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나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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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개관
나사렛 (예수님 당시 400명)
예루살렘에서 134킬로, 텔아비브 100킬로정도 티베리아31킬로,
베들레헴까지 도로망으로 200킬로가 넘을 꺼리다. 하루 16킬로 정도느 ㄴ일주일이 넘게 걸릴것
이다. 지금 인구 7만명의 도시
예수님 당시 인구는 150-400명
노쯔림. 나사렛 사람들 - 나사렛을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375미터의 높은 분지
Cf) 유대인들이 매년하는 기도 중에 노쯔림 대적기도문이 있다. 이것은 기독교를 이단이라 말하고 대적하는 기도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제자 나다나엘“나사렛에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으냐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시다.
누가복음 4:16-21
이사야 61장 1-2: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 내어 산 낭떠러지(절벽산)까지 끌고 가서 밀어서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저희 가운데로 지나가셨다(눅4:29) ->만약 절벽에 밀어서 죽지 않으면 돌로 치는 관습이 있었음.
나사렛 수태고지 교회
수태고지교회는 이즈르엘 골짜기 바로 북쪽, 하부 갈릴리 시작 지점인 나사렛에 위치한 교회이다. 나사렛은 해발 347미터에 위치해 있으며 레바논 산맥의 가장 남단 언덕에 자리잡은 스불론 지파의 땅에 속해 있던 땅이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해변길은 지중해 해변길을 통과해 므깃도 골짜기를 지나 나사렛을 우회해서 수 킬로미터 동쪽에 있는 티베리아스까지 연결된다. 그러므로 나사렛은 그 당시 가장 중요한 해변 길과는 조금 떨어진 산동네라고 볼 수 있다. 1세기의 총인구는 480명을 못 넘었을 것이지만, 현대 나사렛의 인구는 7만 6천명이 넘는 도시가 되었다. 현대 나사렛은 유대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에 위치한 나사렛 일리트(Nazareth Illit) 마을이 있고,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로 사는 구 나사렛(Old Nazareth)이 있다. 이곳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 예수님이 약 28년동안 사셨던 요셉의 집, 예수님이 설교하시다가 사로잡힌 회당, 그리고 그 외 서기 1세기 나사렛 사람들의 생활 현장의 모습을 간직한 나사렛 빌리지가 있다. 마리아 수태고지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여겨지는 동굴 위에 지은 교회이다. 교회로 들어가면 좌측편 아래쪽에 동굴을 포함한 마리아의 집이 있으며, 그 안쪽 제단 아래 라틴어로 글이 쓰여있다. “이곳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다”
서기 427년 비잔틴 시대에 교회가 지어지기 전에 회당 교회가 있었고, 파괴된 교회 건물 흔적 위에 12세기 십자군들은 교회를 재건축하였다. 지금 현대의 교회는 이탈리아 건축가 안토니아 바루치가 1951년 설계했고 기오바니 무지오가1969년 완공했다. 서방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가 정혼한 상태에서 자신의 집에 있을 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했다고 해서 교회의 이름에 ‘선포’ 혹은 ‘고지’(annunciation)라는 말이 붙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1)
성요셉교회-요셉동상뒤에 숨어있는 마리아상
유대인들은 남자에게 아내가 없으면 행복해지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도 없고, 선행도 쌓이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당연히 결혼하지 않으면 인간으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지요. 어느 나라든지 결혼할 때 고유한 풍습이 있기 마련입니다. 유대인들은 결혼할 때 신랑이 ‘케투바(Ketubah)’라는 혼인 서약서를 큰 소리로 낭독합니다. 유대 율법에 따라 남편으로서 아내를 지키고 사랑하겠으며, 재산의 대부분은 아내 것이라는 내용의 결혼 서약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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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투바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케투바의 내용 중 특이한 것은 이혼할 경우, 아내에게 줄 위자료까지 명시한다는 점입니다. 혼수를 포함하여 아내가 가져온 재산 및 아내에게 줄 위자료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혼할 때 발표한 혼인서약서는 법적 효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장차 돈을 빌릴 때에도 담보로 제공할 수 있는 효력을 가지고 있다네요.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케투바는 결혼한 여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결혼의 권위를 수호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여성의 재산권과 경제권을 지켜주는 증표가 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어느 사회나 여성의 권리가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쉽게 대하고 내쫓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고요? 만일 남편이 아내와 이혼하거나 아내를 내쫓으려면 결혼서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금액을 아내에게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내의 동의가 없으면 일방적으로 이혼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지요. 유대인에게 결혼은 의미가 깊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독신으로 사는 것은 불행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물론 유대인은 누구나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유대 민족의 존속을 위하여 좋은 교육으로 훌륭한 유대인을 만들려고 노력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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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결혼식 (출처: 미드 Sex and the City)
또한 유대인들이 유독 세계에서 이혼율이 가장 낮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안식일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맞는 안식일을 통하여, 서로에게 정서적 지지와 위로를 하지요. 유대인들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 여깁니다. 탈무드에서도 하늘의 심판대에 올라 받게 될 질문이 “네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아이를 낳는 데 힘썼는가?”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이를 낳는 일이므로 아이를 많이 낳아 기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의무라 여깁니다. 그들은 결혼하여 자녀에게 유대교의 신앙과 가치관을 전하는 일이 신의 뜻이라 생각하여,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합니다. 유대인은 결혼과 동시에 부모 교육센터에 다니고 아이를 낳기 전에 육아법을 익혀 부모가 될 준비를 합니다. 아내가 임신을 하면 부부는 육아 관련 교육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임산부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태교를 시작합니다. 매일 태아에게 솔로몬의 잠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유대인의 태교법입니다. 태교를 하는 동안 저금통에 동전을 모았다가 출산 후 아기의 이름으로 좋은 곳에 쓰도록 기부하는 것도 유대인만의 독특한 문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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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탈무드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유대인들은 다른 신앙이나 자녀교육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는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토라와 탈무드의 종교 계율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유대교의 특성상 가치관이 서로 다르면 맞추어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지요. 유대 민족의 뿌리는 가족에 있으며, 가족의 뿌리는 남편과 아내입니다.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을 세상의 기본이자 으뜸이라 여기므로, 그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유별납니다.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 ‘신의 뜻’이라 믿습니다. 조상 대대로 지켜온 토라와 탈무드에는 일상생활의 지침이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탈무드에 “남편은 아내를 울려서는 안 되며, 하나님은 아내의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세고 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남편들은 아내에게 정서적 배려를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기의 기준에서 바라보지 않고 아내의 속마음을 읽기 위해 애쓰는 것이지요. 아내의 내면적 욕구를 찾아 공감하고 마음을 얻습니다. 유대인들의 이혼율이 세계 최저라는 사실에는 분명 그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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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안식일을 보내는 유대인 가족 (출처: Religion & Ethics NewsWeekly)
탈무드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든지 있을 수 없어 대신 엄마를 보냈다.”라고 말합니다. 엄마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보냈다는 뜻이지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내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나를 믿어주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탈무드에 ‘아내는 남편의 집’이라고 표현합니다. 남자는 아내가 없으면 거주할 곳이 없다는 뜻으로 아내가 없으면 안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요. 유대인 남편들은 아내를 ‘가정’이라 표현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내나 엄마는 가정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남자들은 좋은 아내를 얻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면 토라 두루마리를 팔아서라도 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집안에 편안하고 좋은 아내가 있어야 하며, 좋은 아내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본 내용을 발췌한 아래 책자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들어주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유대인 부모처럼>
- 장화용 지음
마리아는 유대교의 결혼 풍습에 따라 정혼한 상태였다. 유대인들의 결혼은 두 단계로 나뉘어 졌는데, 첫번째 단계는 두 명의 증인 앞에서 ‘케투바’라는 결혼 서약서에 서명 날인을 하고 부부로 인정을 받지만 동침은 하지 않는 단계이다. 두번째 단계는 7일동안의 결혼잔치와 함께 신랑이 마련한 신혼집에서 동거 단계에 들어가는 기간이다. 마리아는 첫번째 단계, 즉 정혼(betrothal) 단계였고, 신랑이 신혼집을 준비하고 다시 찾아오기까지 기다리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이 기간은 짧게는 1년, 길게는 야곱처럼 최장 7년이 걸리기도 했다. 첫번째 단계에서 신부는 자신의 처녀성을 보존해야 했고, 신랑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경우 결혼은 파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사는 마리아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처녀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잉태될 것이라고 말했다 (눅1:35). 마리아가 임신하자, 남편 요셉은 파혼하려고 했으나 결국 주의 사자의 지시에 따라 결혼 두번째 단계에 신부 마리아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 주위의 나사렛 동네 사람들은 마리아와 요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했을까?
결혼 두번째 단계에 들어가기도 전에 배가 불러오는 마리아를 보고 요셉은 주의 사자의 계시대로 마리아를 데려왔지만 (마 1:20), 동네 사람들은 이해를 못했을 수도 있다. 실제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고향 나사렛에서 설교하시는데 동네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막 6:3).
아버지를 알 수 없는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회당에서 설교하시다가 동네사람들에 의해 낭떠러지로 끌려가 죽임을 당할 뻔 하셨다(눅 4:29). 어떻게 보면 그는 나사렛에서 자라나는 동안 출생의 근본이 의심스러운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평생에 따라다닌 이름은 ‘나사렛 예수’ 였다. 바로 나다나엘이 말한 ‘선한 것이 날수 없는 동네’ 나사렛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 보다 더 위대한 자가 있었던가? 그 모든 것을 이룬 배경은 하잘것없는 나사렛이란 마을로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나의 배경이 남보다 못하고, 나의 부모의 재산과 학식이 다른 잘나가는 부모의 것보다 못하기 때문에 현재의 나는 이럴 수밖에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의 출생이 이상해서 이 세상은 절망이라고 말하지 말라. 당신을 사랑하셔서 모든 고난을 홀로 감당하신 이는 바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가나 혼인잔치 교회
나다니엘 교회
예수께서 첫 번째 이적을 행하신 곳으로 더 잘 알려진 갈릴리 지방의 가나는 매우 작은 마을이다. 나사렛에서 북동쪽 8Km에 위치한 이곳 가나 마을에 혼인 잔치가 있어 초대되신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결혼식 장면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주고 있는 즛하여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예수는 왜 그의 첫 기적으로 결혼식장에서 포도주를 만든 것일까? 예수는 과연"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눅 7:34)이었는가? 예수의 이 기적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은 예수를 태초부터 계신 이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는 실현된 것으로 이해하는 신학을 가지고 예수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의 가나 혼인 잔치를 천상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계19:6 ~ 10)의 선험적인 사거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무화과 나무 아래서의 만남으로부터 예수의 제자가 된 나다 엘은 바로 이 마을 출신이다. 현재 가톨릭의 프랜시스컨 교회와 희랍 정교회가 각각 하나씩 서 있어서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을 기념하고 있다.
