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의 종려나무 찬양
Notes
Transcript
서론
서론
오늘은 종려 주일 입니다.
종려 주일은 주님이 예루살렘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고
절기상으로는 고난 주간의 시작 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듯이, 이날 주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때,
백성들은 종려나무 잎을 흔들고 길위에 자신의 겉옷과 함께 길 위에 깔아 마치 지금의 레드카펫으로 고귀한 사람에 대한 환영과 존경을 표하는 것과 같은 퍼포먼스를 하였다는데서 유례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완전한 승리의 날, 그 마지막 때도 마찬가지로 손에 종려나무를 들고 주님께 찬송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두가지의 종려나무 찬양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에 울려 퍼졌던 호산나와 종려나무의 찬양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날에 울려퍼진 종려나무의 찬양이 어떤 차이점과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부활을 사모하며 오늘날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응답을 요구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큰 깨달음의 은혜와 다짐이 있으시기를 축원 합니다.
1. 십자가 이전과 이후의 찬양
1. 십자가 이전과 이후의 찬양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대상의 변화: 이스라엘의 주, 이스라엘의 왕 vs 구원 받은 온 열방과 온 백성의 하나님과 어린양
: 호산나(구원하소서-바램) vs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구원의 권능 찬양, 구원 받았다!) 찬양과 기도의 차이. 기도는 소원/찬양은 행하신 일 경배.
호산나-나의 민족을 부흥시켜주소서, 나의 가정을, 조건부, 내 중심 찬양, 인간이 영광을 일부를 나눠 가지려는 시도.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돌리는 순수한 경배. 천국찬양
요한계시록 7:12 (KRV)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자세의 변화
종려나무가지와 옷가지 vs 얼굴을 보좌에 대고 엎드려 …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길의 종려나무 찬양은 십자가 이전의 찬양 입니다.
당연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이후의 엄청난 말씀의 성취와 만민과 열방을 향한 성령의 역사와 복음의 증거가 나타난다는 것을 인지 하지 못한 찬양 이었습니다.
반면에 십자가 이후의 말세에 모든 구원의 역사가 완결 되고 하나님과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을 찬양하는 종려나무 찬양은 완전한 승리를 찬양 합니다.
더 바랄 것도 없고 그저 순수하게 하나님과 어린양게 영광을 돌리는 순수한 찬양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어떤 찬양이 넘쳐야 할까요?
지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자체로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 어떤 것들로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릴 수 있을까요?
그분의 전능하심, 인애하심, 광대하심, 등등 헤알릴 수 없이 많은 찬양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에도 여러 종류가 있듯이, 우리의 찬양에도 소망을 담아 올리는 찬양도 있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찬양이 있습니다.
하지만 2000년 전 예루살렘의 군중들에게는 경배와 높임의 찬양도 있었지만 다른 목적도 분명 있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의 날이 오면 우리의 찬양은 순수한 경배와 높임만이 있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이 두가지의 종려나무 찬양의 차이점 입니다.
2.흰옷 입은 성도의 찬양
2.흰옷 입은 성도의 찬양
ㄱ.그 이름 찬양
ㄱ.그 이름 찬양
호산나는 “하나님 나를 구원 하소서” 라는 의미 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에게 그날의 예루살렘에서는 수 많은 생각과 기대와 소원을 담아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개인과 나라와 민족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로서의 기대 입니다. 하지만 이 기대는 하나님의 계획에 맞지 않는 기대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아니라, 열방과 모든 민족을 전 인류를 구할 십자가 사역의 시작점이었기 때문 입니다.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그것들을 주님이 가시는 길에 깔고 경의를 표했던 백성들과 오늘 계시록의 성도들의 가장 큰 차이는 한마디로 구원을 받았는가? 입니다.
당연한 이야기 이지만 십자가 이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주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한정된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온 메시야 이며 민족을 부흥시킬 운동가였습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을 소중히 여기시지만 그와 동시에 광대하신 우주의 창조자 입니다. 인간사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 또는 공동체가 하나님께 선택받아 하나님의 크신 사역에 사용되었다 하여도
결국은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한 역사였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나를 쓰시고 나를 통해 일하신다고 하여도 결국 하나님이 목표 하시고 바라보시는 사역은 나의 개인적인 축복에서 머물 수 없습니다.
그 이름은 나만을 위해 주신 이름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날의 예루살렘에서는 온 인류의 메시야가 아닌 이스라엘의 왕을 향한 호산나만 있었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우리가 하는 봉사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만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까요?
