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땅으로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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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예수님의 비유
마태복음 13장 1~9절, 19~23절
좋은 땅으로 사는 길
영국의 씨 에스 루이스가 쓴 책 중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이 있는데, 삼촌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어떻게 하면 악마로 성공할 수 있는지를 쓴 편지문의 형식입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영국의 한 노신사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기독교 서적 한 권을 읽게 되었고 거기에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맞아, 나도 이제 제대로 믿고 신앙생활을 해야지. 내 인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준비를 해야지.’ 그는 이런 도전을 받게 되고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인생 자체가 크게 바뀔 수 있는 이런 중요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는 사실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래,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그래서 그는 식당에 들어가 식사하기 시작합니다.
밥을 먹고 나니까 식곤증도 오고, 다시 생각해 보니 ‘인생이 다 거기서 거기인데 내가 무엇이 특별하다고 이 나이에 인생길을 바꾸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점심을 먹은 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버스를 타고 그냥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버스를 타고 가는 이 노신사 뒤에서 악마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단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대에 예배당을 채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일 아침 교회에 와서 예배하며 말씀을 듣다가 어떤 날은 특별히 말씀이 와닿습니다. ‘맞아, 나도 새로워져야겠다. 나도 이제는 정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봐야지.’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순간 예배가 끝나자마자 식사하며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마치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교회에 올 때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그런 나의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악마의 모습. 이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1. 문제 제기
오늘 본문의 비유를 가리켜 소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천국 비유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비유로 불립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당시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농경문화인데, 농부가 밭에 나가서 씨를 뿌리는 일과 파종 후 밭에서 수확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네 가지 다른 밭에 뿌려진 씨가 다른 결과를 낸 것을 서로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어떤 밭은 100배, 60배, 30배의 수확을 얻지만, 다른 세 밭에서는 한 톨의 수확도 얻지 못한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온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같은 사람이 같은 씨를 뿌렸는데도 네 가지 다른 토양이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 책임이 결국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본문 뒤에 나오는 구절들을 죽 읽어보면,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씨는 천국에 관한 말씀이며, 밭은 예수님이 선포한 천국 복음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 비유는 여러분도 이전에 한두 번 이상 설교를 통해 접해본 적이 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볼 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씨 뿌리는 자, 씨, 그리고 씨가 떨어진 밭 중에서 어느 한 가지만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비유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결실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다시 말해, ‘씨 뿌리는 자’와 ‘씨’와 ‘씨가 떨어진 땅’이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풍성한 결실을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결실하게 된 세 가지 이유
1) 씨 뿌리는 자의 자비로운 파종 (1~3절)
어떤 사람들은 본문의 씨 뿌리는 자의 모습을 보며 부주의하고 서툰 농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소중한 씨를 정성스럽게 뿌린 것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전혀 씨가 자랄 수 없는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사이에 아무렇게나 씨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엉뚱한 곳에 아까운 씨앗을 뿌려 낭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농부의 씨 뿌리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밭에 나가 계속해서 씨를 뿌리는 농부의 성실함에 집중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본문을 잘 보면,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고 씨가 떨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가 6번이나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뿌리다’ 또는 수동태로 ‘떨어지다’(뿌려지다)라고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3절)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4절)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5절)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7절)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8절)
‘씨 뿌리다’라는 동사가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 원어로 ‘스페이레인’인데, 이 동사의 반복적인 사용은 씨 뿌리는 자가 직접 씨를 밭에 뿌렸고 그 씨가 정확히 밭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씨를 뿌리는 자는 좋은 땅을 구별하여 거기에다만 제한적으로 씨를 뿌린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사이에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씨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농부는 모든 종류의 토양에 씨를 골고루 뿌려서 씨가 자랄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자가 씨를 골고루 뿌린 것은 자비에서 나온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 씨 뿌리는 자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씨 뿌리는 자로서 씨를 뿌리십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시작 부분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1 그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1-3절)
씨를 뿌리는 자로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의 씨앗을 뿌리시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와 무리를 향해 바닷가에 앉으십니다(1). 물 위에 떠 있는 배 위에 올라가서 땅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십니다. 수많은 무리가 가까이 다가와 천국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배에 올라가 앉으십니다(2). 그리고 당시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들으며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소재로 삼아 쉬운 비유로 천국에 관한 여러 가지 말씀을 가르치십니다(3).
씨를 뿌리는 자로서 예수님은 말씀의 씨앗을 뿌릴 대상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영접하기는커녕, 심하게 반대하면서 적개심을 품고 공격해 오는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기꺼이 천국 말씀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우리와 얼마나 다르십니까! 우리는 보통 재미있는 것을 하거나 누구를 만나 밥을 먹거나 할 때, 나를 싫어하고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을 불러다 식사를 대접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살짝 불러서 ‘너만 나와.’라고 하는 경우가 사실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까지도 말씀을 똑같이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집에서 나오셔서’ 많은 무리가 모일 수 있는 ‘해변에서’천국 말씀을 선포하셨고, 누구든지 그 말씀을 들으며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소재로 삼은 쉽고 평범한 이야기인 비유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100배의 결실을 할 수 있는 천국 말씀의 씨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뿌려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기회는 다 주어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도 가만히 보면 그런 것이 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똑같은 말씀이 전해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뭔가 흘리기는 흘리는데 침을 흘리며 졸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기는 흘리는데, 졸려서 하품하다 나오는 눈물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듣고 있는데 어떻게 이리도 반응이 다릅니까?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말씀을 듣지만, 사람마다 반응이 다릅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는 다 주어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2) 밭에 떨어진 씨 속에 담긴 풍성한 수확의 열매 (8절)
이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두 번째 열쇠는 밭에 떨어진 씨입니다.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이신데, 이 씨가 또 중요합니다. 어떤 씨를 농부가 밭에 뿌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농부가 뿌린 씨는 최상품의 좋은 씨앗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100배, 60배, 30배의 놀라운 결실을 했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8절)
물론 다른 세 땅(길가, 돌밭,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들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결과는 밭에 뿌려진 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선별적으로 구분하여 좋은 땅에만 좋은 씨를 뿌린 게 아니라, 모든 땅에 똑같은 종류의 씨, 즉 최상품의 씨를 뿌린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생명력과 잠재력을 가진 씨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19절)
이것을 보면, 이 씨는 바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이 천국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들에게는 이미 약속된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복된 선물이 담겨 있습니다.
