성이요 긍휼을 얻은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계신분들은 정말 하나님이 건져 주셨습니까? 긍훌을 얻은자입니까?
에베소서 2:5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즐기고 살았던 저를 긍휼이 여기서서 구원함을 얻게 해주신것입니다.
그래서 아가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술람미 여인이지만 오직 왕(주님)과 함께(사랑)함으로 행복함 삶을 살았다는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우리의 인생은 아가서이고, 주님안에 거하는 해 위의 삶이고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것이 된것입니다.
2. 구원이후 과거를 돌아 보면
2.1도움을 주시는 하나님
구원받고 어느정도 신앙생활을 우리가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우리가 봉사를 하고 있는거구요..
구원받고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딱 한마디로 도움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시편 94:17 “17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혼이 벌써 적막 중에 처하였으리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과거는 후회만 있지 않습니까? 그때 내가 그런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친구랑 사귀지만 않아다면, 거기에 투자만 하지 않았다면.. 기타 등등 여러가지 후회만 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죽음앞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무엇만 있을까요? 후회만 있을것입니다. 천국을 준비하지 못한 후회 말입니다 .
기름을 준비하지못한 다섯 처녀 처럼말입니다.
마태복음 25:10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 죽음앞에서는 무엇이 남을까요? 나를 여기까지 도와 주셨다는 감사의 마음이 떠오르지 않을까요?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떠오를 것입니다.
사무엘상 7:12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그걸을 기념하기 위해서 돌을 취하여 세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주님이 나를 도와 주셨다는 것을 느낄때마다 돌을 수집해서 세웠다면 얼마난 낳은 돌을 세웠을까요?
신명기서에도 40년간 광야의 길을 걷게하신 이를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움을 주신 하나님을 기념하고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까지 우리에게 에벤에셀 하실까요? 그것은 주님 오실때까지 하실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중에 항상 우리에게 에벤에셀 하실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엘리에셀이라고 지었습니다.
엘리에셀의 뜻은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18:4 “4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까지 죽으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도움을 주실까요? 네 반드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한 고난보다 더 큰 고난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체휼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성질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난 당한자의 아픔도 다 아십니다.
그래서 더욱더 고난당한자가 있느냐 기도할것이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 대해서 다 아시는 분이기에 나에게 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언제나 도우시는 분이라고 히브리서 2:18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도움을 주실까요? 하늘에서 뚝 떨어질까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보혜사 성령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욱더 기도하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이세상 사람에게서 오는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121:2)
그리고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로마서8장2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것은 과거에 우리를 도와 주셨던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십년간 사울을 피해 광야에서 주님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위대한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요셉은 13년간 말도 않되는 억울함속에서 고난과 고통중에 있어서 더욱더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뢰해서 귀하게 쓰셨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도 주님을 의뢰하고 도움을 구하는 삶을 살면서 주님이 나에게 구하시는 사명을 완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위급한 순간에 어디에 전화를 합니까? 불이나면요.. 119에 전화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위급한 순간 도움이 필요할때 주님께 전화 해야 합니다.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가장 적잘한 방법으로 도와 주십니다. 주님의 방법으로요.. 나의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으로 도와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급하고 도움이 필요할때 속히 나를 도와 주소서라는 기도가 필요한것입니다.
시편에 여러곳에 보면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는 구절이 여러곳에 있습니다.
시편 70:1 “1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하는것을 너무나 잘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지 못함으로 누구에게 의지할려고 합니까? 가까운 사람들을 의지하려는 나의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과거를 돌아보면 가까운 사람들을 의지해서 결과가 좋은적이 있던가요? 사람을 믿어서 결과가 좋은적이 있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음을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46:3–4 “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4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방백을 의지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방백은 권세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럼 누굴 의지 해야 합니까? 바로 우리가 잘알듯이 여호와를 의지해야합니다.
시편 118:8–9 “8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9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성경의 인물을 보면 요아스처럼 두가지의 갈림길의 선택의 기로가 놓일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찾겠습니다. 역대하 24:17–21 “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의 말을 듣고 18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19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듣지 아니하니라 20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21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요아스의 부친인 여호야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여호야다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아달랴가 70명의 왕자들을 죽이고 여왕의 자리에 오를때 1살짜리 요아스를 몰래 성전에 숨겨 7년동안 양육한뒤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여호야다의 평가는 16절에 쓰여져 있습니다. 저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 여호야다가 죽으니 요아스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것입니다.