예수가 최초로 기적을 행한 곳이다. 예수가 어머니,제자들과 함께 가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갔는데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돌항아리 6개의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여 함께 마셨고 그 이후로 제자들이 그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는 기록이 신약성서 《요한 복음》 2장 1~11절에 나온다. 이 기적은, 예수가 광야에서 떡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하고도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였다는오병이어의 기적과 함께최후의 만찬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14세기 무렵부터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가나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나사렛남동쪽 8㎢ 떨어진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그곳에는 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가 한군데씩 있어 예수의 기적을 기리고 있다.
이적과 표적
가나혼인잔치 교회에 있는 돌항아리-유대인과 학자들은 그 항아리를 손을 닦는데 쓰는 항아리라고 추측한다. 한마디로 꾸정물이다. 그래서 이것을 사람들의 편견을 바꾸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오병이어교회
누가복음 9:6-17
성경에 ‘타브가/탑가’라는 지명은 없다(그리스어 이름인 헵타페곤[Heptapegon]은 ‘일곱 개의 샘’이라는 뜻이다). 타브가라는 말은 ‘일곱개의 샘들’이라는 아랍말인데,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 지역을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스어로 ‘헵타 페곤’ ἑπτά πηγῶν 이라고 부른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바실리카 양식
5세기 모자이크 - 오리, 펠리칸, 연꽃 - 이집트에서 모티브
교회 안쪽에 제단 밑에 있는 작은 돌예수님께서 이곳에 서셔서 축도를 하시고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신 전승이 잇는 돌이다.
이스라엘에 사는 저나 성지순례에 오시는 순례객들이 무심코 밟으며 지나가는 이 교회의 바닥 모자이크들이 480CE의 것이라고 하면 다들 꽤나 놀라겠지요? 정말로 이 교회의 바닥 모자이크는 부분적으로 수리되고 있기는 하지만, 480CE에 교회가 확장되면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모자이크는 광주리에 빵이 담겨있고 그 옆에 물고기가 있는 모자이크입니다. 기독교 서점이나 선물 용품점에서 한번쯤은 보셨을 그 모자이크 말입니다.
->의미 설명은 차에서, 확실한 유래는 없다.(퀴즈로 내서 맞추기, 소문도 있지만 나를 감동시키는 분한테)
n History
이 큰 교회는 5세기에 지어졌으며, 614년에 아랍 침입에 의해 무너진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오병이어 기적 교회를 찾아 순례한 기록은 이미 380CE부터 있었으니 이 자리에 얼마나 오랜동안 예수님의 기적을 기념하는 교회가 서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카톨릭 교인들은 좀 들었을 법한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이 교회의 터를 1888년에 사들였습니다.
1932년에 독일 고고학자들이 이곳에서 기둥과 모자이크등을 발견하게 된다. 이후1981년에 완전한 발굴이 이루어졋으며, German Benedictine 에 의해서 지금의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지금 이곳은 German Association 의 재산으로 되어 있다.
n Inside the Church
교회 안쪽으로는 회중석과 두개의 복도가 있고 제단 아래에는 석회석 돌과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가 있음.
이 모자이크는 5세기의 것으로 오리, 펠리칸 등이 새겨져 있고 특히 연꽃과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이 꽃은 이스라엘에서 자라는 꽃이 아니며, 학자들은 이 모자이크를 새긴 사람이 로마 시대에 인기있던 나일강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5세기의 비잔틴 교회의 흔적들은 교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잇는데, 교회를 들어가기 전의 문지방과 마당에 잇는 현무암의 바닥, 그리고 교회 내부의 곳곳에 유리로 되어 잇는 아래쪽이 바로 비잔틴 시대의 교회 모습들입니다.
보고 차에서 설명하는 부분
->모자이크 의미 설명은 차에서, 확실한 유래는 없다.(퀴즈로 내서 맞추기, 소문도 있지만 나를 감동시키는 분한테)
현재 갈릴리에는 4개의 항구가 있어서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용도와 고기잡이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사람들이 방파제를 쌓아서 만든 15개의 인공항구와 1개 이상의 자연항구가 있었습니다. 약 16개의 항구 주변에는 사람들이 마을 이루고 살기 마련인데, 학자들마다 추정하는 인구의 수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갈릴리 호수 주변에는 약 12,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는군요. 예수님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일반적인 직업은 어부였으니, 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어업에 종사하거나, 어럽과 관련된 산업에 종사하였다고 추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같습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먹이신 남자의 수가 5,000명입니다. 남자의 수만 세어졌으니 여자와 아이들이 몇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자의 수만하거나, 그보다 좀 적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대충 한 8,000명 정도가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갈릴리 사람이라고 짐작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약 12,000명의 사람들이 갈릴리 호수 주변에 살았고, 저녁이 되어서 식사를 할 즈음이 이 기적의 배경이었으니 밥하러 간 여인들, 일몰전에 고기들이 모일 때에 일하러 간 어부들, 정말 배고파서 참을 수 없어 집에 돌아간 사람들까지 셈하여서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좀 과장을 하자면 갈릴리 호수 주변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고보면, 예수님의 기적이 사람들을 모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일어난 기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그러고보면 모이는 곳에 기적이 있게 마련인가 봅니다.->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던져, 안될것 같은 상황에도임하시는 하나님, 나는 그래서 전승에 의해서 이 곳이 그곳이라고 생각한다.3/2가 봤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벳새다 들녘이라고 하는데 왜 이 지역인가? 물론 뱃세다 들녙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분을 현대적 개념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뱃게다 서쪽이 이 타브가 지역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전승과 모자이크의 발견은 과거의 초대교회에서의 연속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여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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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교회
차에서 교회를 가면서 설명
팔복-beatitude 극진한 복(아름다움->나다움->복 나의 뇌피셜)
세상과는 다른/ 주식을 사면 상한가를 칠 것이다. 노우 가난하면, 칼빈과 웨슬리는 이에 관한 설교를 하는데 구원의 여정 단계로 연관짓고 있음.
(가서 시간이 있으면 성경을 돌아가면서 팔복을 읽으면서 진해)
팔복교회는 마태복음 5,6,7장의 배경이 되는 장소로서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사역을 하셨던 가버나움과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언덕에 자리
아마도 걸어서 약 2-30분 정도면 가버나움에서 지금의 팔복교회정도까지 올수 있을 거리
이곳은 가버나움과 아주 가까운 곳이어서 예수님께서 자주 걸으셧을 장소입니다. 정확한 산상수훈의 장소는 확실치 않지만, 이 장소가 그래서 1600년 정도 산상수훈의 자리로 알려져 왔음
이 교회(교회 이름이 Mount of Beatitudes 입니다.) Beatitude는 아름다움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교회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매우 젊은 교회예요. 무슨 말인고 하니, 그 세워진 연대가 아주 최근이라는 겁니다. 대부분 이스라엘의 많은 교회들은 이미 3세기 내지는 4세기에 교회가 세워지고, 아무리 늦어도 5세기에는 그 중흥기를 맞이하는데, 이 교회만큼은 1939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의 생김생김도 매우 현대식이지요. 이스라엘의 어느 교회에나 있는 초대교회의 모자이크 바닥도 역시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교회가 덜 중요하거나, 별 의미가 없는 곳은 절대로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 교회를 “팔복교회”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예수님께서 보통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때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겁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만 하더라도 남자 어른만 5,000명을 먹이셨으니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만 한 공공의 장소가 어디 흔했겠냐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한번에 5,000명 정도 모이려면 문화예술회관이니, 무슨 학교의 강당이니 하는 곳을 빌려서 모이는데 그런 시설이 예수님 당시에 어디 흔했겠습니까? 게다가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팔복의 말씀을 전하실 때에 산에 오르셔서 말씀을 전했는데, 산에 몇 백 명, 몇 천 명이 모여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만한 장소가 있었겠냐는 거지요. 나무가 빽빽했으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 듬직한 산에 오르면 그런 질문이 싸~악 사라집니다. 키 작은 풀들로 뒤덮인 이 산에서 2,000년도에 교황이 10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설교를 했었거든요. 10만 명이요. 신약학자들이 말하기를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수를 약 1만 2천명 내외로 보고 있으니, 이 산은 그 사람들을 다 포용하고도 넉넉했겠지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 장소로 불러들일 수 있는 유일한 산이 이곳이기에 사람들이 이곳을 팔복산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하지만 궁금증은 가시질 않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만 한 장소가 있다손 치더라도, 예수님께서 기차 화통을 삶아 드시지 않은 이상, 그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한 번에 말씀을 전하셨을 수 있었는가 하는 거지요?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바람을 이용해서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갈릴리 호수의 특성상 아침이면 바람이 호수에서 산 쪽으로 불어 오르고, 늦은 오후가 되면 반대로 그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서 산에서 호수 쪽으로 불어 내립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오르셔서 말씀을 전하셨다면, 바로 늦은 오후 즈음 살살 바람의 방향이 산에서 호수로 불어 내리기 시작할 즈음 잔잔한 미풍을 등지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을 거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목소리가 바람을 따라 사람들의 귀로 흘러들어가는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너무나 감격적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예수님이 영화에서처럼 목소리를 깔고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고 말씀하셨을 것 같지는 않아요. 좀 더 우렁차고 열정적인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외쳤을 것 같아요. 무언가가 속에서 꿈틀대는 듯한 강한 목소리 말이지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보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정말 엉뚱한 것 같아요. 생각해보세요.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가난한 자”, “애통한 자”, “핍박 받는 자” 같은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겁니다. 제 기준으로는 이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더군다나 복 받을 것 같지도 않거든요. 그런데 복이 있다는 겁니다. 허! 참~
베드로 수위권 교회
요한복음 21:5-17
수위권은 우두머리 '수'(首),
자리 '위'(位)로서, 교회의 수장이 되는 권리를 뜻한다.
베드로가 수위권을 처음 받은 곳
포인트: 화목제(베드로 통곡교회와 연관,3), 데자뷔(처음 만남과 똑같은), 새로운 비전
베드로 수위권 교회는 프란세스칸이 관리하는 교회이며,타브가에 위치를 하고 있고,프란세스칸에 소속된 교회이다.이곳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도직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
현제의 건물은1933년에 지어졌으며,이전 비잔틴 시대 교회 위에 지어진 교회입니다. 9세기에는 이곳을“숫불의 장소”라고 불렀다고 합니다.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숫불을 피운 것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또한808년에는“12왕좌”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해변가에12개의 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이 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파괴가 되지 않고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다가1263년에 파괴가 되었다고 합니다.이곳은 바오로6세가1964년 방문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 장소가 정말 그 장소인가? 물론 성경의 지리적 근거는 없다. 전승과 모자이크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가버나움이 당시 큰 항구였고, 베드로도 가버나움에 살았으니, 가버나움 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위치도 가버나움과 걸어서 10분안에 갈 만큼 멀지않는 거리이다.
nWhat to see
Mensa Christi
이 교회는 제단이 있는 곳에“Mensa Christi”라는 글자가 잇는 큰 돌이 있습니다.이 멘사 크리스티의뜻은“Table of Christ”라고 합니다.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반을 준비해주신 장소였다는 전승을 따라 놓여진 돌입니다.
