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4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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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하나님

여러분! 오늘도 함께 만나 반갑습니다! 다들 학교생활 잘 해나가고 있죠? 이제 벌써 오늘로 3월도 마지막 예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얼마 안한것 같은데 벌써 3월이 끝나간다니 참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말씀을 나누기 전에 옆사람을 바라보면서 인사하도록 할게요. 먼저 이렇게 인사해봅시다. 지난 한주도 참 고생많았어.
여러분들도 지난 한주간을 살아내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각자의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나아온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까 인사하지 못한 사람에게 이렇게 인사해볼게요.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주간을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이번주는 그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으셨던 은혜를 기억하는 고난주간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늘 오는 한주일 수 있겠지만요, 이번 한주만큼은 주님께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 정말 큰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요, 조금은 더 주님께 가까워질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오늘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말씀을 통해 바라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번달에 들어오면서 우리가 어디 성경을 읽고 있죠? 마가복음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첫주에는 낮은자가 높아지는 역전의 아이러니를 보았고, 지난주에는 포도원 비유를 통해 농부와 같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말씀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말씀이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지난번과 같은 비유의 말씀이 아닌, 아예 지목하여서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을 보여주시는데요,
함께 말씀을 살펴보면서 주님께서 오늘은 우리에게 또 어떤 말씀을 주실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오늘 말씀 시작 부분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존재하는 한 그룹을 지정하여 말씀하십니다. 어떤 이들을 말씀하셨죠? 그렇습니다. 바로 서기관들입니다.
그럼 서기관들이 뭘하는 사람들이냐, 잘 한번 봅시다. 여러분, 서기가 뭐하는 사람이죠? 어떤 일들을 기록하는 사람이죠. 그럼 그 뒤에 ‘관’자가 붙었으니까 뭘까요?
기록하는 일을 하는 관리이죠. 그래요. 쉽게 말하면 행정직 공무원인 셈이죠. 우리나라에도 공무원들 중에 서기관으로 칭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찾아보니 4급인가 그렇더라구요. 상당히 높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서기관을 언급하셨느냐, 이 당시에 서기관들은 물론 나랏일을 하는 관리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사회에서는 지식인으로서 대우를 받았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기록물을 관리하면 어떤 기록물을 관리했겠어요? 그렇죠. 바로 율법을 관리했겠죠.
그러다보니 이 서기관들이 율법을 잘 알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일들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서기관들이 유대 사회에서 지식인으로서 여겨졌겠죠.
그런데 이 서기관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나요?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그리고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자. 일단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긴 옷은 일상적인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기나 어떤 기념일에 특별하게 입는 옷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서기관들이 긴 옷을 입었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상황이라는 것이고, 특별한 상황에서 특수한 옷을 입으면 서기관들은 어떤 대우를 받겠어요? 아주 격식을 갖춰서 높여 대우하겠죠.
즉 유대 사회에서 높임을 받는 것, 다시 말하자면 영접받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은 뭘까요? 마찬가지의 이야기라는 거에요. 사람 많은 곳을 다니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 있는데요, 요즘 뉴스를 틀면 아주 자주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색깔 점퍼를 입고, 나이 지긋하신 분이 수많은 사람들 대동해서 단체로 시장을 다니는 모습. 그래요. 바로 정치인들이 선거철에 시장을 다니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분들이 시장에 나타나면,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옆에서 사진도 찍고, 호응도 해주고 거의 연예인이 따로없죠.
평소에는 마트가실 분들이 이상하게 이럴 때에만 시장오셔서 음식 하나씩 집어먹고 하시더라구요. 여튼 그런 자리에 와서 사람들의 호응을 받고 하는 일들이 이스라엘에서도 서기관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9절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하시죠?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당은 어떤 곳이냐면, 신약시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말씀을 읽고 나누는 곳이었어요.
우리가 서양 역사를 배우면 가장 처음 그리스에 대해 배우면서 아고라라는 것을 배울거에요. 아테네 시민들이 모여 서로 어떤 안건에 대해 토의하고 하는 곳이었다고 하죠.
어쩌면 이 회당이라는 곳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한 장소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철학을 논했다면, 유대인들은 말씀을 나눈 것이죠.
그러면 그 장소는 어느정도 학식이 있거나, 혹은 배움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그 높은 자리를 원했다는 거에요. 그만큼 지식으로 존경을 받고자 했던 것이겠죠.
이어지는 잔치의 윗자리도 비슷할 것입니다. 우리가 잔치를 하면, 보통 내빈소개를 합니다. 학교 입학식이나 졸업식을 하면 누군지도 모르는 분들이 단상 뒤에 앉아서 막 소개받고 박수치고 하죠.