여호야다와 요아스는 적어도 30년은 넘게 같이 지냈던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때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열왕기하 12:2 “2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정직히 행했던것입니다. 여호야다를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죽고 나서 갈림길에서 고민을 하게 되겠죠!
방백들의 말을 들어야 하나? 아니면 여호야다의 뜻을 받들어서 하나님 편을 선택해야 하나? 이 두가지의 갈림길에 있었습니다.
여호야다를 의지하기 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생활했다면 이 갈림길에서 고민도 하지 않았을 텐데..
결국 요아스는 방백들의 말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 선택이 바로 우상숭배.. 하나님을 버린 선택을 하게 된것입니다.
이 것을 보아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의지하면 않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여호야다를 의지 한거죠. 여호야다를 믿고 따를수는 있지만 하지만 더욱더 중요한것은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라는것을 잊으면 않됩니다. 주객이 전도되면 않된다는 겁니다.
주변을 보면 내가 가장 의지 했던 분이 돌아가실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항상 교회가 1번이었던 분들이 신앙이 뒤쳐지는 것을 볼때가 있습니다.
한번 돌아봐야합니다. 우리는 누굴 의지하고 나의 1번이 누구인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역대하 20:20 “20 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찌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너희는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는 말씀처럼 우리를 진정으로 도와주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고 신뢰해야합니다.
2.2 우리를 훈련하신 하나님
우리가 지금까지 온 길을 돌아보면 어떠한 길이 펼쳐집니까? 항상 넘어짐의 길입니까? 아니면 일어서는 길입니까?
아니면 넘어졌다 일어났다 하는 반복되는 길입니까? 우리는 이러한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더욱더 신앙의 진보를 보여야 할것입니다. 신명기서에 보면 독수리로 그리스도인 우리를 훈련하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찾겠습니다.
신명기 32:11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11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흔들어 새끼가 떨어지면 날개를 펴서 새끼를받아 올리듯 하셨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 40년을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나안 땅으로 이끄셨습니다.
이것을 신명기는 독수리가 새끼독수리를 양육하는 것으로 묘사를 하였습니다.
독수리의 둥지는 절벽위에 있습니다. 그곳에 새끼를 키웁니다. 어느정도 자라면 새끼가 계속 보금자리에 있지 못하게 어지럽게 만듭니다. 흔들다고 표현을 하고 있죠!
그래서 보금자리에서 떠나게 합니다. 떠나면 어디입니까? 낭떠러지입니다. 결국은 떨어지겠죠.. 그모습은 독수리는 그 위에서 너풀거리고 있는것입니다. 계속 보고 있는거죠..
영어성경에는 호바링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끼 독수리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을때 거의 부닥칠때 쯤 독수리가 날개로 받아서 다시 올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떨어뜨리고 이것을 반복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 새끼 독수리는 날개짓을 하게되어 하늘의 제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훈련시키는 것을 지금 신명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훈련시키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돌아보면 정말 우리를 이렇게 훈련시키고 계심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어떠한 훈련을 시키고 계십니까?
(신명기32:11)에 나오는 것처럼 제 1단계는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푹신푹신한 깃털 둥지를 버리고 가시나무를 보금자리에 넣어서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라고 하는거죠..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계속 편안한것만 추구하고 있으면 신앙이 성장합니까? 아니면 그자리 그대로 입니까?
우리에게 환란과 역경이 없다면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편안한것을 바라보고 살면 고난받을수가 없죠!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기에 우리를 고난가운데로 넣으십니다.
요셉을 보겠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형들에게 갔습니다. 만약에 거기가 멀다고 때쓰고 가지않았다면 편안한 삶을 추구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요셉이 나오지 않았겠죠.
하나님은 요셉을 저멀리 성경을 보면 헤브론 골짜기에서 세겜까지 보내는 것입니다. 이 거리는 먼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도단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곳까지 갔습니다. 30km를 더 간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옆에 가만히 있으면 고난이 없고 환란이 없었을 것인데
주님의 때가 시작되니 요셉을 훈련하기 시작한것입니다.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했죠.. 어려서 부터 미움시기를 받았지만 아버지 옆에 있어서 버틸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상황이 이제 본격적인 주님의 훈련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을려고 무단히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욥도 시험하기 위해서 훈련하기 위해서 자녀를 치시고, 재산도 날아가고, 자기의 몸도 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때는 잘 섬겼는데.. 어려움이 있을때 보금자리가 가시나무로 가득찰때 어떻게 하는지 볼려고 주님은 더욱더 나를 몰아가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2단계는 신명기 32장에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주님은 우리를 그 역경속에 보내시면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것입니다. 멀리서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요 보호 하기 위해서 더욱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미는 갓 날으려고 애쓰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하여 주변을 떠나지 않고 날아 다닙니다.