하나님의 교회는 나의 것이 아닌데, 왜 어떤 분들은 자식에게 물려 주려 하고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의 좁디 좁은 생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 해서 그렇습니다. 나 중심으로 나의 필요에 따라 해석해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그 이름은 전 인류를 구원하실 이름이지 이스라엘의 왕의 이름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 이름과 구원에 대해 또한 큰 오해에 대해 지적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에 오해를 하면 안됩니다.
불교에서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나무+아미타불=극락세계를 담당하는 아미타 부처에게 귀의한다는 뜻
“관세음보살은 괴로움을 없애주고 행복하게 살게 해 주소서”라는 뜻
아미타불은 중생들의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자신을 부르는 사람을 구제해주는 부처
나무아미타불만 연불하면 극락왕생 한다는 대승불교의 핵심 교리.
혹자나 다원론자들은 불교와 기독교의 유사점이 있다고 하고 결국은 모든 종교는 같다는 괴변을 주장할때 많이 사용 됩니다.
염불 한다는 것은 겉으로는 우리의 기도와 신앙생활하는 것과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부처가 되었건 예수가 되었든 그 이름을 염불하고 되뇌이면 극락왕생이든 천국이든 간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가든 어디든 좋은 내세로 가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나 여타 깨달음을 주는 설파나 강의는 일면 진리의 모습을 하고 있어 참 구분하기 힘듭니다. 원리적으로는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단과 사이비도 교리로는 비슷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봉사활동을 하고 이웃을 돕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구분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까? 바로 그들이 외고 염하는 이름이 “예수”가 아니기 때문 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누구든지 ‘아무 이름’이나 부르라고 했나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 이름만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주 쉬운 길처럼 보이지만 그 방법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의 이름인가 입니다.
오늘 본문 계시록의 구원 받은 성도들의 종려나무 찬양은 그 누구의 이름도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입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의 백성들에게 예수 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란 이름은 어떤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어쩌면 그들에게 그 이름은 예수가 아니어도 됐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되었건 자신들을 이 로마의 속박과 처참한 현실에서 구해줄 수만 있다면 그 이름이 엘리야든 모세든 다윗이든 상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여러분은 그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은 필요 없습니까?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있는 나의 영에게 질문 해보십시오!
나는 정말 기독교인으로 살아가지 않아도 살 수 있지 않는가? 스스로 질문 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되었건, 그 어떤 성찰이나 기도도 없이 그저 사람들이 나가 종려나무를 들고 환호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주님을 맞이 하던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여러분, 아마도 그날의 예루살렘에서 종려나무 찬양으로 주를 맞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다시 급변한 여론에 의해, 광분한 군중으로 돌변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맞았던 예수가 아무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수 많은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에 들고 있던 종려나무가지는 채찍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호산나” 찬양하던 입술은 침을 뱉고 참소하고 조롱하는 입술이 되어 비수처럼 날아와 예수님의 가슴에 꽃혔을 것입니다.
이런 찬송이 이런 종려나무 환영행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처음에 잘 믿다가 나중에 가서 신앙을 저버리고
처음에 순수하게 신앙생활 하다가
안타깝게도 나중에 세상과 짝하고 교회에서 대장놀이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아무리 그 입에서 천사의 찬양을 하며 호산나 호산나 나를 구원 하소서 외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계시록의 그날에 성도들은 이들과 다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손에는 종려나무를 들고 있지만 그들의 찬양은 다릅니다. 그들이 부르는 이름, 그들의 찬양하는 대상은 그저 아무나 되었든 자신을 구원할 이름이 아닙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큰 소리로 외친다는 것은 성도의 확신의 표현 입니다.
이제 나의 모든 신앙의 경주가 마치고 하나님의 구원을 어린양이 희생을 순수하게 찬양하는 벅찬 그날이 임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모습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며 살아가는 성도가 마땅이 올릴 순수한 찬양 입니다.
ㄴ. 보혈로 씻긴 순결한 성도들의 찬양
ㄴ. 보혈로 씻긴 순결한 성도들의 찬양
또한 이들의 찬양은 완전한 죄사함을 경험한 성도들의 찬양 입니다.
그날에 성도들은 흰옷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의복에 대한 규례와 상징이 많이 등장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무덤을 지키던 천사들도 흰 옷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12 (KRV)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그리고 우리 주님도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입었던 수의도 흰 세마포 옷이었습니다.
마지막 때에 성도는 왜 흰옷을 입어야 할까요?
이것은 세상과 구분된 사상과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받을 수 있는 상입니다.
구약시대에 성막을 지을때, 외곽을 둘러싸는 경계선을 흰색 세마포로 둘렀습니다.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찌니 남을 향하여 뜰 남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 편을 당하게 할찌니
무슨 의미 일까요? 세상과 구분된 거룩함을 말합니다. 그 흰 세마포 포장은 성벽도 아니요. 뚫을 수 없는 금속펜스도 아닙니다.
