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받게되는 하나님 나라(요 18:28-40)
Notes
Transcript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재판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곳을 오가면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은 언제나 정정당당하고 담대하게 일관적인 태도로 임하십니다. 반면에 고소하고 재판하는 자들은 우왕좌왕하면서 그들의 위선과 악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 심판을 하고 누가 심판을 당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먼저 오늘 본문 28절은 예수님께서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안나스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신 뒤 가야바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가야바에게 어떤 심문을 받으셨는지 나오지 않지만 빌라도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빌라도는 원래 예루살렘에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 로마 총독의 관저는 가이사랴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월절로 인해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모이는 관계로 빌라도는 잠시 예루살렘에 와 있을 뿐이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새벽에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갔는데요, 로마 관리들은 보통 아침 일찍 업무를 시작해서 가능한 일찍 모든 업무를 마치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의 일정을 고려해서 이렇게 일찍 새벽부터 예수님을 데리고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총독을 만나려면 관정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총독을 밖으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방인의 집 안으로 들어가면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되어서 유월절 잔치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결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악한 일을 행하려고 합니다. 조그마한 법은 지키려고 하고 더 큰 죄악은 거리낌 없이 행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통열히 비판하셨던 외식하는 모습을 여기서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관정에 들어가는 것은 안된다고 하면서 이방인은 또 만납니다. 보이는 형식을 지키면서 사람을 죽이려고 악한 일을 꾸미는 일은 또 괜찮다고 합니다.
우리 말에 똥묻은 개가 겨묻은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더 큰 결점이 있으면서 남의 작은 결점을 흉보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똥이 잔뜩 묻은 사람들이 아무 흠결이 없는 예수님을 잡아 가두고 심문하는 것도 모자라, 이방인과 접촉하지 말것을 가르치면서 이방인을 만나는, 그러면서 관정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위로를 삼는 말도 안되는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로남불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전에 어느 글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일수록 관대하지 않다는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만큼 하는데, 당신은 그렇지 못하니 쉽게 정죄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연수가 더하면서 겸손하고 낮아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남의 허물을 들춰내고 욕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 남의 허물만 바라보고 산다면 오늘 본문은 우리가 예수님을 잡아서 심문한 종교지도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을 비난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허물을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부족하다고 여기게 되면 상대방을 잘 비난하지 않게 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살아갈때에 교만하여 남의 허물을 들추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임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은 빌라도와 유대인 사이에 서로 ‘너희 법대로 하라’는 실랑이가 벌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유대 법대로 하라고 말하고,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로마 법대로 처단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평소에는 서로 적대관계로 자기들 법대로 하겠다고 떼를 쓰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두고는 서로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상대방의 법을 적용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떳떳하지 못하면 그러게 합니까? 더구나 유대인들은 오늘 본문에서 죄없으신 예수님에게 살인 강도에게나 해당되는 사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재판은 시작도 안했는데 그런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중에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결국 이익이 모든 것을 넘어섭니다. 사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는 총독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유대인들을 학대하고 학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제발로 찾아와 빌라도와 거래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는 말입니다. 언제까지나 우리의 곁에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이익을 쫓아 떠나고, 항상 옆에서 친구가 되어줄것이라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입니다. 오늘 본문의 빌라도와 유대인들은 바로 이런 세상의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의 현실과 반대로 가야 합니다. 예전에 목사님이 항상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의리가 있어야 한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합니다. 세상은 이익을 따라 움직이지만 우리는 의리를 따라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친한 사람들이 약해졌고, 힘이 떨어졌다고, 떠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관정에 들어간 빌라도는 예수님께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먼저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라면 살기위해서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말했을 것입니다. 한때 물의를 일으켰던 JMS 정명석은 법정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은 재림예수라 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고 합니다. 실컷 설교해놓고서 법정에서는 발뺌했습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나라가 유대에 한정되지 않고,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란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살기 위해서라면 분명 부정부터 하고 긍정을 말할텐데, 예수님은 긍정부터 하고 부정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려운 난국을 타계하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답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살고자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심문 후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유월절 전례에 따라서 예수님을 놓아주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살인자이며 강도인 바라바를 예수님 대신 놓아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라바보다 더 위험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즉 사회적으로는 바라바가 더 위험할지 몰라도, 예수님은 자기들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말도 안되는 외침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 중요한지 크게 보지 못하고 자기의 자그마한 유익을 위해서 사람을 음해하고 죽이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런 것은 악한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바르게 살기를 강조하고, 도덕적으로 살기를 강조하면서,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죽이는 극단적인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