Holy steps
교회의 호수쪽에는 돌을 깍아서 만든 계단이 있다.비잔틴 시대 순례자Egeria는 이 계단이 바로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장소라고 적고 있다.하지만 이 계단은2, 3세기의 계단이다.이 계단 아래에는 하트 모양의6개 기둥이 잇는데 그 기둥은“12왕좌”로 알려져잇는 기둥이다.
가버나움
가버나움(먼저되는것, 나훔 ; 위로 뜻 가버나움은 당시 갈릴리와 그의 마을에서 예수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지역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
또한 사도 베드로, 야고보, 안드레, 요한과 세리 마태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가버나움은 기원전 3천년 초기 청동기 시대에 처음으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마을은 약 60두남(6헥타르)에 인구는 약 1,500명이었습니다
세금 모으는 도시 (마17:24)
유한 도시, 백부장이 한 사람이 회당을 지어줌(눅7:1-7)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2번째 고향
• 야이로의 딸을 고침(마 9:18~26, 막 5:21~43, 눅 8:41~56)
•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심(마가복음 1:21~28)
• 베드로의 장모를 고침(마 8:14~15)
중풍병자를 고치심(마 9:2~8, 막 2:1~12, 눅 5:17~20)
• 백부장의 하인을 고침(마 8:5~13, 눅 7:1~10)
•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침(막 5:21~43)
•손이 마비된 사람도 가버나움에서 고침(막 3:1-6).
- 마 8: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 막 1: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 눅 4: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
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성경 말씀에는 분명히 베드로의 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오히려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의 집이라
고 하고 있다. 이 집을 베드로의 장모의 집이라고 하는 성경적 근거는 없어 보인다.
- 요 1: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베드로집터위에 8각형 비잔틴 교회 5세기
안길 (새리마태)
문등병친구들, 베드로 장인, 회장당 야이로의 딸, 혈루병 걸린 여인. 주님을 만나기 위해 두려움(장애물, 불신앙)을 넘어서야 합니다.(27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주님께 나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으로만 끝내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이, 그의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로 바꾸시길 원합니다.
Synagogue
이 회당은 윌슨에 의해서 밝혀졌으며 아래는 현무암의 검정색 돌 위쪽으로는 석회암의 하얀색 돌로 이루어져 잇다. 안쪽벽은 플라스터가 칠해져 있고 위쪽으로는 여자들을 위한 2층 공간이 있었을것으로 추정한다. 지금의 하얀색으로 만들어진 회당은 4,5세기에 만들어 졌을것으로 추정이 되며, 아래쪽의 검정색 돌이 아마도 예수님 시대 당시의 회당의 터일거라고 loffreda 는 주장한다.
회당은 아직도 그릭어와 아람어의 비문이 있는데 그 비문에는 이 건물을 짓는데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적혀져 있다. 이 회당은 누가복음에 따르면, 백부장이 지은것으로 나온다(눅 7:1-10). 지금의 하얀색은 비잔틴 시대이며, 아래는 예수님 시대때의 회당이다. 회당은 이전에 회당이 있었던 장소에 지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 당시 백부장이 지었던 회당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잇다.
회당안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예수님께서 곧 회당에..“ 예수님께서도 이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쫒으심 막 1장 21절
회당의 2층구조 옆방은 여행객들을 위한 방 기거할수 있는 곳, 또는 토라를 가르치는 방이었다.
베드로의 집
이곳은 에제리아가 384년에 발견을 했다. 그때에도 지금과 같은 벽이 세워져 있었다고 함. 1921년에 한번 깨끗이 정리되고 난 다음에 다시 1968년에 카보라는 사람에 의해서 다시 잘 정리 하게 됨. 그때 이 위에 있는 건물도 지어지게 됨. 위쪽의 건물은 이 곳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어졌으며, 이곳은 그 시대에 여러 번 고쳐졌는데 1세기에는 작은 가정교회었다가 그후 4세기 정도에 더욱 확장되고, 약 450년 경에 팔각형의 교회가 세워졌다고 함. 그때 동쪽에 세례터까지 만들어지게 됨. 여러 개의 방이 잇는데 그 중 한 방만 회반죽으로 포장이 된곳이 있고 적어도 6번 이상 칠해졌다고 합니다. 역시 벽도 회반죽으로 칠해져 있었고 그래서 이곳이 바로 예배를 드리던 장소라고 여겨짐.
가버나움의 인슐라 집 구조
베드로의 집터와 회당의 사이에 많은 개인집들이 있는데, 검정새 발살토로 지어졌으며, 역시 바닥도 검정색 바살토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한 집단으로 집을 지어서 마당은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일반적으로 마당쪽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고 한다. 이 집에는 시스턴이 보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 지역에서 물을 구하는 것은 쉽기 때문이며 이곳에서 발견된 물건중에는 낚시 바늘도 있었다고 함. 그래서 이들은 이 지역에서 같이 예인망 같은 것으로 고기를 잡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함. 이 집을 보면, 성경의 드라크마의 비유(마 15:8)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잇다. 집 전체가 어두워서 동전을 잃으면 샅샅이 찾아야 하는 구조이다.
이스라엘에서 1,500년의 역사가 넘은 많은 교회들을 다니면서 제가 느낀 것은 “이것이 정말 교회다!”입니다. 옛 교회의 모양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교회가 있는가하면, 새로 건축된 그야말로 새 교회들도 여럿 있습니다. 2년 전 갈릴리 호수의 고라신 부근에 새롭게 프란체스칸 수도회에서 멋진 현대식 수양관과 성당을 건축했는데, 지날 때마다 드는 생각은 자연친화적이지 못하고, 갈릴리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망치는 옥의 티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요? 너무나 현대식이어서 그렇습니다. 360도 돌아친 회색의 정방형 대리석 건물은 화려한 스테인 글라스만 없다면, 창고로 쓰기에 딱 좋다 싶어요.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버나움에 새로 건축한 교회는, 똑같이 대리석으로 지어 올렸지만, 그 격이 다른 교회입니다.
가버나움의 교회는 아마도 기원후 1세기, 그러니까 예수님 돌아가신 후부터 4세기까지 가정교회의 형태로 가버나움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예배드렸던 장소였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기독교를 상징하는 수많은 십자가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추측이 더욱 힘을 얻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록에서는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예배를 드렸다고 하니, 이곳을 베드로 장모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기독교 전통상으로는 옳다고 불 수 있습니다. 이 가정교회는 5세기에는 팔각형 모양의 교회로 번듯한 모양을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교회가 그러하듯이 이 교회도 이슬람의 통치 아래에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현대식의 교회가 새로 건축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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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새로 건축한 이 교회가 가히 예술입니다! 이 교회는 옛 가버나움 마을의 회당 옆에 있는데, 교회가 공중에 떠 있습니다. 교회가 무슨 자기 부양술이라도 가졌겠습니까? 그것은, 역시 건축 설계자의 옛 것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5세기에 세워진 교회의 그 크기 그대로 교회를 다시 그 자리에 새로 건축하려니, 옛 교회의 터를 파헤쳐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이렇게 중요한 기독교의 문화유산을 “신축”이라는 이름으로 없애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팔각형의 교회의 여덟 모퉁이에 기둥을 세워서 그 기둥 위에 교회를 얹어 놓는 기발한 방법으로 옛 교회의 터 위에 교회를 붕 띄워 놓은 것이지요. 옛 교회를 그대로 살리고, 그 자리에서 오늘의 교인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터를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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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로 공중에 띄운 교회에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면, 그 한가운데가 텅 비어 있는데, 그 공간의 바닥을 유리로 만들어서, 유리 아래로 옛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5세기의 교회가 베드로 장모의 집(베드로집) 위에 세워진지라, 옛 교회의 터 아래에는 또다시 베드로 장모 집터의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처음으로 그 집터를 보았을 때에 얼마나 가슴이 뭉클했는지 모릅니다.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가 아직도 누워있는 것 같고, 지금 막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는 것 같더라고요. 우리 신앙의 아버지들은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을 것이고,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 주었을 거예요. 바로 이 자리에서 말이지요. 그리고 그 자리에 지금 제가 서 있는 겁니다!
가버나움의 교회가 이런 독특한 건축술로 옛 교회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듯이, 다른 교회들 역시 그 역사가 깊은 교회의 구석구석에는 옛 교회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옛 교회의 무너지지 않은 벽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새 교회의 벽을 쌓아 올려서 건축한 교회들, 옛 교회의 바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교회들, 교회의 한쪽에 옛 교회의 바닥을 그대로 남겨 놓고 쉼터로 만들어 놓은 교회들. 옛 것이 보존되어 있기에 오늘의 교회가 더 아름다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바로 이스라엘의 교회에 꼭 맞는 우리의 한자성어입니다. 그러고 보면, 갈릴리의 산비탈의 중턱에 “현대”라는 포장지에 쌓여 있는 그 프란체스칸 수도회의 돌덩이는 바로 이 옛 것이 없어서 그렇게 추해 보였나 봅니다.
형과 제가 다녔던 교회는 완전히 새로 이전을 했기 때문에 옛 교회의 터를 이용할 수 없었다손 치더라도, 오늘의 교회가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선교사님의 이름이 새겨졌던 기념관 팻말이나, 기념이 될 돌들이나, 나무들을 옮겨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우리 엄마와 같은 어른들은 그 기념 팻말이나, 돌들, 그리고 나무들을 보면서, 지금 지어진 현대식 교회가 줄 수 없는 옛 교회의 냄새를 맡아서 좋고, 옛 교회를 모르는 아이들은 그 팻말을 보면서 그 돌 위에서, 그리고 나무 아래에서 옛 교회에서 신앙을 키워왔던 어른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테니, 그야 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것 아니겠습니까? ‘보릿고개를 모르는 세대’니, ‘6.25 전쟁을 모르던 세대’니, 요즈음의 젊은 것(?)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많은 어른들이 계시지만, 그들 역시, 새로운 세대에게 옛 것을 제대로 물려주지 못했으니, 많은 부분 어른들의 책임 아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교회들이 교회를 건축할 때는 교회건축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와 “전통”, 그리고 “사람”과 “주변환경(자연)”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루살렘
감람산
전망대
15세기부터 무덤이 생김
예루살렘 성지 보이는 곳에 있는 유대인들의 무덤.