새끼는 어미를 보지 못하지만 어미 독수리는 누굴 보고 있습니까? 온통 신경을 새끼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 환란과 역경, 고난속에 우리를 밀어 넣으시지만 항상 주님은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목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시편 32:8 “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처음가본길을 어느 사람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거기에 두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분은 알려주고 그냥 가버리는 사람. 한분은 알려주고 잘가나 못가나 지켜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후자인것입니다. 잘가나 못가나 지켜보고 계시고 잘못가고 있으면 거기 아니라고 알려 주십니다. 우리를 주목하고 훈계하고 계시는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신것입니다.
마가복음 6:48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벳새다로 가라고 하시고 그때부터 주님은 보고 계신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시간입니다. 몇시입니까?
밤사경입니다. 밤사경은 새벽3-6시입니다. 보일까요? 거리도 수라나 떨어져 있습니다. 약 5km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보일까요? 그런데 성경은 보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다 보시고 관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45:15 주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말은 숨어서 우리를 계속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면 어떠할까 좀더 조심하고, 좀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숨어 계시는 분입니다. 보이지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독수리의 새끼는 어미 독수리가 보이지는 않지만 독수리의 어미는 그 위에서 계속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무 감사하지 않습니까?
3단계로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이러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독수리 새끼들이 둥지에서 기어 나오면 보고 있다가 새끼를 얹어 더 높은곳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떨어 뜨려 버립니다.
그리고 새끼들이 땅에 부딪칠 상황이 되면 쏜살같이 내려가서 다시 날개로 받습니다. 그것을 새끼 독수리가 혼자 날수 있을때까지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가끔씩 보면 내가 넘지 못한 일이 있어서 피해가면 또다시 똑같은 일을 주시는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일을 넘을수 있을때까지 주님은 반복적으로 주시는것을 경험을 합니다.
어떻습니까? 형제자매님은 그러한것을 경험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연단과 시련들이 언제까지 올까요? 주님이 오실때까지 그러한 연단과 시련이 올것입니다. 왜냐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연단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한 연단과 시험을 받았습니까?
인정시험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7:2–4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우르에서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까? 하란땅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왜 가지 못했습니까? 아버지가 가기를 거절한것을 보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때는 나아가지 못했다고 방금 읽은 말씀에 적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으니깐 다시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땅으로 가라고요..
우리같으면 가라고 했을때 첫번째는 호기로 갔다고 합시다.. 지금 있는땅 하란도 큰 도시입니다. 그 먼거리 한번도 가지 못한 길을 갈려고 하면 고민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나아갔습니다.
지체된것은 아버지때문에 지체가 되었습니다. 우리여기 앉아 있는 형제 자매님 누구든지 인정시험을 받을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인정을 극복하고 말씀대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도바울은 인정시험을 받지 않았을까요? 사도바울 또한 인정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6 “26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거짓형제의 위협을 받았다고.. 그리고 같이 동역했던 분들과 대립관계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러한 모든것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시험을 받을때마다 아브라함, 사도바울은 주님이 항상 먼저였습니다. 그러니깐 이길수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기근시험이었습니다. 경제적 시험입니다.
창세기 12:10 “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기근문제가 옵니다. 먹을것 입을것 경제적으로 시험들이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말씀대로 순종하여 가나안땅까지 왔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기근이 왠말입니까? 주님이 가라고 한 그땅에 왔는데 주님이 주신것은 바로 연단인것입니다.
기근입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가나안을 올라오게 되었으며 신앙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경제적인 시험이 올수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경제적인 시험이 왔습니다.
고린도후서 11:27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경제적인 시험이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사도바울은 배고푸고 춥고 헐벗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포기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도 넘어 섰습니다. 그 산을 넘어간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순교 당하기 전에 적은 편지가 바로 디모데 전후서입니다.