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자리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뭐 크게 한거는 없지만, 박수받는 자리 말이죠.
예수님은 그러한 영접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뭐라고 말씀하시죠? 그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번째로,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과부라는 단어가 많이 언급이 되는데요, 여러분들은 과부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죠? 남편을 잃은 여인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이혼이나 사별이 큰 흠이 아니지만, 당시에는 배우자를 잃는다는 것이 매우 큰 흠이고, 큰 고난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고대사회는 남성중심의 사회였고, 그 중에서도 유대사회는 특히 또 그러했죠.
그러한 사회에서 남편을 잃는다는 것은 사실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 혼자서 어떤 일을 하기란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성경에서 과부는 주로 사회 취약계층을 표현하는 예시로 잘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과부는 어떤 사람인거에요? 사회 취약계층이라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서기관들이 그러한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나름 지식인인데, 그냥 막 가서 돈내놔 했겠어요? 그렇지는 않겠죠. 하지만 아마도 대놓고는 아니더라도 우회적으로 그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형식의 일들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등장하죠? 삼정의 문란이라는 이름으로 정말 어려운 민초들의 돈을 빼앗는 탐관오리들의 모습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마 서기관들도 당시에 이런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서기관들이 외식으로 길게 기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 들으면 밖에 나가서 길게 기도한다는 이야기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보여지기 위한 기도를 이들이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기도를 진심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한다기보다는, 겉으로 보여지기 위해서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할 때 조용한 곳에서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1대1 대화를 하기를 원할 겁니다.
그런데 이들의 기도는 달랐던거에요. 예를 들면 이런식이죠. ‘주님 저는 저 이방인들, 저 죄인들과 같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식이에요.
시쳇말로 하면, 기도로 돌려까는 것이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너희와 다른 특별한 사람이야’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해 기도라는 수단을 사용한 것이죠.
거기에 더해 마치 기도를 잘 하는 사람인 것처럼 막 사람들 앞에서 크게 이런 기도를 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로 치면, 뭔가 되게 성령 충만해보이고 싶어서 방언하는 척을 한다거나 하는 것들도 포함될 수 있겠죠.
그래서 예전에 신대원 교수님들이 농담으로 이런 이야기도 했었습니다. 헬라어로 주기도문을 외워두면 나중에 그걸로 기도하면 성도님들이 우리 목사님 홀리하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었죠.
여튼 이런 식으로 진정한 기도가 아닌 기도가 수단이 되는 일들을 서기관들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서기관들이 하나님께 중한 판결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정의가 반드시 세워질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죠.
예수님은 이렇게 서기관들을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야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원래 그런분이시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요, 사실 당시 사회에서 예수님처럼 말씀하시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보았을 때에는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이 보이는 모습이 매번 예수님과의 토론 배틀에서 와장창 깨지는 모습만 보니까 마치 로켓단같은 빌런처럼 여겨지겠지만,
사실 이들은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을 잘 알고,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에서 많은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서기관들이 영접받는걸 즐긴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억지로 영접한 것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이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영접을 했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사람을 대놓고 예수님께서 비판하셨다는 것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볼 수가 있겠죠.
하지만 예수님께는 그러한 세상의 평판? 사람들의 시선?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바로 진리였죠.
이어지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전에 있는 헌금함 근처에 앉으신 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헌금을 하는지를 보십니다.
사실 이 장면은 지금 우리가 생각했을 때에는 좀 우스꽝스러운 그림입니다.
사람들이 헌금을 내는데, 거기 앞에서 대놓고 보고 있다는 것은 사실 우리로서는 잘 상상이 안가는 이상한 모습이죠.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일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헌금함은 성전에서 모두가 내는 성전세 반 세겔을 제외하고, 성전에 들어오는 사람들 중 마음이 동한 이들이 추가적으로 헌금을 내고자 할 때 이 헌금함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사실 감사한 마음이기에, 모두가 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공개해놓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일이 늘 그렇듯, 그 헌금함이 자랑의 요소로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 돈 많은 부자들이 그 헌금함을 찾아 많은 돈을 보란듯이 넣기도 했죠.
오늘 말씀에서도 그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42절에서 한 사람이 등장하죠. 한 가난한 과부입니다.
우리가 앞서 과부가 당시 사회에서 어떤 계층이라고 했죠? 사회 취약계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가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렙돈이라는 돈의 가치는 성전세로 쓰였던 반 세겔의 절반인 1 데나리온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통용되는 헬라 동전 중에서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이라는 것이죠.
지금 우리로 비유하자면 헌금함에 10원짜리 동전 2개 넣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자 앞서 이 헌금함이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 있다고 했고, 그렇기에 많은 부자들이 많은 금액을 그 안에 넣었다고 했죠?