이 천국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신분이나 지위나 소유와 관계없이 공평하게 선포되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은 풍성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뿌리신 천국 말씀의 씨앗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천국 백성이 거둘 수확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3) 풍성한 열매를 맺은 좋은 땅의 순종 (4~8절)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또 하나가 바로 네 가지 다른 땅들입니다. 땅이 다르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얼핏 생각해 보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은 애초에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결실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별로 책임이 없다고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토양의 상태가 아니라 밭에 뿌려진 씨에 대한 각 땅의 반응과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네 가지 다른 땅은 떨어진 씨를 받아들이는 다양한 반응과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 네 가지 땅들을 보면 씨를 점점 더 잘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주는 순서로 되어 있는데(길가-돌밭-가시떨기-좋은 땅), 그것은 어떤 땅이 천국 말씀인 씨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 땅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 땅들은 어떤 태도로 씨를 받아들였기에 저마다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까? 이 네 가지 땅들은 결국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땅이고, 다른 하나는 열매를 맺은 땅입니다. 결국 두 가지입니다. 앞의 세 땅은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좋은 땅만 결실했습니다.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두 가지 다른 종류의 땅은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천국이 임하였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그 말씀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두 가지의 다른 반응, 즉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거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19-23).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이 토양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4절)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19절)
‘길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녀 딱딱하게 굳어버린 길바닥처럼, 마음 문을 닫고 있어서 천국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꽉 막히고 닫힌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5-6절)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0-21절)
‘돌밭’은 천국 말씀을 듣고 즉시 기뻐했지만 믿음의 뿌리가 없어서 신앙 때문에 어려움이 오거나 손해를 보게 되면 쉽게 믿음을 떠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7절)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2절)
‘가시떨기’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아쉽게도 결국 결실하지 못하는 신앙인들을 가리킵니다.
길가는 믿는 사람이라고 보기가 힘들고, 돌밭은 믿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안 믿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시떨기는 확실하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열매를 못 맺는 사람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8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23절)
유일하게 ‘좋은 땅’은 떨어진 씨를 잘 자라게 해서 100배, 60배, 30배의 큰 수확을 거둡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인데, 깨달았다는 말 속에 깨달은 말씀대로 산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깨달아 말씀대로 살아서 좋은 열매를 맺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델을 보여줍니다.
좋은 땅이란 결국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자신 야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헌신하는 믿음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먼저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좋은 땅의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이 장차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는 기쁨을 누리는 주인공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놀라운 천국 백성의 복된 삶을 약속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약속하십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아니 영원은커녕 얼마 가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주시는 기쁨은 영원합니다. 천국의 기쁨입니다. 이것을 약속하십니다
3. 씨 뿌리는 자의 초대 (9절)
좋은 땅이 풍성한 결실을 거둔 이유는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씨 뿌리는 자의 자비로운 파종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또 밭에 뿌려진 씨 속에 이미 천국의 풍성한 열매가 담겨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땅이 그 씨앗을 받아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수용했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와 씨와 좋은 땅이 서로 협력하여 수고했기 때문에 천국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와 씨까지는 네 종류의 토양에게 똑같습니다. 씨 뿌리는 자는 뿌렸고 또 씨도 떨어졌습니다. 거기까지는 네 땅이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각 땅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이 천국 비유를 들은 자들을 천국 백성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좋은 땅이 결실한 것처럼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복된 인생의 길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예수님은 이미 모두에게 거저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기회를 받았습니다. 이 길은 100배의 결실이 보여주듯이, 처음과 마지막이 도저히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하나님 나라의 복과 은혜를 누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천국 비유를 들은 모든 사람에게 천국 백성이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그렇게 살라고 도전하십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가 아니라, 좋은 땅과 같이 천국 말씀의 씨앗을 잘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잘 자라게 해서 100배의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천국 백성이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 나라가 약속하는 은혜의 세계로 들어올 것을 강력하게 초청하십니다. 그것이 9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9절)
여기 귀가 없는 분이 계십니까? 귀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매주 설교를 듣지만, 예배가 끝나고 나가는 순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교회를 나가는 순간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지금 나의 삶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없지 않냐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산상설교(마태복음 7장)에서 결론적으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말씀을 들었느냐 안 들었느냐가 아니라, 말씀을 행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네 가지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땅만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땅이 저절로 좋은 땅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과 같은 땅이었습니다. 좋은 땅은 애초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척박한 땅을 삽으로 파고 곡괭이질을 하고 해서 갈아엎은 땅이 좋은 땅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수고가 들어가고 땀과 정성이 들어가서 만들어진 땅이 좋은 땅입니다. 그러고 나서 거기에 씨가 떨어지니까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서 신앙이 성장하기를 원하고 영적으로 잘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영적 불한당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듣고 행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일단 이렇게 듣는 게 중요합니다. 또 말씀을 묵상하고 자기 스스로 듣는 게 중요합니다. 그다음에는 행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좋은 땅이 되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행함으로 100배, 60배, 3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결실하는 2024년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