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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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현실을 밟고!
믿음은 현실을 밟고!
지난 시간 우리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제자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이야기가 극적이면 의도한 바와는 달리 해석될 우려가 있다는 주의를 통해 그렇다면 기적의 당사자 였던 맹인이 그를 아는 사람들의 반응 즉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라고 묻는 질문은 우리 일상에서도 그런 시각이 당연하다면 앞으로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일들도 그렇게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가하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는 모습은 한편으로 기울어진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딪고 하늘의 뜻을 본다는 말처럼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 그리고 맹인의 부모 등 몇몇이 등장을 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눈을 뜬 맹인에 대해서 반응하고 있을가요? 앞서 그를 알던 사람들은 맹인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다라고 말합니다. 자세한 배경은 나오지 않지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맹인으로 그가 참여하지 못했던 유대인 공동체로써의 회복 절차 상에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바리새인보다 제사장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상태를 확인 받게 되죠. 그렇다면 다른 이유는 예수와 연결된 당시의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요한복음에서는 5장의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친 사건이나 맹인의 눈을 뜨게한 사건 역시 안식일에 행한 이유로 인해 이미 엘리트 그룹이라 부르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하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는 암시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22절에는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무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럼 여기서 앞서 살폈던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면 그렇게 묻는 행위가 당연하듯 이렇게 그를 일종의 고발 형태를 취하는 것도 ‘당연한 것’인가를 함께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도 ‘데려갔다’는 동사로 시작하는 문장구성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들은 적어도 자신의 동료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사람이 오가는 자리에서 구걸했던 그에게 일어난 일은 함께 축하하고 잘 되었다고 격려하기보다는 예수와의 연결로 이어 어떻게든 예수를 막으려는 세력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죠. 요즘 우리 시대는 이런 면을 자주보게 됩니다. 과거에 했던 발언, 행동을 트집 잡아 현재 그가 누리는 인기나 명예를 실추 시키는 행동을 주저없이 행합니다. 물론 과거의 언행, 행동에 잘못이 있는 사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민원을 과도하게 넣어 담당자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게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가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찾고보니 그 사람은 어느 학교의 교사라고 했다고 또 다시 그에 대한 신상털기가 진행된 것이죠.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일을 철저하게 막았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로마 제국의 앞제 속에서도 나름 자치권을 인정받아 예루살렘에 거대한 성전을 유지하며 자기 민족을 이끌고 있으며 그렇게 조금더 시간을 견디면 메시야가 도래해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다윗 왕과 같은 부국강병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정체성은 한낯 갈릴리 사람으로 목수의 아들로 율법을 배운 적도 없는 예수가 이끄는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고치고 5천명을 먹이는 놀라인 기적은 말 그대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이런 대규모 행사 즉 유월절과 같은 분위기는 꽤 떨어진 곳에서 로마의 직속 군사가 파견되어 혹시라도 있을 민란을 방지하려고 말 그대로 삼엄한 경계가 내려진 상황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그들은 맹인이 눈 뜬 사건으로 들썩일 예루살렘의 분위기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안식일’에 행한 사건으로 위기감은 더 고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문제를 시급히 덥어야 했습니다. ‘당연하다’는 의미는 이렇듯 우리 삶에서 우리의 필요와 달리 움직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예를 들었던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를 떠났다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기뻐하는 아버지가 당연해 보여도 과연 그럴까요? 더 나아가 돌아온 아들을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기 위해 소를 잡는 분위기가 여전히 자리를 지킨 첫째 아들에게도 당연했을까요?
성경은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평생을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상태의 삶을 살았던 고통받는 맹인의 시각이 아니라 로마 압제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누리며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바리새인의 당연함,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멸문지하를 당할 수 있는 두려움이 지배하는 당연함을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 우리도 겪고 있지 않습니까?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와 흔하게 듣는 검찰 독재로 인한 사회 시스템의 붕괴는 정치인들의 구호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시대가 아닙니까?