디모데 전서에 디모데에게 이러한 편지의 글을 남깁니다. 지족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6–8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리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까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경제적인 시험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우리에게 오는 시험은 기다림의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우리가 많이 주어지는 시험 중 하나이지 않습니까?
최초 아브람에게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했을때 언약을 했죠. 큰 민족을 주겠다고 언약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25년만에 이삭이 태어난것입니다.
25년의 기다림 속에서 아브람함은 기다리지 못하고 이스마엘도 출산하게 되었죠.. 하지만 이스마엘이 탄생이후 14년 후에 이삭이 탄생했습니다.
결국은 25년을 기다림속에서 이삭이 탄생한것입니다. 아브람함 100세때였습니다.
이 창세기의 내용을 읽다보면 아브라함은 인내가 없고 경제의 시험도 이기지 못했네.. 그렇게 평가할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답이 로마서 4:19–21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제 완전해 진것입니까?
창세기 17:1 “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99세 완전해 지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 99세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완전해 지니깐 몇세에 이삭이 태어난것입니까?
100세에 이삭이 태어난것입니다.
사실은 연약한 부분도 있고 여러가지 어떤 불신적인 요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걷어 내신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름도 99세에 바꾸어 주시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신앙의 여정의 길에서 터닝포인트가 되는 시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다림속에서 주님이 주신것 아니겠어요!
우리는 기다림속에서 여러가지 일들을 겪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완전하라고 하실때 그 말에 순종하여 완전해질수 있는 신앙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겁니다.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고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의 더욱더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끝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욱더 굳건해 졌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주는 기다림의 시험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도바울은 어디로 가길 원했습니까? 로마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억지로 가려고 노력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기다렸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인내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36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약속을 받기 위해서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약속입니까? 저 천국의 상급일것입니다. 우리의 인내함으로 형제자매님을 건지고 또한 한 영혼을 건진다면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우리는 기다림의 시험, 인내의 시험을 넘어가야 할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다림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도 기다리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있으면 반드시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어 웃음이 된것처럼 우리에게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기다림 속의 끝은 무엇이 기다립니까? 웃음이 기다릴것입니다.
야고보서 5:11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인내하는 자가 복있다 웃음이 있다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기하는 시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완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고 완전해지니 1년만에 이삭이 탄생되는 것을 경험한 뒤로는 성경은 또다른 시험을 주십니다.
어떠한 시험을 주십니까? 그것은 바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이삭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머뭇거리지 않고 즉각 시행했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시험이 포기하는 시험일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아직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것이 많을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8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나의 목숨도 내어 던질수 있겠습니까?
가끔 나에게 물어 봅니다. 나의 목숨을 내어 던질수 있을까? 쉽게 답이 나오지 못함을 느낄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포기할것 또한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 단련하시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엄청난 상급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1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자 된 것같이 너희도 나 사도바울을 본받는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7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시련을 주는 것은 결국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고 주신것이라는것을 마음에 새겨야 할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바라보고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소망도 아주 큰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그러한 소망을 가진 분들은 작은 환란.. 역경.. 찾아와도 이겨낼수 있을것입니다.
제일 중요한것은 2단계 양육 방법에서 지켜 보고 계심을 알고 계신다면 넉넉히 이길수 있을것입니다.
독수리는 독수리 새끼를 절대 땅에 떨어 뜨려서 죽게하는 일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훈련시키십니다. 그러다가 반드시 어려움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십니까? 개입하여서 그 상황을 모면하게 해줍니다.
야곱이 세겜땅에서 머물러서 큰 사건이 일어 났지 않습니까? 레위와 시므온이 동생 디나가 겁간을 당해서 세겜민족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되었고,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창세기 35:1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 상황을 모면해 주지 않습니까?
이런것을 격으면서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벼랑끝으로 몰아가서 주님만 절대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주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여 믿음을 성장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윗의 간증에서 나와 사망 사이는 한걸음 뿐이라는 간증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이겨낸 다윗은 어떠한 간증을 합니까?
시편 139:9–10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바다 끝에가서 거할찌라도 거기서도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붙드신다고 간증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주님이 나를 이렇게 보호하심을 느끼면서 살아야 할것입니다.
이렇게 훈련을 하게되면 결국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훈련의 결과 독수리 새끼는 결국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훈련을 달게 받고 위엣것을 추구하며 주님의 것을 바라보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겠습니다.
(욥기23:10)말씀 읽고 마치겠습니다.
욥기 23:10 “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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