(에스겔서에서 예언한 마지막 때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의 군대가 될 것임을 믿는 유대 종교인들의 무덤이 대부분이란다.)
무슬림인들의 무덤도 있는데, 유대인들이 무덤을 지나가게 되면 부정하다고 믿고 있기에 일부러 길가에다 묘지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성전 동쪽에는 문이 하나 있었는데, 이 문이 크고 화려했기에 이 문을 미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이것은 외경에 예수님께서 황금문이라고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시대에 810년대에 모슬림에 의해서 폐쇄되고, 십자군이 다시 개방 그리고 다시 오스만때 폐쇄되었다. 유대인은 이 문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 문을 통해서 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생각, 그리고 무술림은 이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문을 막고 앞에 무술림 묘지를 조성.
눈물교회
정문 무덤터
: 가족묘와 개인묘, 죽은 사람 시체를 놓아두고 1년후에 뼈만 동굴에 집어 놓는 형태,
이때부터는 그런 부활 사상,기원후 1세기 고대 유대인의 무덤이 나왔다.
7세기 당시의 교회터와 모자이크가 남아있다.
예수님 눈물을 형상으로 지은 눈물 교회 전경, 누가복음 19:41-44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자신을 열렬하게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눈물흘리심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우신 것이 3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나사로의 무덤 앞
에서 우셨고,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일 먼저 우신 것은 베다니의 나사로 무덤 앞에서였다(요 11:35).- 다크뤼오
성전을 보시고 우셨다(눅19:41) - 클라이오
겟세마네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히 5:7)
본문의 ‘울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클라이오(klaiō)’인데, 이 단어는 ‘큰 소리로 울다, 통곡하다’의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어 ‘클라이오’(울다)는 ‘다크뤼오’(눈물짓다)보다 비통한 울음입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은 줄 알
고 사람들이 집 밖에서 울고 있을 때(막 5:3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고 울었을 때(눅 19:41), 예수님
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 예수님 말씀이 기억나 울었을 때(마 26:75), 클라이오로
표현했습니다.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눅 6:21)에서도 클라이오를 썼습니다.
겟세마네 교회
겟(누르다)세멘(올리브 기름) 즉 올리브 기름을 누르는 곳이다. 올리브 나무 가운데 트렁크가 죽어도 가지가 나온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영생하는 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교회의 안쪽으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기도한 장소로 여겨지는 넓은 돌이 있다.
In the Bible
마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26: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마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History
현재의 교회 건물은 예전 비잔틴 시대 (4세기) 의 기초 위에 세워졌는데 그 건물은 746년에 지진에 의해서 무너졌다가 12세기 십자군들에 의해서 작은 예배당이 세워지고 1919-24년 지금의 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지금의 교회는 12개의 다른 나라에서 돈을 후원해줘서 지어진 교회로 그래서 별칭이 ‘만국교회’가 되었다.
n What to See
지붕은 여러 개의 돔 형태로 지어졌으며, 안쪽에는 두꺼운 기둥들이 있고 바닥에는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가 있다. 이 건물로 ‘눈물교회’와 마찬가지로 Antonio Barluzzi 에 의해서 지어졌으며, 특징적인 것은 교회 앞쪽에 예수님의 모자이크가 있으며 그 의미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여주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안쪽에는 교회를 후원한 많은 나라들의 상징들이 있으며, 12개의 돔이 있고 그 돔은 6개의 기둥으로 받쳐져 있다. 바실리카 안쪽의 3개의 복도 형태는 제단쪽에 안쪽으로 들어간 둥근 니체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그곳에는 겟세마네의 사건을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였다고 믿어지는 큰 돌 바로 앞에 위치를 하고 있다.
이 교회는 프란세스칸에 의해서 운영이 되고 있다. 하지만 바깥쪽 정원의 제단들은 Anglican 공동체가 ‘성 금요일’에 사용을 한다.
Quick Facts
Site Information
Names:Church of All Nations; Basilica of the Agony; Basilica of the Agony of the Lord
Location:Jerusalem, Israel
Faith:Christianity
Denomination:Catholic
Order:Franciscan
Categories:Biblical Sites;
Architecture:Neo-Byzantine
Date:1919-24
Architect:Antonio Barluzzi
Features:Footsteps of Jesus
Status:active
Visitor Information
Coordinates:
31.779246° N, 35.239624° E (View on Google maps)
Phone:
972 2628 3264
Services:
Sundays: 6.30am (Italian); 11am (English); 4pm (Latin & Italian)
Weekdays: 6.30am (Italian); 4pm (Latin & Italian)
->군대에서 교회랑 부대랑 가까웠다. 각자의기도제목 놓고 기도하거나 사진찍을 시간 부여
주기도문 교회
주기도문 교회는 라틴어로 ‘Pater Noster’ 이며 그 뜻은 ‘Our Father’ 라는 뜻으로 ‘ the Church of the Pater Noster’ 라고 불린다. 이 교회는 예루살렘 감람산에있으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친 곳이라고 한다. 이 교회는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서 4세기 당시의 동굴 위에 건물을 지었으며, 건물 자체에는 약 130개의 언어로 주기도문이 쓰여져 있다.
In the Bible
눅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눅11: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눅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History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셨는지 대한 정보가 거의 존제하지 않는다. Acts of John 에 따르면 감람산에 한 동굴이 잇는데 그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장소와 관계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장소에 대해서는 없다.
유세비우스(260-340)는 기록하기를 콘스탄틴이 감람산에 있는 한 동굴 위에 교회를 지었으며, 그것이 승천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다른 두개는 성묘교회와 탄생교회를 지음). 이 교회는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St. Helen” 여사가 지시아래 지어졌으며 그 기록은 333년 Bordeaux 순례에도 나타난다. 384년의 Egeria 는 이 교회를 Eleona = of olives 로 처음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승천한 장소가 Chapel of the Ascension 으로 옮겨지면서 이 동굴은 에수님께서 선과 악을 가르치신 (마24:1-26:2)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이 교회도 614년의 페르시아 침공에 의해 무너지는 고통을 겪었으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는 기억이 이 장소와 남게 되었는데 이후로는 ‘선과 악’을 가르치신 장소가 아니라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장소로 내용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바뀌게 된 근거는 눅 10:38-11:4 / 막 11:12-25 절의 잘 어우러짐에 근거를 두고 잇다.
십자군 시대에는 이 장소가 특별히 ‘주기도문’ 과 관련된 장소가 되었으며, 1106년에 이 무너진 교회 위에 작은 예배당을 짓고 그 다음 1152년에 덴마크 교황에 의해서 교회가 재건되었고, 그는 그의 집사와 함께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12세기의 순례객들은 이 교회에 헬라어, 히브리어로 주기도문이 새겨진 대리석 장식판을 보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교회는 1187년 손상을 입었으며, 1345년에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1851년에 4세기 교회의 남겨진 돌들은 여호사밧 골짜기의 유대인들 무덤의 돌로 팔리게 된다. 이후 Princesses de la Tour d’Auvergne 가 이 지역의 땅을 사서 1868년 지금의 건물을 짓고 1872년 카르멜라이트 ‘Carmelite’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비잔틴 시대의 동굴이 부분적으로 발굴이 되었고, 1915년부터 비잔틴 시대 교회 재건을 시작했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What to See
4세기 비잔틴 시대의 교회가 부분적으로 발굴되어, 예전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고 반절쯤 재건된 건물은 원래 크기와 거의 동일하다고 한다. 이 건물의 아래쪽에는 동굴이 있는데 1910년에 발굴을 하면서 부분적으로 붕괴되었다고 한다. 이 동굴 안에서는 고대시대 채석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고 1세기 당시의 무덤도 부분적으로 있다.
이 동굴의 남쪽 문쪽에는 모자이크로 된 부분이 있는데 세례를 주던 장소라고 한다. 19세기부터 세계 각국의 ‘주기도문’ 타일이 보내져서 이 교회 벽을 장식하고 있으며 Prncesse de la Tour d’Auverge 의 무덤은 교회 잎구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Quick Facts
Site Information
Names:
Church of the Pater Noster; Church of the Paternoster; Convent of the Pater Noster; Eleona
Location:Jerusalem, Israel
Faith:Christianity
Features:Footsteps of Jesus
Visitor Information
Coordinates:31.778225° N, 35.244806° E (View on Google Maps)
Public transport:Arab Bus 37; Mount of Olives Bus 75
Cf) 1868년에 프랑스 바씨의 아우렐리아 공주가 그 땅을 사서 프랑스에 헌납하였고, 1875년 조그마한 기념 성전과 가르멜 수녀원을 지어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
주님의기도기념성전에서 순례자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빠떼르의 회랑’이라고 부르는 수녀원의 회랑 안에 걸려 있는 각국의 언어로 된 주님의 기도문 판들이다. 현재 약 80여 개국의 언어로 쓰여 있다.
->주기도문 하는 시간 주기
승천당
승천당은 크리스찬과 무슬림들에게 거룩한 장소로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장소로 믿어지는 곳입니다. 교회의 모양은 둥근 모양으로 생겼으며 아치형 지붕이 있고 안쪽에 작은 돌이 있는데 그 돌에 예수님의 발자국이 찍혔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In the Bible
눅24: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눅24: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행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행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1: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History
384년 Egeria 의 방문과 함께 현재의 위치가 승천 기념 장소가 되엇는데 이전에는 이 근처의 동굴안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약 390년경 경견한 로마 여인 ‘Poimenia’ 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 이 건물은 614년 페르시아 침공으로 인해 무너지고 Modestus 에 의해 보수를 하게 된다.
680년 Arculf 는 이 건물을 ‘둥근 건물에 지붕이 없다,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세개의 주랑이 있다. 8개의 램프가 저녁을 밝게 밝히었고 건물 안쪽에는 그리스도의 발자국이 있다. 그 발자국에는 많은 먼지가 쌓여 있는데 순례객들은 이 먼지를 조금씩 가져갈 수 있었다’ 라고 적고 있다.
9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 교회는 3명의 성직자와 장로들에 의해서 관리가 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십자군이 와서 이 건물을 재건하였는데 그때 지금의 모습의 지붕이 없는 8각형의 건물이 올려졌다고 한다 (1150년), 그리고 밖으로는 요새를 만들었다고 한다.
1198년 십자군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Salah al-Din 은 이 교회를 자기의 친구 두명에게 주었으며, 그들은 이 건물에 돔과 안쪽에 아랍사람들의 기도하는 Mihrab 을 만들었다. 이 교회는 이슬람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승천의 장소로 인식이 되었는데 코란에는 이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후 이 건물은 아랍사람들의 모스크로서 300년 동안 시간이 흐른다. 그 후 15세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건물이 되었고 1620년 경에 옆쪽의 모스크가 생기게 되었다.