그런데 갑자기 한 과부가 정말 비교도 안되는 작은 돈을 넣은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까요?
여러분들이 잘 이해할만한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가 참 좋아했던 예능인 무한도전이라는 예능이 있죠. 그 프로 안에서 또 인기가 있던 것이 무한상사라는 상황극이었습니다.
그 무한상사도 여러편이 있지만, 그 중에서 새해를 맞아 유재석 부장의 집에 방문한 편이 있습니다. 사원들이 부장의 집에서 윷놀이도 하고 하는데, 어쩌다 티비를 틀게 되죠.
그런데 그 티비에서 연말성금 방송이 나옵니다. 막 기업에서 몇천만원, 몇억 이렇게 큰 금액들을 하는데, 갑자기 유재석부장이 나오면서 5만 몇천원에 구내식당 식권이 등장하죠.
그리고 정준하 과장이 요정도의 금액도 티비에 나와요? 라고 하면서 웃음이 터지게 됩니다.
마치 이런 상황과 비슷한거에요. 다들 큰 금액을 턱턱 내는데, 갑자기 와서는 두렙돈 조금 넣으니, 어떤 이들은 웃었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이 과부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많이 넣었다고요.
그리고 그 이유를 뭐라고 하시죠? 다들 풍족한 중에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모든 소유를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어땠을까요? 어쩌면 옆에 사람들이 웃었던 것처럼 웃거나, 아니면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거나, 아니면 굳이 돈도 없는데 왜 성전세말고 돈을 더 내지?라면서 어이없어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말씀에 안나와있기에 그저 추측에 불과하지만요.
여기까지가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그룹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첫째는 서기관이었죠. 세상에서 수많은 존경과 영접을 받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어떤 사람이죠? 가난한 과부입니다. 세상사람들의 영접은 커녕 불쌍함과 동정을 받는 것이 다행일 정도인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두 그룹에 대해 정말 다른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인식 하에서는 그들이 그러한 상황에 놓인 것이 그들의 행동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다시 말하자면 서기관들은 말씀을 잘 알고 지키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고, 저 과부와 같은 이들은 악하고 말씀을 지키지 않으니까 남편을 잃는 재앙을 허락하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나요? 오히려 반대로 그들을 대하십니다.
서기관들은 삼가라고 하시고, 과부는 칭찬하십니다.
아마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거에요. 하나님이 분명 말씀을 잘 알고 지키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는 심판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서기관들은 말씀 잘 알고 지키는데, 과부는 말씀을 잘 알기는 하는건지, 지키기는 하는건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왜 대체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과 다르게 저들을 대하실까? 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방금 유대인들의 이야기에 틀린 것이 있나요? 사실 맞는 이야기에요. 말씀대로 지키면 복받고, 안지키면 벌받고 맞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말씀 잘 아는 이들을 혼내시고, 말씀 잘 모르는 이들을 칭찬하시느냐는 말이에요.
자. 여기서 우리가 오늘 바라보아야 할 포인트가 있습니다. 바로 무엇이 말씀을 잘 알고 지키는 것인가?라는 부분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봅시다. 저 사람은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이야! 라는 것을 뭘 보고 알 수 있죠?
우리는 보통 행동을 보고서 말씀대로 행하면 말씀을 잘 지킨다고 생각할 거에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으니까 주일에 예배 잘 나오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시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찬양만 하고, 다른 이들의 물건을 탐내지 말라고 하셔서 탐내지 않고.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보통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라고 말할거에요.
그런데 사실 이 내용들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이 이스라엘에서는 누구였을까요?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이었을거에요.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냐면,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서 말씀을 해부하고 뜻을 생각하고 기준을 세우고 하는 사람들이었단 말이에요.
사실 이들이 칭송받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알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으니까,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라고 말씀 회복 운동을 한 이들이 바로 이 바리새인들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왜, 말씀 그 자체라고 불리셨던 예수님은 말씀을 지키려고 그렇게 애쓰고 했던 이들을 칭찬한번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싸우고 혼내시고 했던 것이었을까요.
우리 한번 그 이유를 다른 말씀에서 찾아봅시다.
마가복음 10:17–22 NKRV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말씀은 한 청년 이야기. 한 부자 이야기 이렇게 알려져있는 말씀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이 한 사람은 예수님 앞에서 떳떳하게 십계명 다 지켰습니다 라고 할정도로 나름 말씀을 지키려고 부단한 애를 쓴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여기서 이 사람처럼 저 십계명 잘 지켜요! 라고 떳떳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거에요.
그정도로 말씀에 대해서 노력을 한 사람인데, 예수님께서 한마디로 그를 보내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이 말씀 이후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그 유명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라는 말씀입니다.