그들의 말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16절의 말은 정말 그럴듯 해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안식일의 정체성’을 무시할 수 있으며 그 법을 지나 담대하게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한 것으로 제정하신 것이니 사람을 살리는 행위야 말로 안식일에 합당한 것입니다.라고 외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죠. 그들은 이렇게 ‘당연한’ 안식일의 법을 앞세워 맹인으로 살아온 한 사람의 기적, 그로 인해 회복될 한 사람과 그의 가정도 끊어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과 하나님’은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묘하게 ‘하나님게로부터 온 자’라고 하면서 하나님과 연결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논리로 흘러갑니다. 그렇게 연결된 자를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리새인들이 지정한 ‘죄인’과 이미 우리가 앞서 살폈던 ‘죄’의 정의는 다른 것입니다. 이점을 잊지 마시기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신봉하며 지키려했던 웅장한 그들의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으며 오늘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 즉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금요일 저녁까지의 시간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진노의 결과로 드러나게 됩니다.
16절은 결국 예수께서 행하신 자비로운 일은 안식일과 죄인으로 그들이 원하는 분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럼에도 맹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 같아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조금만 관심을 갖고 우리 시대를 보신다면 아니 내 주변의 친구라 하는 이들도 나에게 했던 말을 자기의 이익과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하거나 말을 바꾸는 경우를 쉽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 확신의 표현이 아니라 ‘팩트’에 대한 자기의 마음 가짐이자 태도입니다.
15절에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라는 팩트는 17절에 ‘대답하되 선지나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예수이지만 예수를 다시 선지자로 보는 말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곧 그에게는 올무가 되어서 맹인을 더 곤란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다만 그의 고백은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를 생각하는 범위를 넘지 못했습니다. 마치 예수에 대해서 아십니까? 라고 말하면 ‘아 잘 알지요, 기독교를 세우고 교회에서 믿는 분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하며 병든 자를 고치는 예수의 모습은 당대의 사람에게 선지자로 불렸고 맹인 역시 선지자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힙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18절에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맹인의 곁에 서 그가 맹인이었던 사람들의 증언인 13절의 ‘그들’을 바리새인들은 거부했습니다. 옆에서 본 증인,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는 맹인도 바리새인들은 거부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지 않으려는 태도’라고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3장에는 바리새인 중에 한 사람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 그는 예수를 변호하기도 하고 전승에 의하면 예수를 믿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4장에 아들을 위해 나선 왕의 신하 이야기는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반응했습니다. 믿음이란 참으로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의 냉철함이 움직이게도 하지만 때론 지나다 들은 흔한 말로 인해 믿음의 문이 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를 만나기 위해 높은 나무 위에도 올라 예수를 부르기도 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예수의 시선과 마주치려고도 합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믿지 아니하려고’ 그 반대의 힘을 씁니다.
난 ‘그래서 믿지 못하겠어’라고 찾는 이유는 단 한가지면 됩니다. 저도 고1.2 때 친구의 설득에도 ‘다 좋은데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기 때문이죠.
당연하다는 건 우리에게 이렇듯 함정과 같습니다. 그의 부모조차도 21절에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구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부모는 아들을 살리고 싶었겠죠. 일종의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현장에 없었으니 ‘어떻게’는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미 아들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들어서 알지만 내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른다는 의도 그리고 ‘누가’라는 말은 앞서 그가 바리새인들에게도 ‘그 사람이’라고 했다면 부모에게 ‘예수’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맹인을 예수와 연결시키려 했다면 부모는 예수와 분리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맹인이었을 때가 더 나았을지 모르는 상태, 소위 우리가 말하는 어떤 일에 휘말리게 된 상황이 된 것이고 여기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못하면 오히려 예루살렘 유대인 공동체에서 출교 당할 수밖에 없는 최고조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이 동네를 떠나 옆동네로 이사가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출교되면 예루살렘에 거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살폈던 명절을 지내기 위한 방문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광야 어디즘에선가 그들끼리 모여 버려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평범하게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출교는 가장 강력한 형벌이자 말 그대로 버려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혜로운 부모 덕분에 출교의 위험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에서는 인간의 지혜로 벗어날 일은 없습니다. 맹인을 향한 믿음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다시 맹인을 불러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거부할 수 없는 기적에 그들조차 한발 물러선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입술에 걸린 ‘하나님께 영광과는 달리’ 그들의 행동은 예수를 붙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 너의 주변 사람, 너의 말, 너의 부모의 말을 들어보니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이 맞구나’ 하지만 ‘예수는 죄인이 분명하다’ 이런 표현에는 ‘너는 살려주겠다’ ‘너는 살 구멍이 있다’ 그걸 우리가 주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져다 붙이면 되는 것이죠.