What to See
안쪽으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에 교회건물로 이어지는 포장된 길이 있다. 그리고 그 포장된 길 위쪽에는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아랍 친구가 나와서 예루살렘 파노라마와 여러가지 목걸이, 포스트 카드 등 물건들을 팔며, 또한 그 아랍 친구가 입장료도 받는 친구이다. 이 친구가 받는 입장료는 요르단의 무슬림 공동체로 들어간다고 한다.
건물 안쪽은 남쪽으로 향한 Mihrab 가 있으며 중간 정도에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발자국 모습이라 전해지는 돌이 안쪽에 있다. 밖의 건물 벽들에는 많은 고리들이 달려 있는데 이것은 승천 절기를 지킬 때 사용하는 텐트를 치기 위한 것으로 각 정교회마다 장소가 정해져 있다고 한다.
Quick Facts
Name Chapel of the Ascension; Church of the Ascension; Mosque of the Ascension
Location : Jerusalem, Israel
Faiths: Original/Primary: Christianity Current/Secondary: Islam
Categories: Biblical Sites; Shrines
Architecture:Romanesque
Date:First church built 390; current chapel built 1150; dome and drum added 1200; mosque and minaret built 1620
Features:Footsteps of Jesus
Status:active
Visitor Information
Address:al-Tur Village, Mount of Olives, Jerusalem
Coordinates:31.7789° N, 35.245117° E (view on Google Maps)
Public transport:Arab Bus 37; Mount of Olives Bus 75
->2가지 약속, 성령과 다시오심
우리는 정말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고있는가?
기드론 골짜기.
예루살렘에 중요한 골짜기이며 가장 크고 많은 사건들이 있었던곳. 이곳은 이곳 시민들의 삶, 경제, 그리고 길과 여러 의식들을 치러졌던 곳이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쪽의 소렉 골짜기부터 시작을 한다. 서쪽으로는 소렉 골짜기, 동쪽으로는 기드론 골짜기이다. 두 골짜기 다 길로 이용이되었으며, 서쪽으로는 해변길을 이었으며 동쪽으로는 랍바 암몬과 왕의 대로로 이어주는 골짜기들이었다. (슥 14:8)
14: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아마도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생수 = Living water” 는 기드론의 기혼샘을 소렉 골짜기의 Naftoah (lifta)를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나뉜 골짜기는 그 높이가 약 820미터 정도 되는, ‘Ammunition hill’로부터 시작하게 되는데. . 이 부분은 평지와 같고 넓은 지역이다 (in Givat-hatahmoshet = Ammunition hill)
그 평지에서 북쪽으로는 벧엘과 나블러스, 남쪽으로는 벧들레헴과 헤브론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 중간에는 cheesemongers’ valley 가 있으며, 이 세 골짜기는 실로암과 엔로겔 사이에서 서로 만나게된다. 여기의 높이가 약 600 미터이다. 그리고 이제 기드론 골짜기는 동쪽으로 흘러 쿰란까지 흐르게 된다.
골짜기의 이름들
1, 불의 골짜기
이 골짜기는 유대광야와 근접해있어서 그 열기가 매우 뜨겁다 그래서 아랍어로는 “Wadi Nar” = “valley of Fire” 라고 불려졌다.
이 골짜기는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려졌는데 유대전승에는 bet-Miqlah “곡식을 불에 말리는 곳” 즉 곡식을 경작하던곳으로, 아랍어로는 와디 조지, “valley of simon the just” 이 지역은 위쪽으로 시몬의 문덤까지 이어진다.
2, 마리아의 골짜기
그리고 남쪽으로 이어지면서 와디 Sitt Mirian (예수의 어머니)라고 하는데 크리스찬 전통에 마리아가 이 골짜기에 묻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3, 겟세마네 골짜기
그 다음은 valley of gethsemane 이며 예수의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사자문에서 황금문까지
4, 여호사밧의 골짜기
황금문 이후에는 여호사밧의 골짜기 (요엘 3:2, 12) – 이곳에서 민족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 예언한곳이며 이곳에 압살롬의 무덤과 스가랴의 무덤이 있다.
또한 요엘 3:14 에서는 심판의 골짜기라고 이야기 하는데 히브리어로 חרוץ 이 뜻은 강력한 행동을 나타낼때 쓰인다.
욜3:2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 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욜3:12 민족들은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
욜3:14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5, 기드론 골짜기=불의 골짜기
그 다음은 실로아흐 골짜기로 기혼샘을 보통 실로완 이라고 불렀기 때문 그리고 가장 아래쪽이 기드론 골짜기로 불의 골짜기라고 하는 곳이다. 이곳은 힌놈 골짜기와, Cheesemonger의 골짜기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며 스가랴는 산들의 골짜기라고 기드론 골짜기를 불렀다(슥 14:5)
슥14:5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모리군을 패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군에게 승리를 주던 그 날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데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이렇게 외쳤다. '태양아, 기브온(나비 사무엘, 예루살렘 북서쪽 7킬로) 위에 머물러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예루살렘과 이어짐)에 머물러라!' 그러자 이스라엘 군이 그들의 원수를 다 쳐부술 때까지 해와 달은 각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야살의 책에는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 거의 24시간 동안 그대로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 사람이 기도함으로 여호와께서 해와 달을 멈추신 이와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는데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기 때문이었다. (여호수아10:12~14)
[출처] 여호수아의 해를 멈춘 사건|작성자 loveu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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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산
마가의
다락방
Last Supper Room (마가의 다락방)
Last Supper Room ( 또는 ‘마가의 다락방’) 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최후의 만찬을 하신 것을 기념하는 ‘다락방’ 으로 2층에 있는 공간입니다. 그 위치는 시온산 다윗왕의 가묘 위쪽 2층 공간입니다.
In the Bible
막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막14: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막14: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막14: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Authenticity(신뢰성)
이 최후의 만찬 장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성경에서도 많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현제의 그 위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건물은 12세기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위치는 그 원래 위치의 가까이 있거나 아니면 그 위에 세워진 장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건물의 바닥에는 비잔틴과 로마 시대의 포장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최소 주후 2세기 정도 까지는 dating 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장소는 에피파네스 (Epiphanius of Salamis) 가 130년에 언급한 시온산에 존제 하였다는 ‘little church of God’ 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2세기 당시에는 많은 크리스찬들이 어려움과 핍박을 받는 시기였기 때문에 새로운 거룩한 장소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130년에 존제 하였다는 ‘little church of God’ 은 그 이전부터 중요한 장소로서 지켜지던 곳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시기에 이 장소는 많은 크리스찬들이 지내는 장소였으며 아마도 부자 크리스찬이 자신의 집을 예배를 드릴 수 잇는 장소로 허락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집 근처 또는 그 집 자체가 그런 사건과 연관이 있었던 곳이었음을 반증하여 주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History
시온산 교회는 핍박이 끝나는 시기인 주후4세기에 재건이 되었는데 그 위치는 ‘the Upper Church of the Apostles’ 이라고 알려진 장소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명칭은 ‘최후의 만찬’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성령을 받은 장소’와 연결이 되며 그 장소 역시 다락방 ‘Upper room’ 으로 언급이 되고 있는 곳이다 (행 1:13; 2:1)
5세기에 이 교회는 ‘Zion, Mother of all the Churches,’ 로 언급이 되고 이 시기에 이 장소를 ‘최후의 만찬’ 장소와도 동일시 하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오순절 사건과, 최후의 만찬 둘 다 ‘다락방’에서 이루어졌다는 것 때문에 나온 결론 같다.
이 비잔틴 교회는 614년에 페르시안 침입에 의해서 한번 무너지고 이후 965년에도 한번 더 무너졌다고 한다. 이후 십자군들은 이 장소를 1099년 7월 도시를 향한 마지막 습격 전에 이루어진 고행의 행진의 장소로 선택하였다. 즉 지금 순례객들이 방문하는 이 최후 만찬 장소는 12세기에 십자군들이 Church of the St. Mary of Zion’ 의 한 부속 건물로 지어놓은 장소인 것이다.
이 교회는 예루살렘을 영화롭게 한 교회들 중 한 곳이었다, 하지만 십자군 시대가 끝이 나면서 한번 더 무너지게 된다. 13세기 정도까지 이 건물은 기둥과 단순한 구조로 남아 있다가 14세기부터 1552년 까지 프란세스칸에 의해서 재건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이 방은 1524년 오토만의 모스크로 바뀌게 된다.
What to See
이 다락방은 시온산의 주차장에서 서쪽 골목을 따라가면 사인이 나오는데 그 사인을 따라 2층에 올라가면 그 다락방이 나온다. 이 다락방은 비어잇는 4각형 구조의 방으로 기둥과 아치형 천장이 있다. 그 기둥들은 대부분 12세기의 것이며, 14세기의 그림은 문의 오른쪽 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방은 모스크의 흔적들도 가지고 있는데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과 아랍 글씨를 볼 수 있고 아랍 사람들의 Mihrab 도 있다.
방의 남서쪽의 계단은 다윗의 가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데 지금은 닫혀서 내려갈 수 없고 대신 바깥의 계단을 따라 가면 된다. 그 계단에 입구 쪽에 있는 대리석 장식의 기둥에는 펠리칸이 부모의 가슴을 쪼아 파는 모습이 형상화 되어 있는데 이것은 크리스찬 상징적 조각으로 희생과 자비를 나타낸다. 바깥 쪽으로 나가면 천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잇는데 그곳에서는 감람산과 기드론 골짜기, 날씨가 좋을 때에는 사해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Quick Facts
Site Information
Names:Last Supper Room; Room of the Last Supper; Hall of the Last Supper; Upper Room; Coenaculum; Cenacle
Location:Jerusalem, Israel
Faith:Christianity
Denomination:Multidenominational
Category:Biblical Sites
Date:12th century
Features:Footsteps of Jesus
Status:active
Visitor Information
Coordinates:
31.771594° N, 35.229077° E (View on Google Maps)
Public transport:Bus: 1, 2, 38
다윗 왕의 가묘
다윗 왕의 가묘 (The Tomb of David)
행 2:26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다윗왕의 가묘는 시온산에서 가장 거룩하게 여기는 장소이다. 이 장소는 크리스찬, 무슬림, 유대인까지 시대를 거듭하며 늘 점유 분쟁이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대인들의 장소이다.
오랫동안 이곳이 다윗과 관련된 장소이기는 하지만 사실 다윗이 묻힌 장소인지에 대해서는 아닐수도 있다. 성경은 다윗이 다윗성에 묻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다윗성은 시온산에서 바로 남쪽으로 보이는 아래쪽 산등성이 있다.