자. 방금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 정말 말씀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그 사람의 노력은 진심이었던 것 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사람을 사랑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런데 그 사람역시도 이웃에게 자신의 것을 다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겠죠. 우리에게 소유라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고, 놓기 힘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 사람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신 것일까요? 저 사람이 제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당연히 못지킬 것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뭐 어쩌면 반은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이것을 통해 인간이 말씀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정말 저 사람이 그것을 지키시기를 원했습니다. 왜냐? 그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지켰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한 그 십계명의 말씀 깊숙한 곳에 두가지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하면 생각나는 두가지. 뭐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길 원하셨던 것이 바로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 말대로 말씀을 완벽하게 지켰다면, 그 속에 있는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가진 소유를 다 이웃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렇지를 못했죠. 왜일까요? 말씀의 깊숙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문자적으로만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그저 문자 그대로만을 따라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던 바리새인들의 실책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 그대로를 지키기 위해서 어디까지 했다고 했었죠? 이전에 한번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안식일에 쉬기 위해서 쉼의 정의까지 정했다고 했죠. 예배처소까지 가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도 더 걷는다면 일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은 무조건 쉬는 것이 핵심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안식일에 주님을 기억하고, 모든 시간을 주님과 함께하는 것에 사용하는 것이 핵심이었죠.
바리새인들은 이런식으로 말씀의 핵심을 보기보다는 말씀을 지킨다는 그 자체에만 빠져서 오히려 말씀의 본뜻과는 벗어난 이상한 일들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을 가지고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영접을 받고 하려는 교만함까지 생겨나게 되었죠.
그러한 잘못된 순종이 결국 이들을 어디까지 이끌었을까요?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신성모독을 이유로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까지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들께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말씀을 잘 지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죠?
행동이 중요한가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 알겁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할 것은 그럼 뭘까요? 말씀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제대로 깨달아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나아갈 때, 우리는 말씀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십계명이 이야기하는 본 뜻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기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바리새인들처럼 어떻게 막 기준을 삼고 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는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와, 그럼 이제 우리는 말씀만 잘 알면 모든 말씀을 잘 지킬 수 있겠네요? 그럼 이제 우리는 모두 말씀을 완벽히 지키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겠죠?
여기서 우리가 쉽게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왜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말씀을 잘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말씀의 서기관들이 행했던 것처럼, 교만한 마음이 피어나게 되기 때문이죠.
한번 보자구요. 당장 우리가 말씀을 지킵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못 지키는 것을 보았다고 해봅시다. 그럼 어떤 마음이 들까요?
너 왜 이렇게 못해? 라는 마음이 들게 될거에요. 그러다가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될까요? ‘넌 죄인이야’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 마음은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인가요? 아니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또 우리는 결국 말씀을 완벽하게 못지키게 되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완벽하게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죠.
이 사실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면서 이렇게 하겠다고 고백해도, 곧 있으면 또 다른 것들 하잖아요.
왜그럴까요? 우리 인간이 죄로 범벅인 죄인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죄인이기에 자꾸 마음속에 나를 높이고 다른 이들을 낮추려는 마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첫주에 보았던 제자들처럼, 방금 말씀을 통해서 보았던 자신의 것을 주지 않으려는 부자청년 처럼.
죄가 많은 우리는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에게 누가 오셨을까요?
바로 주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본인께서 말씀하신 모든 십계명의 말씀, 거기에 더해 메시야의 예언의 말씀까지도 모두 스스로 지키시고, 그 지키신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죠.
그 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껏 지은 모든 죄악들은 예수님께서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자신과 함께 못을 박으십니다.
그것을 위해 고난받으신 그 고난의 주간을 기념하는 것이 바로 돌아오는 이번 고난주간입니다.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 고난을 받으시고 말씀을 지켜주신, 그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는 이번 한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할게요. 요즘 인터넷과 같은 세상에서 기독교를 욕하는 주된 요인 중 하나가 뭘까요? 바로 내로남불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요즘은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도 성경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믿고, 배우고, 지킨다는 우리 성도들이 삶 속에서 오히려 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거에요.
그러니 그 모습들을 보는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기독교도 아무 소용없다고 하겠죠.
하지만 그 사람 본인은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자신은 교회 열심히 다니니까 좋은 성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삼가라고 하셨던 서기관의 모습 그대로일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말씀을 알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성도들이라면, 말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물론 부족하지만, 저 과부와 같이 두 렙돈만큼의 행동이라도 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렙돈의 노력을 보고 변화하는 이들이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돌아오는 이번 한주간, 우리 모든 하임 친구들이 저 과부처럼, 어쩌면 별것 아니지만,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두 렙돈의 순종을 해내는 우리 친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 낮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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