앞서 말끝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뜻’을 찾는 이들이 교회 안에와 주변에 많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사건이 희극이면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찾고 비극이면 하나님의 영광을 들이밀면서 너의 잘못을 추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미 성경에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고통받은 욥이라는 사람의 주변에 친구들입니다. 맞는 말을 하면서 입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걸렸지만 고통받는 친구를 더 고통받게 하는 이들처럼 바리새인들은 맹인에게 두 번째로 그들의 간사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맹인의 입을 통해 ‘죄인’에 대한 동조를 얻고자 했지만 맹인은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라는 말에 당연과 거부가 함께 공존합니다. 여러분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이 당연합니까? 물론 자신이 경험한 것 만큼이나 확실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분위기에 따라 경험한 것과 해석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때나 오늘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의 당연함입니다. 내 코가 석자라는 말도, 일단 내가 살고 봐야겠다는 말이 당연하듯 말입니다. 하지만 순서가 바껴서는 안됩니다. 내 코가 석자라고, 내가 살고 봐야겠다고 순서를 바꾸는 순간 우리의 삶은 나락을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죠.
그들은 계속해서 ‘네게 무엇을 한 것,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한 것’은 처음부터 해결되지 못하는 질문이지만 유일한 답은 맹인이 직접 경험한 놀라운 사실이라는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런 류의 것입니다. 27절에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는가’는 반문은 어쩌면 맹인의 마음에 깊이 잠들었던 예수를 향한 자신의 마음의 표출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저는 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28절에 ‘욕하고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합니다. 한편으로 이해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바리새인들처럼 언제든 반대하고 자랑하듯 치켜새우는 것인가.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하는 정도의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싶은거죠. 반면 우리의 믿음은 숨기기에 급급하고 교회 내에서조차 어디 구석진 자리에 잡으려 하지는 않습니까?
여기 본문에서는 맹인이 제자가 되겠다는 의도는 없는지 몰라도 바리새인들에 의해 결국 예수와 같은 편으로 규정됩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하는 말이 참말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들은 적이 없다’ 맞습니다. 예수님만 행하신 유일한 표적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거침 없는 말은 오히려 참말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35:4–5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라고 학수고대하던 메시야에 대한 표적을 몰랐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믿어야 하지만 그들은 이런 일이야 말로 33절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실은 참말 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규정은 ‘맹인과 예수’를 ‘죄 가운데’ 있다고 규정합니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그들의 입에는 온갖 신학적인 말과 용어들이 걸려 있었지만 그들의 태도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눈으로 본다고 믿는 믿음의 한계는 바리새인들이 갖는 한계일 뿐 아니라 여전히 우리도 보고자 하는 욕망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희망차 보이는 현실은 아름다운 말로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배신할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며 예수는 십자가를 향한 길을 치열한 싸움의 길로 걸어가셨고 이기신 분이십니다. 믿음은 현실을 피해 하늘로 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밟고 올라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주한 현실은 무엇입니까? 그속에서 여러분이 주장해야할 믿음의 팩트는 무엇이며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까? 오늘 이 질문이 고난 주간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묵상하는데 나침반이 되기 간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