비잔틴 시대에 David 와 James (Jewish and Christian founders of Jerusalem) 가 시온산 교회에서 제의적 축제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두사람 모두 이곳에 묻혔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다윗의 무덤은 이 장소로 동일시 되었으며, 야고보(james)의 무덤은 아르메니안 성당에 위치하고 있다.
History
이 room 은 아마도 1세기 당시의 회당 또는 초기 기독교의 교회였을지 모른다. 다윗의 무덤은 11세기에 이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를 하게 된다. 그 후 십자군은 12세기에 이 장소에 교회를 세우게 되고, 그들이 세운 교회 ‘st. mary of Zion’ 교회의 아래쪽이 ‘다윗의 무덤’ 이 되게 된다. 그리고 이후 1335년 프란세스칸이 이곳을 거룩한 장소로 지정하면서 수도원을 짓게 된다.
1524년 오토만의 슐레이만 대제는 이 장소를 차지하고, ‘이교도의 손에 이 거룩한 장소가 남아 잇는 것은 적절하지도, 의롭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발에 의해 신성한 장소가 더럽혀졌다.” 라고 언급하였다. 이것이 아마도 이 무덤과 관련된 이야기 다윗이 많은 보물과 함께 묻혔다는 전설의 동기가 된듯 하다(Antiquities 16:179-82)
무슬림 지배아래 다윗무덤의 모든 둥근 천장들이 만들어지고 Al-nabi-Da’ud(the prophet David) 라고 불렸으며, 모스크로 이용되기 위해 접근을 금하였다.
1948년 유대인들이 이 장소를 모슬림으로부터 수복하였으며,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손에 남아 있다.
What to See
남서쪽의 입구로 들어가면 안쪽의 넓은 공간으로 이어지는데, 이곳은 마가의 다락방(the Last Supper room)의 아래쪽이다. 안쪽에는 사각형의 방이 있고 위쪽 천장은 둥근 아치형으로 되어 있다. 그 방은 두 공간으로 나뉘어 여자가 들어가는 곳과 남자가 들어가는 곳이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다. 방 안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약 1400년대에 만들어진 많은 타일들이 입구와 안쪽을 장식하고 있다.
다윗의 기념비는 굉장히 크고 검정색 천으로 덮혀있고 히브리어 자수가 놓여잇다. 이것은 아마도 16세기 정도의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리고 그 기념비 너머로는 아치형태로 둥글게 만들어진 벽이 잇는데 이것은 아마도 비잔틴 시대 교회의 일부분인 것 같다. 이 부분은 불이 탄 흔적이 잇는데, 614년 페르시아 침입때나 아니면 965년에 무슬림 침공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많은 순례객들이 수년간 이곳에 작은 촛불을 놓기도 하였다.
Quick Facts
Site Information
Names:Tomb of David
Location:Mount Zion, Jerusalem
Type of site:Jewish site
Hours:Sat.-Thurs. 8-5, Fri. 8-1
Visitor Information
Rules:Men should cover their heads
Public transport:1, 2, 38
질문?그럼 다른 왕들의 무덤은 어디인가? 아직 못 찾았다. 시온산 근처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다윗의 위상? 통일왕국시대의 첫 왕이라는 위상 이스라엘 국기? 다윗의 위상이 나와 있는 적절한 예
베드로 통곡교회 (Church of Saint Peter in Gallicantu)
베드로 통곡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로서 시온산 동쪽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을 기념하는 교회로 가야바의 집터로 추정된다.
비잔틴 시대의 순례자 보르데오는 “실로암에서 시온산으로 올라가다보면 가야바의 집과 만나게 된다” 라고 적고 있다.
이 교회의 라틴어 이름은 "갈리칸투" (Gallicantu) 이며 그 뜻은 "닭의 울음 소리" 이며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였던 성경의 내용을 근거로 한다. (막 14:30)
"네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번 울리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역사
1889년 이 동굴이 발견 되었을 때 그 모습은 작은 구멍들이 벽과 기둥에 뚫려 있었고 다른 동굴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모습은 감옥과 같은 곳으로 예수님도 사도 베드로와 요한도 이곳에 갇혔을 것으로 추정한다. (행 4:1-3; 5:17-18; 5:40)
비잔틴 시대의 교회는 “베드로의 회개”를 기념해 457년 교회가 세워졌지만 1010년 아랍 사람들에 의해서 무너지게 된다.
이후 십자군에 의해 1102년에 재건되었고 "칼리칸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하지만 십자군 시대가 끝나면서 이 교회도 무너지게 되었고 1889년 발굴이 되고 1934년 이 교회는 세워지게 되었다.
지하실 (Lower church and Crypts)
교회 아래쪽으로는 많은 동굴과 저장실, 물 저장소, 정결탕들이 있다. 이런 장소들은 대 제사장 집에서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행 5:18)
기둥과 벽에 난 구멍들은 분명 죄인들을 묶어두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장소 위쪽에 구멍이 보인다.
예수님께서 갖히셨던 장소 Sacred pit
교회 가운데에서 보이는 동굴은 비잔틴 시대에 예배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예수님 시대 당시에는 정결탕으로 사용되었던 곳을 감옥으로 바꾸기 위하여 약 3미터 정도를 더 판것으로 보인다.
전승으로는 이곳이 예수님께서 갇히셨던 곳이라고 전해진다.예수님은 산헤드린에 가기전에 가야바의 집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동굴에 갖히셨다고 한다.
이곳에는 많은 십자가들, 그리고 기도하는 모습의 그림자가 새겨져 있기도하다. 이런 흔적들은 이곳이 기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갖히셨다고 전해지는 장소, 지금은 작은 서대와 함께 얘배를 드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오르셨던 계단 Holy Stairs
교회의 북쪽으로는 기드론 골짜기에서 이어지는 계단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 시대 당시부터 사용되던 계단이었다. 시온산에서 기드론 골짜기로 내려갈 수 있는 유일한 계단이었으며, 예수님께서도 이 계단을 이용하여 겟세마네로 가셨을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요한복음 5장)
예수님이 두번째 유월절에 방문하십니다.
안식일
베데스다 연못은 주전 8세기 구약시대
주전 200년경 옛 못 아래로 다른 못이 만들어져 남북으로 2개의 못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연못의 길이가 150 미터, 폭이 50 미터, 그리고 깊이가 13-15 미터 정도의 크기였다
온전케된다. 예배드린다.
온전케 된다는 것은 예배한다는 것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베데스다 연못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요한복음 5:2)
베데스다 (בית חסד 베이트 헤쎄드) 의 히브리어 뜻은
"베이트" = 집 "헤쎄드" = 은혜 즉 "은혜의 집" 이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또한 연못이라고 하였다.
이 곳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던 물 저장소 였다. 예루살렘은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 유일하게 있는 물의 근원이 "기혼샘"이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약 3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조그마한 기혼샘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을 모두 만족시켜주지 못하였다.
이 연못의 물은 예루살렘에서 약 20키로 떨어진 헤브론이라는 곳에서 물을 끌어와 저장해 놓은 저수지와 같은 곳이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은 윗못과 아랫못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윗못은 북쪽 아랫못은 남쪽에 위치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 아랫못 즉 남쪽의 베데스다 연못의 북쪽부분만 발굴이 되어 잇으며 그 마저도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의 건물들만이 남아있다.
비잔틴 시대의 교회터와 아래쪽으로 예수님 시대 당시의 베데스다 연못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비아 돌로로사 개관
십자가의 길은 라틴어로 "비아 돌로로사"라고 불린다.
비아 돌로로사는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이며 총 14처소로 되어 있다. 비아 돌로로사는 사자문 안쪽 500미터 지점 부터 시작하여 무덤교회까지 이어져 있다.
본디오 빌라도 법정 추정 장소
- 하드리안 황제의 개선문옆에 에케호도 요한복음19:5 - 보라 이 사람이로다
1지점
선교지점
마 27:20-26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 돌을 깐 뜰 (lithostrotos)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져 심문을 당하셨다 (요 19:2,5) 심문을 당한 장소는 헬라어로 lithostrotos (=paved floor) 라고 불린다.
요 19: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 (lithostrotos) (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이 돌을 깐 뜰은 1, 2 처소 맞은편 아랍 초등학교 (Omarlyeh) 안에 있다. 하지만 일반인으로서 쉽게 들어가지는 못한다.
십자가의 행렬이 진행되는 금요일 오후에 개방이 되어 초등학교에서 부터 행렬이 시작된다. 성지 순례 오시는 분들은 일반적으로 프란시스칸 소속의 "1처소 채찍질 교회"와 "2처소 선고교회"를 방문하게 된다.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은 장소입니다.
- 선고 1 지점 빌라도법정 (The First Station) 빌라도의 법정(현재는 아랍학교가 있음) 안토니오 요새의 남쪽 부분
으로 성전 뜰에 붙은 자리로 예수께서 총독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셨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요한복음
19:416)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처형하도록 선고한 후에, 자기는 죄가 없다고 손을 씻었던 그릇이라고 전
해지 는 돌그릇이 있고, 그 마당은 네모나게 깎은 돌들을 세워 박아서 포장을 하였는데, 바로 그곳이 예수께서 재판
받기 위해 서 계셨던 장소이다.
제2지점
채찍,십자가를 받으신 장소
제2지점 : 채찍교회가 있습니다.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마태복음27장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
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채찍질 교회"(The Flagellation)는 천주교 소속의 성경학교 교정에 있다. 주후 1839년에 지어졌고, 1929년에 십
자군 시대 건물 모양으로 개조되었다. 이 교회의 천정에는 가시관이 아름답게 모자이크 되어 있다. 제단 주변의 3 면은 색유리로 만들어져 있는데 바라바가 놓임을 받고 좋아하는 장면과 예수님이 채찍질을 당하는 장면과 빌라도 가 손을 씻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선고교회" (The Church of Ecce Homo)는 1868년에 봉헌된 교회로 현재는 시온 수녀원(Convent of the Sisters of Sion) 소속 건물이다. 안토니오 요새의 한 부분이었으며 교회 제단에 있는
아취는 주후 2세기에 로마 사람이 지은 개선문의 한 부분이다. 빌라도가 군중에게 "보라 이 사람이로다(에코호모)" 라고 채찍질을 당한 예수를 내 보였다는 곳(요19:5)이다. "왕의 놀이터"(The King's Play) 라고 불리우는 곳은, 로마 군인이 모여서 쉬고 놀던 곳이다. 지금도 그 돌바닥에는 놀이에 필요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로마군병이 "유대인
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마27:27-31) 라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예수님을 조롱하던 곳 이다.
3지점
1번째 쓰러진 장소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예수님께서는 전승에 총 3번 넘어지셨다고 한다. 그 처소는 3처소, 7처소, 9처소이다. 그 중 첫번째 넘어지신 장소 3처소는 2처소에서 약 5분 정도를 걸어가면 나오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이전에는 Turkish 목욕탕이었다고 한다. Armenian catholic 이 이곳을 1856년에 샀다고 함.
