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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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Who가 아니라 What으로 묻고 있다. 아마도 요리문답에 깔린 접근법은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가(who), 즉 존재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알 수 없고, 그분의 속성(what)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식인듯 하다.
계시에 대한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 ‘유한은 무한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 쪽에서 알아낼 수 없고, 하나님 쪽에서 가르쳐 주실 때에만 알 수 있는, 그런 지식이다.
1. 무한하다: 그분은 존재론적 한계가 없다. 하나님의 존재가 충만하지 않은 어떤 장소, 구역 혹은 현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은 어디에나 계시고, 이는 하나님의 또다른 속성인 편재성과 통합된다.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 무한하시기 때문에, 또한 편재하신다.
부정의 방법- 무엇이 하나님이 아닌지를 묘사. 하나님은 유한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기준틀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유한성은 바로 우리 실존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는 시작과 끝나는 시점이 존재한다. 우리는 공간의 한계를 가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계와 한계 없이, 그의 존재에 있어 어디에나 계시고 항상 계신다.
반문: 이것은 범신론이 아닌가? 하나님의 존재가 무한하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아닌가?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들을 분명히 구별한다.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그들의 존재를 가진다. 우리의 존재는 제한적이고 유한하고, 하나님이라고 하는 무한한 존재에 의존적이다.
2. 영원하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다.
인과율: 모든 결과가 하나의 원인을 가진다면, 하나님도 원인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은 어떤 결과가 아니다. 그분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없다. 하나님은 자신 외에 다른 어떤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고,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영원 무궁토록 자존적이시다(I am who I am).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 존재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자존성: 자기 자신 안에 존재 혹은 실존을 가진다.
버트란트 러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 자신의 불신앙의 이유를 쓴 책
그는 십대까지 온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이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후 그는 존 스튜어트 밀의 책을 읽었다. 밀은 지금 존재하는 것의 현존으로부터 추론하는 신-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을 논박했다. 그 연역 추론은 모든 결과들은 앞서는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인과율에 기초하고 있다. 밀은, 모든 것이 선행하는 원인을 가져야 한다면 하나님 자신도 그와 마찬가지로 원인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하나님이 선행하는 원인을 가진다면 그분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 되고 만다. 러셀은 10대 후반에 이것을 읽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고전적인 논증이 그릇되었다고 판단했다. 러셀은 그것이 인과율에 대한 부적절한 정의에 기초해서 세워진 점을 깨닫지 못하고 죽기까지 그 입장을 고수했다.
인과율은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정의상 결과는 그 자신 이외의 어떤 것에 의해 초래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결과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자기 자신 안에 존재의 능력을 가진 자존적이고 영원한 존재에 대한 관념은 불합리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런 개념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어디에든 어떻게 해서든, 존재의 능력을 가진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자신 안에 스스로 존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자신 이외의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영원부터 존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리에게서 구별시키는 것이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을 제외하고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여러 잘못된 관념
먼 분으로 생각
불가지론-유한이 무한을 포착할 수 없다.
이신론(deism)-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후 기계적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셨다(시계태엽공)
무신론-신은 애초에 없었고, 눈에 보이는 것만 실제로 존재한다.
가까운 분으로 생각
다신론-그리스로마신화
범신론-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영화 아바타-she is real / 그레이스 박사)
하나님도 미움, 질투, 화 등의 감정을 느끼실까요?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여러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스스로 피조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내시는 것이다. 적응계시(accommodatio)
적응계시: 신이 계시하고자 하는 바를 사람의 능력에 맞게 자신을 축소하거나 맞추는 과정,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알리시는 것.
5문답: 하나님 한 분 외에, 하나님이 더 계신가요? /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십니다.
5문답: 하나님 한 분 외에, 하나님이 더 계신가요? /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십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이나 철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살아 있는 존재이다. 그는 상상하거나 고안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살아 있는 분으로 생명의 원천 자체이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 그분이 살아계시다는 것,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단언한다.
이러한 주장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절충된다. 신앙고백서가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게 배타성이다. 오직 참되신 한 분 하나님만이 존재하신다. 다른 신들은 신을 사칭하는 거짓된 우상들이다. 그래서 다른 신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한다(이사야 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6문답: 하나님의 신격에 몇 위가 계신가요? / 하나님의 신격에 삼위가 계시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고, 같은 본질과, 동등한 권능과 영광을 가지십니다.
6문답: 하나님의 신격에 몇 위가 계신가요? / 하나님의 신격에 삼위가 계시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고, 같은 본질과, 동등한 권능과 영광을 가지십니다.
