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요 12:12–19)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 viewsNotes
Transcript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요 12:12–19)
<서론>
할렐루야! 오늘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종려주일입니다.
매년 맞이하는 절기이지만, 여전히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참으로 의미 있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본문을 통하여, 주님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후에 이루어질 놀라운 결과들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예루살렘입성 퍼레이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실까요?
<본론>
1. 예수님은 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12–13).
먼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서 왕으로 찬양 받으시는 예수님은 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유월절 엿새 전, 예수님은 예루살렘 동쪽의 작은 베다니에서 몇일 머무시다가, 드디어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자 온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대하며 열광합니다.
그런데 군중들의 환대와 열광에 놀라운 고백이 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3)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를 상징하는 식물로서,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한 이유」는 바로 「승리의 왕」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호산나”는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로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시편 118:26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신 자”를 인용한 것입니다.
13절을 정리하면,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은 우리를 구원할 왕이십니다!’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호칭했고(1:49), 오병이어 기적 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했습니다(6:15).
그러나 그 때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주님이, 지금 본문의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찬양하자, 주님은 기꺼이 그 고백을 받으시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주전 164년 중근동을 다스리던 셀루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4세) 에피파네스가 유대인을 핍박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상을 세우는 만행을 저지르자, 혜성같이 등장한 마카비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성전을 정화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똑같이‘종려나무’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하며 마카비를 왕으로 메시야로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왕이자 메시아로 찬양 받았던 마카비의 왕국은 불과 7년을 못 채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위대한 왕들은 많았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프랑스의 나폴레옹, 마케도냐의 알렉산더, 몽고의 징기즈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온 세상의 왕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더구나 온 인류의 구원자도 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들의 왕국은 짧게는 7년 길게는 20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으신 이유는, 사람들이 이런 현실적인 메시야, 영원하지 못한 세상의 왕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열광하는 군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이제 더 이상 피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시간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엉뚱한 기대로 열광하는 군중들에게, 십자가에 오르셔서 이루셔야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보여주시고 이루시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올려 지셔서, 세상 어떤 왕도 정복하지 못한 죄와 죽음을 정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범죄 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인류 구원을 완성할, 진정한 왕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왕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 이기셨고, 사망에게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이라는 온 인류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이 주님이라고, 구원자라고 부르는 것 말고,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십니까?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 ‘나의 주’로 고백하고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정복한 죄와 사망을 이기고, 왕이신 주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겸손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14-16).
어린 나귀를 타시는 예수님은 겸손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행렬은 매우 특이합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14) 왕이신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보통 행렬에 나선 왕은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준마’를 타야합니다. 말은 왕의 힘과 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상하지요? 예수님은 왜 말이 아닌, 당시에 돈 꽤나 있는 재력가들이 타던 노새도 아닌, 나귀; 오늘날로 말하면 짐차..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셨을까요?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신 이유는 500여 년 전 예언된, 스가랴 9:9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15)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 주민입니다.
주님은 지금, 스가랴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과 나귀 새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용맹스런 전투마나 화려한 마차를 타지 않으시고 왕이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 이유를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야의 겸손함’에서 찾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겸손한 왕은 오셔서, 세상을 섬기고,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그래서 이어지는 요한복음 13:1-17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식사(최후의 만찬)를 하시던 중,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겸손함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요 13:12下)“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이 일을 깨닫지 못했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16)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2:22)에, 성령의 조명을 통해 온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겸손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을 따로 하나 붙인다면, ‘겸손’입니다.
요한은 예수님(로고스)이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고 말하고, 그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1:14)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죄 용서받기 위해서는, 다른 인간이 그 죄 값을 대신 치러야하지만, 모든 인간은 똑같은 죄인이기에, 다른 인간의 죄를 용서할 자격도 권한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께서 사람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하나님이시지만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것도 죄인으로 취급받으며 온갖 고난 수모를 겪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내려가시기까지 순종하셨니다.
이것보다 더 큰 겸손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겸손한 주님의 모습 앞에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 주님은 결코 ‘내가 누군데?’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어린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여 낮아지신 예수님을 따라, 내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겸손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17-18절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으로 인해 예수님을 찬양하는 군중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요한복음 11장은 예수께서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린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의 증언이 많은 무리를 열광케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군중들이 이토록 예수님을 찬양한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메시야가 드디어 이스라엘의 심장부에 오셨고, 이제! 그 표적과 능력으로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리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표적(18)을 일으키신 주님의 사역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시선과 기대에 따라 예수님을 환영하고 찬양하였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처지나 기대에 따라, 모든 것을 그것에 맞춰 마음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 고향 바닷가는 바람이 많이 붑니다. 바람에 날려 온 모래가 사구(모래언덕)를 만들기도 합니다.
밤이 되면 바람이 바다에서 육지로 불기 때문에, 밤에는 바닷가 방풍림 소나무 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가 아주 가까이 들립니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서, 할아버지께서 같은 바람소리를 들으시지만 때때로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뱅기야! 오늘은 솔이 슬프게 우는 구나, 오늘은 솔이 노래를 부르는 구나, 오늘은 솔이 방정맞게 떠드는 구나...
어린 제가 듣기에는 ‘쉬~잉 쉬~윙’ 매일 똑같은 소리인데, 할아버지는 당신의 기분에 따라 솔바람 소리를 읽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예루살렘 군중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그리고 사역을 통해 보이신 표적이 가리키는 고난과 부활은 보지 않고 영광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타고 계신 나귀는 보지 못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 멋진 말을 타고 들어오시는 것 마냥 열광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나귀’는 왕이 평화의 일을 수행할 때 사용했던 짐승입니다(삿 5:10). 반면에 ‘말’은 전쟁의 도구였습니다(출 14:9).
왕이 나귀를 타고 오면 평화를 위해 오는 것이고, 왕이 말을 타고 오면 전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말’이 아닌 ‘나귀’를 타심으로 ‘평화의 왕’으로서 오셨음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슥 9:10)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로 하여금 영원히 평화를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세상은 물질적 어려움이 없으면 평화라고 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물질적 어려움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천상에서나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평화를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움들을, 예수님이 주신 평화의 힘으로 견딜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건강해야 평화가 아니라, 예수가 있어야 진정한 평화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주님이 주시는 구원과 평화를 소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예수님은 왕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승리하셨고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인 우리의 구원 요건을 충족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은 믿는 자로 하여금 영원히 평화를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겸손을 닮고,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과 평화를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