이 교회 정문에는 예수님께서 넘어지신 장면을 묘사한 조각이 있으며, 안쪽으로 쓰러지신 예수님을 위해 기도하는 천사들 그리고 입구 안쪽 바로 위쪽으로는 천사들과 함께 십자군의 유럽 사람들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의 무리가 그려져 있다.
교회 바로 앞 길에는 하수도 공사때 발견된 제2성전 시대의 포장 돌판을 볼수있다 십자가를 지고 쓰러진 예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작은 예배처소는 1948년에 순례자들 에 의해서 세워진 기도실이다.
교회 밖의 예수님 시대의 카르도를 이루고 있던 돌들. 실제 예수님 당시의 지대는 지금보다 3미터 정도 아래에 있다고 한다 이 돌은 그 아래에서 올려서 지금의 레벨에 맞춘것.ì
4지점
마리아
만난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The Fourth Station) 3 지점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이다. 길가의 좁은 문 위에서 예수님과 마리아가 만나는 장면이 부각되어 있다.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만나신 곳이라고 전해 지는 곳
이다. 처음 이곳에 교회가 선 것은 주후 7세기경 인데, 현재 있는 교회는 1881년에 지어진 것이다. 3, 4, 5 지점은 예루살렘 성을 남북으로 통과하는 치즈 골짜기에 속하는 곳으로, 십자가의 길 14 지점 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 위치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와 만났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 전승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입구에는 예수님이 어머니를 만나는 반신상 조각이 있습니다.
1881년에 Armenian 교회는 our lady of the spasm 교회를 세웠고, 교회 지하당에는 모자이크로 한 켤레의 신발 모양이 있는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의 아들 예수와 눈빛을 마주친 장소라고 합니다.
5지점
구레네 시몬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마 27:32
4 지점에서 남쪽으로 10m 정도 가다가, 서쪽으로 꺾이면서, 치즈 골짜기를 벗어나, 골고다를 향해 언덕길이 시작
되는 곳이다.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게 했던 곳(마27:32)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주후 1895년 천주교에 의해 지어졌다.
예수님의 손자국이 있는 돌(안쪽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음)
6 지점: 베로니카 여인의 만난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 5 지점에서 골고다를 향한 언덕으로 약 3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수녀원이다. 이 곳은 열두해 혈루증을 앓다가 예수님의 옷깃에 손을 대고 나은 여자(막 5:25-34)라고 전해지는 베로니카가, 십자가를 지고 가며 피와 땀을 흘리 는 예수님의 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 드린 곳이라고 전해진다. 비잔틴 시대에는 코스마스 수녀원이 있었고, 지금
있는 수녀원은 1895년에 지어진 것이다.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외경 “Acts of Pilate”에 등장을 한다. 성경에는 베로니카 여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하지만 학자들은 혈루병 고침받은 여인으로 생각을 한다(눅 8:43-48).
베로니카 여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중에 예수의 얼굴의 땀과 피를 자신의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는데 그 손수건에 예수의 얼굴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손수건은 1297년까지 베드로 대성당에 있었고, 1885년 교황 Leo 13세 에 의해 인가 되었다. 카톨릭에서는 7월 12일을 베로니카를 기리는 날로 지키고 있다.
지금의 건물은 6세기 정도의 건물이었던 St. Cosmas 를 Greek 카톨릭이 1883년에 사게 되고 1895년 베로니카 교회를 짓게 되었고 1953년 리모델링을 했다고 한다.
7지점
2번째 쓰러진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6 지점에서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남북으로 이어지는 길과 만나게 되는데,
그 삼거리의 서쪽 건물이 제 7 지점으로, 문 위에 표가 되어 있다. 이곳은 예수께서 골고다를 향해 가다가 두번째 쓰러진 곳으로, 지금 있는 건물은 1875년 천주교에서 구입하여 학교(School of the Arts and Crafts)로 사용하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이곳에 고대 문이 있었는데 그 문의 이름은 “Gate of the trial” 이었다고 한다. 이 문은 고소당한 죄인이 성밖으로 나갈때 그 죄인의 재판 결과가 문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8지점
우는 여인들에게 말한 장소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제 7 지점의 바로 서쪽에 있는 희랍정교회다. 이 지점의 표는 라틴 십자가에 희랍말(NIKA)이 기록된 돌판이다. 검
게 그을리고 더렵혀져 있어서 주의 깊게 찾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이곳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뒤를 따르며 슬
피 울던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나를 위해 울지 말고 ,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말씀하신 곳
이라고 전해진다
8처소 : 우는 여인들에게 말한 장소
왼쪽벽에 하나의 둥근 돌이 박혀있고 그곳에 그릭어로
Nike-le xo nika,
“jesus will always triumph”
라는 뜻의 글이 쓰여 있다.
9지점
3번째로 쓰러진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이 지점은 예수님 무덤교회의 지붕 위에 있는데, 골도다 정상과는 매우 가까운 거리다. 이곳에는 애굽 정교회인 콥 틱교회가 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쓰러진 자리다. 이 교회 지하로 큰 지하 물 저장고가 있다. 이 콥트 교회는 원래 십자군 시대의 식당이었다고 한다.
콥트는 이집트와 북동 아프리카 및 중동에 기반을 둔 정교회로 지금은 에디오피안 수도승들이 있다.
10 지점
예수님의 옷을
벗기신 장소
제10지점 :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요 19:23
말씀에 따르면 나체셨다는 겁니다.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성문 입구에서 돌 침상을 바라보며 오른쪽 옆으로 돌아서면, 계단이 있고 , 몇개의 계단을 오르면, 그곳이 골고다 정상이다.
11 지점
십자가에 못 박으신 장소
11지점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장소이며,
예전의 골고다 언덕은 이제 계단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성묘교회를 들어서서 우측의 계단을 오르게 된다.
여기에는 2개의 예배당이 있다. 하나는 그리스 정교회 소유이고 다른 하나는 라틴교회 소유이다.
예배당 벽에 있는 모자이크에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아브라함과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묘사되어있다.
12 지점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
제 12처소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막 15:27)
12처소는 그리스 정교회 소유이다. 제단 아래쪽으로 구멍이 뚫려있어 손을 넣어 골고다 돌을 만져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양쪽 옆으로는 두 강도가 못 박혔던 곳이다.
골고다의 돌을 자세히 보면 제단 오른편에 균열되어 깨진 돌을 볼 수 있다. 이 균열은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생긴 "돌이 터진(갈라진)" 돌을 볼 수 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 27:51)
이 균열은 골고다 언덕 밑에 있는 아담 예배당까지 이어져 있다.
13지점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 13지점
(요 19:39-40).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자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종부성사의 돌 (예수님의 시신이 놓인 돌판)
라틴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이 돌판위에 예수님의 시체를 올려 놓고 장사지내기 위해서 종부성사(임종때 기름을 바르는 예식)를 받으셨다
또한 그리스 정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예수님을 내려 이곳에 올려 놓았다.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목상이 있다. 이 마리아 상은 포루투칼의 마리아 1세가 1778년에 기증한 것인데, 이 작품은 16-17세기 형이고, 리스본에서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한다. 이 제단 밑에 있는 골고다 언덕의 자연석을 볼 수 있다.
14처소
예수님의 무덤
제 14처소 - 예수님의 무덤
예수님의 무덤은 원형의 둥근지붕 밑에 위치해 있다. 이 무덤 주위는 현란하게 장식되어 있고 그 안에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첫 번째 방은 긴 돌의자가 있는 천사의 예배당으로서 세 여인이 “그는 살아나셨다”라고 말한 천사를 본 곳이다(막 16:6).
두 번째 방은 예수님의 무덤으로 한 사람정도가 드나들수 있는 낮은 입구가 있고 안에는 가로 세로 2m의 작은 방이다.
넓은 대리석판으로 덮여 있는 관이 반절을 차지하고 있다. 예수님의 무덤 뒤쪽에는 콥트 소유의 작은 예배당(M)이 있다. 이곳에서 무덤에 속해 있는 관의 뒤부분을 볼 수 있다.
성묘교회
-기본 역사
성묘교회​
1. 간단한 역사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묻혔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루살렘의 바위 굴은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인 성 헬레나에 의해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335년경에 최초의 「성묘교회」가(보다 정확하게는 아나스타시스의 교회 또는 부활교회) 헌당되었다.
614년 페르시아인이 이 최초의 교회를 파괴한 후, 626년에 새로운 교회가 완공되었지만, 이 건물은 10세기와 11세기에 아주 심하게 파손되었기 때문에 1050년경에 세 번째 건물이 세워졌다.
이 교회 자리에 십자군이 1130년경 갈보리의 유적을 포함하여 주변의 모든 성지를 망라하는 훨씬 더 큰 건물을 세웠다. 이 건물은 또 1310년에 개축된 후 1808년의 화재로 일부가 파괴되었다. 현재의 교회 건물은 대부분 1810년부터 건립된 것이다.
1832년까지는 이슬람측은 모든 순례자로부터 입장료를 받았다. 그후 라틴교회,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공동으로 매년마다 통과세를 지불함으로서 입장료 없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17년 영국의 알렌비 장군에 의해 입장료 없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49년 요르단 정부에 의해서 무슬림들도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1967년 6일 전쟁 이후에는 유대인들도 출입이 허가되었다.
지금은 새벽 4시부터 저녁 7시까지 누구든지 자유로이 성묘교회를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2. 교회의 건물과 의식
이 교회의 본 건물은 서쪽에 성묘 위로 건립된 둥근 지붕의 건물이 있고 동쪽에 본 교회가 있다. 또한 여러 개의 부속 예배당과 고대의 많은 기독교인을 모시는 사당들도 있다. 일요일 아침 온갖 종류의 전례가 모두 음악소리를 내며 동시에 전개된다. 고난 주간에는 각 정교회들에 의해 서로 다른 의식이 거행되는데, 정교회마다 그들 특유의 의식 정해진 날에 거행한다.