“신성의 단일성 속에 삼위가 계시나니, 동일한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을 지니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시고, 아무에게서도 나시지 않으시며, 나오지도 않으신다. 성자는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동일본질(호모우시아): 본질도 같고, 속성도 같아. 삼위의 본질도 속성도 동일하다. 그러나 피조물은 본질 속에 속성이 포함.
위격: 하나님의 본질(essence) 안에서 실재(subsistence; 위격)를 갖는 존재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즉,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것은 서로 별개이지만, 동시에 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성부, 성자, 성령 즉 삼위로 계십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시고, 서로 간의 관계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것이다(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해설’ p237참조)
각각 구별되는 세 위격이지만, 한 본질이시며, 상호 관계와 사역에 있어서 동등한 힘과 동등한 영광을 가지신다. 다시 말하면 삼위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지만, 세 하나님이 아니요 한 하나님이시다.
성부-창조와 구속 계획
성자-구속의 성취
성령-구속의 적용
이러한 역할조차 따로 따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일하고 계신다. 단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창조와 구속이 시간과 공간 내에서 이루어질 때, 창조는 성부께 돌려지고, 구속은 성자께 돌려지고, 적용은 성령께 돌려진다. 이렇듯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 위격별로 독특한 사역이 있지만, 언제나 분리되지 않고 동시에 일하신다.
삼위일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
양자론(adoptionism):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사람인데, 세례 때 하나님의 아들로 승인되었다-삼위를 위해 일체를 희생(그리스도의 신성 부인)
양태론(modalism): 동일한 분이 가면을 바꾸듯 모습을 바꾸고 나타남-일체를 위해 삼위를 희생(그리스도의 인성 부인)
AD 325 니케아 회의 :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기독론)
-아리우스: 성부만이 유일한 하나님. 성부 이외의 모든 타자들은 피조물이요, 무에서 창조되었다.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유사본질
-니케아 신조: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
AD 381 콘스탄티노플 회의 : 성령론
-성령께서는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성령의 신성 고백.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 나는 한 분이신 전능한 성부 하나님을 믿는다. 그 분은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창조주이다. 그리고 나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 빛 중의 빛, 참 하나님 중에 참 하나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나신,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신 분을 믿는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만들어졌으며,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셨고,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성육신하셔서 사람이 되셨고,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통 받으사 묻히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고,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영광중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성령 하나님, 주시며 삶을 주시는 분이고, 성부와 성자로부터(filioque) 나오셨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분을 믿는다.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 교회에서 나는 죄의 사함을 위해 한 번의 세례를 받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몸의 부활을 고대하며 다시 올 세상을 기대한다. 아멘.
어거스틴- ‘위격’(휘포스타시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
당시 ‘휘소스타시스’는 ‘본질’(substantia)로 번역. 그러면 세 위격이 아니라 세 ‘본질’이 되고 만다. 이 단어의 원래 뜻인 ‘가면’(페르소나)로 번역되는 것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는 ‘위격’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지 않으려고 사용하지만, 의도하는 바를 바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면서 차라리 ‘관계’(relatio)로 번역하자고 제안한다. 즉, 아버지는 아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로,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아들이라고 불린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삼’위’란 그 자체로는 무엇이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분들이다. 모든 속성들은 ‘일체’에 귀속되지만, 관계로서의 위격은 하나님의 내적 생명이나 피조계와 연관되어 의미를 지닌다. 삼위는 거룩하다, 선하다, 영원하다고 할 수 있으나, 삼위를 성부라고 해서는 안 된다. 또 삼위를 성자라고 할 수 없는데, 자성이 다른 위격에다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 간에 본체론적, 또는 질적, 양적인 여하한 구분을 적용하지 않았다. 도리어 영원한 관계성을 도입했다. 한 하나님이 오직 성부이거나, 오직 성자이거나, 오직 성령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이셨고, 또 그러하실 것이다.
필리오케논쟁(filioque)
성부 하나님을 신성의 단원으로 보면,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셨다. 나아가 성령도 성부로부터 나오셨다고 해야 한다. 문제는 성자와 성령의 관계다. 성령께서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나오신다는 것이 동방교회의 입장, 서방교회는 ‘통하여’ 정도가 아니라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말하자면 성부의 위격은 단원적(성부)이지 않고 이원적(성부와 성자)인 셈이다.
원래 니케아 신경은 동방교회의 입장을 담고 있었다 - 아버지로부터 발출(필발, 날출; 비롯하여 나오다)된 성령-.
그런데 서방교회는 6세기경부터 필리오케를 삽입하여 고백했다. 589년 톨레도 회의에서 스페인 내 잔존해 있었던 아리우스를 경계할 의도로 서방교회가 라틴어로 ‘필리오케’를 추가하여 니케아 신경에 넣음
결국 1054년 동방과 서방교회는 분리되고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