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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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1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1-16절)]
성전과 율법을 거슬렀다고 하여, 스데반이 공회에 잡혀왔습니다. 그 증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제사장은 1절에 스데반에게 “이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봅니다. 스데반은 거짓증언을 한 사람들을 위증죄로 고소하고 억울하다고 표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차분히 변론을 시작합니다.
스데반은 그 변론의 모든 근거가 성경의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변론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는 믿음으로 변론해야 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이 상황에서 스데반이 성경으로 변론하는 것은 더욱 힘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론하는 상대방들이 바로 같은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유대인들에게 성경으로 변론한다면 둘 중 하나겠죠.
강력하게 동의하거나, 강력하게 반대하거나요.
강력하게 반대하는 경우는 오히려 자신들의 유대교 전통에 맞지 않는 성경의 내용으로 변론하면 강력하게 반대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2-4)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스데반이 2절에 말한 ‘여러분 부형들이여’는 공회에 모인 사람들을, 겸손하고 공손하게 부른 호칭입니다. 그는 2~8절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메소보다미아에서 부르신 사건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였는데 그곳이 메소보다미아 즉 4절에 나온 갈대아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두 번에 걸쳐 옮기셨는데, 갈대아 땅에서 하란으로 옮기셨고,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너희 지금 사는 이 땅> 곧 가나안땅으로 옮기셨습니다.
스데반이 아브라함 얘기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성전에만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 지역에서 아브라함에 나타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신 곳을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오직 이스라엘의 성전에만 머물러 계신 분이시라고 믿었고, 이방 나라에서는 절대로 찾아 뵐 수 없는 분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 자체를 우상화하여 섬겼고, 그러한 이유로 스데반이,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성전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자, 그를 신성 모독죄로 체포한 것입니다.
3절에 아브라함은 “네가 내게 보일 땅으로 가라”는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그러나 5절을 보니 하나님은 그에게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지만, 모든 것이 약속으로만 주어졌고, 실제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75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땅을 유업으로 주고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창12:2-4)’는 약속은 참으로 믿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과연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했을까요? 2절 후반 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였다고 합니다. 그가 보았던 <영광의 하나님>은 과연 무엇일까요? ‘영광’으로 쓰인 헬라어 <독사>는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임재’,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속성 즉 본질’을 의미합니다. 그 본질은 히브리서 1:3에서 말하는 ‘영광의 광채, 즉 빛’인 것입니다. 그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 빛은 우리 마음의 근심과 두려움을 떠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빛은 우리의 삶을 인도합니다. 이 빛의 실체는 말씀입니다. 시편 119:105에서 말하길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창12:4에 보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합니다. 말씀의 빛이 아브라함을 사로잡아 그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문제의 파도가 엄습해오거나, 혹 내 경험과 지식으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 있을 지라도, 우리가 말씀을 따르면, 그 말씀이 우리의 길이 되고,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따르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2가지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과 신뢰의 삶>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에는 철저히 <순종> 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는 한없이 <신뢰>해야 합니다. 순종과 신뢰를 삶에서 실현하는 것이 말씀을 따르는 삶인 것입니다. 말씀을 따를 때 그 빛이 나를 사로잡아 믿음의 길을 가게 만듭니다.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8절에 할례의 언약이 나옵니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거룩하게 하시고, 영원히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약속의 증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낳게 하시고, 이후 야곱을 통해 12조상을 낳게 하시며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성취하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할례를 통해 아브라함이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할례를 통해 의로워진다고 여겼고, 할례의 언약 속에 임하신 하나님을 본질로 삼기보단, 할례자체 만을 본질로 여기며, 자신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본질이 아닌 형식과 의식에 집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직분이 있고, 대를 잇는 신앙가정이고, 또 봉사를 한다는 등’ 이런 현상들을 신앙의 척도와 성숙으로 여기는 부분이 있습니다.
좋은 농구화를 신은 선수가 좋은 농구화를 신었다고 해서 농구를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죠.
그런데 어떤 농구 선수가 자신이 좋은 농구화를 샀다고 농구 연습을 하지 않고 농구화만 믿고 있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농구 경기에서 계속해서 패할 것입니다. 농구화를 믿고 있다면 농구 실력은 저절로 줄어들 것이고, 농구 경기에서 패배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입니다.
좋은농구화를 신는다고 실력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실력이 향상되려면,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의 척도는 성숙으로 무르익은 삶입니다. 다시 말하면 언행의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답게 말과 행동을 하기 위해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농구화를 신었다고 해서, 그 자체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성숙을 위해 매일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신앙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성장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성장은 언젠가는 멈춥니다. 그러나 영혼의 성숙은 매일 일어나게 되어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