3. 앞마당
오래된 물 저장고 위에 만들어진 뜰로서 전에는 채석장이었다. 마당이 포장된 것은 12세기경이다. 이 앞마당을 막는데 사용되었던 원주 기둥들을 아직까지 마당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성묘교회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요한 19:17). 기독교의 가장 성스러운 곳.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 그리고 그의 무덤이 있는 골고다 언덕에 위치한 다. 십자가의 사건은 성밖에서 행해졌다. 성에서 가까운 고로 (요한 19:20). 324년에 첫번째로 건축된 후 성벽으로 둘러싼 시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지 11년 후에 골고다 언덕은 주후 44년에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새롭게 세운 성벽으로 인하여, 성안에 위치하게 된다. 20세기 중반에 러시아 호스피스 부근, 교회 의 동쪽과 북쪽에서 고대 성벽의 유적을 발견하였다. 교회 안에서 발견된 유대인의 무덤은 이 지역이 당시 성 밖이었다는 중요한 증거인데, 유대인의 법으로는 성스러운 성 안에는 아무도 매장될 수 없었다. 십자가에 못박힌 장소 는 다음의 이유로 1세기 그리스도인에게 경건히 모셔졌을 것이다. 주후 135년 하드리안 황제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흔적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갈보리 언덕과 예수의 무덤에 쥬피터를 위한 로마 신전을 세웠다(베들레헴의 예수 탄생 장소에도 똑같이 하였다). 이것은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낳았다. 2세기 후에 콘스탄틴 황제가 정권을 차지하기 전까 지 이 장소들은 잘 보존이 되었기 때문이다. 326년에 헬레나 모후에 의하여 하드리안 신전은 파괴되고
성서에 서술된 갈보리 무덤이 잘 보존되어 발견 되었다. 콘스탄틴의 명령과 그의 모후 헬레나 여왕의 감독 하에 갈보리와 무덤 위에 바실리카식 교회당이 세워졌다. 이 위대한 콘스탄틴 건물들은 614년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파괴 됐다. 그리고 아봇 모데스토스에 의하여 전보다는 작게 건축 됐다. 다시, 1009년에 칼리프 하켐에 의하여 파괴되고 이것을 이유로 십자군이 역사에 등장한다. 1048년에 콘스탄틴 모노모쿠스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114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현재까지 보존된 성묘교회를 세웠다. 여러 번의 증축을 번복하였지만 교회는 십자군의 기초모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1852년의 터키시대에 정해진 6 개의 교단에 의하여 성묘교회는 관리되고 있다.
통곡의 벽
헤로데는 정통성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제2성전을 증축했다. 이를 일명 헤로데 성전이라고 한다. 헤로데 성전은 제2성전을 증축했을 뿐이므로 제3성전이 아니다.[1]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지나치게 세금을 매기고, 유대교에 간섭하고, 칼리굴라가 폭정을 휘두른 영향으로 서기 66년부터 73년까지 1차 유대전쟁이 벌어졌다. 73년 (훗날 로마의 황제가 된) 티투스 장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대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인 헤로데 성전을 깨끗하게 헐어버렸다.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건물을 헐어버렸지만, 성전의 축대이기도 했던 '이방인의 뜰' 부분의 서쪽 담장만큼은 헐어버리지 못하였다. 축대까지 무너트리기는 너무 힘들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옛 헤로데 성전 건물의 서쪽 축대 일부만은 무너지지 않고 남았으니, 이것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또한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축출하고 외국으로 흩어지게 하였으니, 이것이 디아스포라이다.
헤롯왕조 시대(기원전후 1세기) - 움마야트 왕조(8세기) - 마믈룩 왕조(13-16세기)
통곡의 벽은 예루살렘 올드시티 안 유대인 구역에 있다. 처음 7줄은(예수님,헤롯대왕 0) 4줄(움마야드 왕조(비잔틴 몰아내고 성전정리),폭이 좀 더 좁음,) 16줄(무술림.19c),1줄(영국 식민 통치)
보이지 않는 지하 통곡의 벽이 있음 , 코로나 이전에는 3개월전에 예약/ 윌슨 아치 홀, 토라 보관함, 네르 타미드 (레 24:2 등잔불<네르 타미드>->회당처럼 여기고 사용)
이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의 성전과 관련이 있다.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산 장소에(대상 21장)
솔로몬이 성전을 짓게 된다 (열왕기상 6장)
그 성전의 위치는 이후 예수님 시대에 헤롯 성전이 지어지는 위치이다. (누가복음 1장)또한 유대인들의 전승을 따르면 이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재물로 바치려했던 모리아 산이며
(창세기 22장), 그 전에는 이곳에 에덴동산이었다고 한다.
<솔로몬의 기도응답>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열왕기상 9:3
그럼 통곡의 벽과 성전과의 관계는 무엇인가?지금 황금돔이 세워져 있는 장소가 유대인들의 성전이 세워져 있던 장소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도 이 황금돔이 세워져 있는 장소는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황금돔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아니 올라갈 수 없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 안에 지성소 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 지성소는 일반 사람이 잘못 밟으면 즉사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지성소의 정확한 위치를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아예 그 장소 근처에 가지도 않는다.
예루살렘 성전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지어져 있는데 동쪽부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 '성소' '지성소' 로 이루어진다. 오른쪽이 동쪽이다.따라서 지성소는 성전의 가장 서쪽이 된다. - (Western Wall)
지금의 통곡의 벽은 이 지성소가 있었던 장소 가장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왜 통곡의 벽인가?
이렇게 중요한 장소인데 유대인들은 이곳을 마음껏 다니지 못했다. 항상 눈치만 보다가 1967년 6일 전쟁때 이곳을 탈환하였다. 군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기도 하고 기도 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있었던 장소에 가깝게 왔으니 이들은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서 탈무드와 토라를 공부하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관광객들은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문을 종이에 써서 벽에 넣어놓는 풍습도 생겼다. 일년에 두번 수거하여서 감람산에 묻는다.
통곡의 벽 위쪽다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갈 수 있지만 시큐리티가 지키고 있다. 그리고 위와 관련된 예약을 해야한다.
베들레헴
개관
빵집, 예수님 탄생
예수 탄생교회
축하한 사람들(목자들<소작농같은 사람들, 삯꾼이지만 메신저, 양문>,동방박사<페르시아 침공에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이 교회를 지었지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지금의 교회는 531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것입니다.
그 후 페르시아 군이 베들레헴을 점령했을 때 모든 교회를 파괴했는데 벽화에 그려진 동방박사들의 옷이 페르시아 조상의 옷이라서 이 교회는 건드리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건물만 파괴하지 않았지 여러번 침략을 받았는데요... 특히 말을 타고 들어와 교회를 유린한 경우가 많았다니요.
그래서 원래는 정상적인 교회 출입문이 십자군 시대에 이렇게 작아져 버렸답니다.
출입문의 높이는 1.2m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 들어갈때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그래서 ‘겸손의 문’으로 불립니다.
교회: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안, 천주교 3교회가 분할되어 있음, 페르시아 침공에도 살아남은 이유(동방박사의 복장), 헬레나의 모자이크,
아르메니안 정교회: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세운 나라. 예루살렘 4쿼터중 1개를 차지(그만큼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음),
제롬:라티언 히에로니무스 교황 될 뻔한 사람, 말년에 유골을 보고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성경 번역,책상에 유골이 있어서 맘이 힘들때마다 가슴에 치면서 번역했음(불가타<라틴어 성경>)
성 조지: 로마 군대의 2인자, 예수를 믿는다고 담대하게 선포, 항아리에 담겨져 자신의 수하들의 침뱉음에 당해서 순교했음, 집을 지켜주는 수호신 처럼 생각을 함
목자 들판 교회
목자 : 삯꾼 대신 양을 키워줌, 메신저(소문), 양문(양은 점프를 할 수 없다.) 천연 동굴에 교회를 세움
주의사항
세례터
예수님의 세례터 2곳 중 어디가 진짜일까? 갈릴리 호수의 바로 아래에 위치한 이스라엘 영역의 "야르데이트",
그러나 최근 실제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곳은 사해로 부터 8Km 북쪽 요단강 근처의 베다니 세례터를 가장 유력한 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서 발견된 AD 4~5세기 비잔틴 시대의 유적에서 예수가 세례를 받은 후 성령이 임하였다는 희랍어가 모자이크 형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 예수님 요단강 건넌 사건 엘리야 무덤 건너편에 있음,
요단강 건넌다? 힘든 땅으로 온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이미지도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언제들어왔는가?
Qaser el yahud 10년전애 오픈 이전에는 요르단 쪽 그리스 정교회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장 유력한 예수님 세례터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이스라엘에 베다니 2개 존재 예루살렘과 바로 여기
베다니(Bethany, Greek: Βηθανία, Aramaic: בית עניא)라는 지명의 뜻은 Beth 집과 Ani 가난한 자들이라는 두개의 단어로 조합된 것으로 가난한 자들의 마을로 추정된다.
수질 검사(씻는데 문제는 없지만, 마실수는 없다.토사물이 같이 쓸려서 색깔이 그렇다.)
사해
쿰란
영화(더빙) 숏컴
필사 그 전에 읽었던 leninguard codex(1000년경) codex(가장 오래된 사본) 사해사본과 비교 모음만 달랐다. 4세기때느 마소라 학파 때 점을 찍기 시작
유일하게 없는 성경 에스더? 에스더는 하나님의 이름이 없음
쿰란 공동체를 에세네파였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에세네파는 결혼을 하지 않는 비혼 주의였으며,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만들어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활동 무대와 시기와 겹치고, 검소의 규율과 여러 점이 비슷해서 세례 요한과의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서에는 바리새인(the Pharisees)이나 사두개인(the Sadducees), 열심당원(the Zealots) 등은 언급되고 있지만 엣세네파(the Essenes)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엣세네파도 세례 요한이라는 역사적으로 그 실존성이 확실히 인정되는 인물과의 관련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신약성서의 한 시대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엣세네파의 한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세례 요한의 행태나 신념의 상당부분이 이 쿰란 엣세네파 공동체와 유사하다는 논지가 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살았고,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하지만 쿰란에서 발견된 이들의 규율 집(rules of the community)을 보면 사두개파의 규율들이 많이 있고, 쿰란에서 발견된 무덤들을 보아도, 아이들의 뼈와 여자들의 뼈가 다수 발견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쿰란에 있었던 사람들은 에세네파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 다른 공동체들도 함께 섞여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이 공동체는 왜 이곳에서 살게 되었을까요? 쿰란 공동체 시작 시기를 보면 "요한 힐카누스 1세"때입니다. 요한 힐카누스는 당시 하스모니안 왕가의 왕이며 동시에 대 제사장직을 겸했던 인물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강압적으로 종교를 강요하는 모습도 보이고, 뒷돈도 받는 부패한 왕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왕을 싫어하는 그룹들이 나타났고, 요한 힐카누스가 권력을 쥐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광야에서 자기들만의 예배 공동체로 생활하기 위해 모인 무리들이 쿰란 공동체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쿰란 공동체는 당시 하스모니안 왕가에 반대를 하면서 떨어져 나온 여러 그룹들로 이루어졌다고 봐야 합니다.->레갑 자손과 같은 느낌
파피루스 양피지 원료차이 아도나이적을때 씻기 이사야는 500번 이상
웅덩이 이중구조 필터링을위함
웤, 에이리어 대추야자 발견
300개 동굴 11개 4개는 인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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