성도의 신앙이요. 신앙의 의지의 표현 인것입니다.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지 하는 다짐 인것입니다.
또한 옷은 우리의 여린 피부를 추위와 햇볕과 해충과 날카로운 것으로 부터 보호하는 역할도 합니다. 또한 아담에게 가죽 옷을 지어주신 것처럼 수치를 가려주십니다.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하는 이 장막 또는 옷을 얻을 수 있을까요?
항상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와오고,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세상과 구분되고 세상으로 부터 보호하시는 세마포 장막으로 덮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이 장막은 세상과 구분할 뿐 아니라,
인생의 모든 고통과 슬픔에서 우리를 구하시는 장막 입니다.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그뿐 아니라, 어린양 예수는 목자 되시어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눈에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한편으로 마지막 때에 성도가 입게 되는 옷이 바로 흰옷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성도의 옷에 대해 성경에서는 성도의 행실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마지막날의 성도의 흰옷은 성화를 의미 합니다. 이제 천사와 같이 빛나고 깨끗한 모습으로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 찬양하며 살게 될 것을 의미 합니다.
구언과 별도로 우리의 삶의 결과물, 선한 행실에 대한 하나님의 상이 바로 흰옷입니다.
이 흰옷은 본래 부터 흰옷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옷은 세상과 짝하여 쉬운 길만 걷던 이들은 받을 수 없는 신앙의 종려나무 면류관과도 같습니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큰 환란에서 삶의 어려움 중에도 어린양의 피로 씻겨 희어진 성도들의 모습은 흰옷 입은 성도로 묘사됩니다.
신앙생활은 힘이 쎄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 승리자가 아니라, 끝까지 변하지 않고 견디는 사람이 승리자 입니다.
명목상 경호실장이지만 거의 수의에 가까웠던 김구는 임시정부가 무너져 갈 때, 모두가 미국으로 중국 본토로 소련으로 떠날때, 모든 후원이 끊이다 싶이 한 임시 정부를 변함 없이 지켰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김구의 마음으로 다윗의 마음으로 교회를 또한 나의 직분을 끝까지 기쁨으로 지키는 자들을 하나님은 끝날에 상주십니다.
예수의 보혈의 의미를 알고 참고 참으며 신앙을 지키고 그 사랑을 배우고 따르며 힘들어도 신앙 지킨 성도들 큰 환란을 만나도 낙심 치 않고 또는 자신의 힘에 의지 하지 않고
시시로 그를 의뢰하고 고독한 기도의 처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마음을 토하며 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피난처로 여기며 산 성도들을 마지막 날에 흰옷을 입혀주십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밤낮으로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오싶시오! 이 악물고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해내십시오! 들어주시고 위로하시고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결론
결론
2000년 전 그날에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누구의 이름을 외치고 무엇을 기대 했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이름 앞에 환호 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얻기를 원하고 있나요?
우리는 본디 죄로 죽어가던 자들 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께 대항하던 반란군 이었습니다.
죄는 우리를 내적 외적 비참에 빠지게 하였고 이 땅의 모든 비참은 인간의 죄때문 입니다.
OECD 국가들 에게 질문 했습니다.
“인생에 가장 귀중한 가치는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나라에서 1위 부터 3위 까지 거의 공통으로
가족, 행복, 관계 등으로 답변 했지만, 오직 대한민국만 “돈” “자기 만족” “자기 건강” 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이 복음으로 부흥하던 때에 우리는 소망을 이야기하고 천국을 소망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돈돈돈 하고 자기 건강, 자기 행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자식 부모 관계도 결국은 돈이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 입니다.
누가 되었건 나를 행복하게 평안하게 해줄 사람이라면 종려나무를 들고 기쁘게 맞이 하는 시대 입니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그 방법이 무엇이든 나에게 유익하다면 나의 겉옷까지 벗어 땅에 깔아주고 환대하는 시대 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나의 도움이 되지 않고 별 권력이나 권능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가차 없이 버림 받는 세상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메달라고 외치던 군중들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고 소망해야 하는 것은 그게 언제든 주님의 심판의 날은 도래 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수 많은 환란과 절망이 우리에게 찾아 올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불법이 성행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차가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시다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깁시다.
환란 중에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읍시다.
나의 아픔과 고통을 하나님 앞에 토해냅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찬란하고 순결한 장막으로 우리를 덮으사 보호하시고 먹이시고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마음 속의 응어리진 슬픔과 아픔으로 흘리는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외칠 우리의 찬송을 오늘을 살아가면서 크게 외치며 사시기를 축원 합니다. 다 함께 외치겠습니다.
구원 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구원 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