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이 사람이로다(요 19:1-16)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2024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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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식으로 말하면 광복절에 해당됩니다. 광복절 특사나 사면처럼, 로마는 유대인들의 민심을 사기 위해 죄인 한 사람을 놓아주곤 했습니다. 여기 요한복음에 특별히 강도라고 소개된 바라바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명예로운 죄인이 아니라 파렴치범으로 소개되어 예수님과 더욱 대비가 됩니다. 누가보다오 바라바와 예수님을 놓고 보면 예수님을 선택할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흑과 백이 다른것처럼 명백한 대조가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제 살펴본것처럼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로우신 분이지만 사람들은 강도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의 아들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강도편입니다. 예수님은 소위 인기투표에서 바라바에게 못 미쳤습니다. 이것은 자유의 남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언제나 죄를 선택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선택은 결국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라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를 체험적으로 느꼈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바라바 입장에서 보면 그가 달릴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신 달리심으로, 그는 예수님 대신 살게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를 대신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다면 그는 오늘이면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바라바에게서 죽음을 가져가시고, 그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바라바와 같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생명을 나눠주시며, 우리를 의로운 자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까?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인들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그 자리에 우리가 있었다면 아마 우리도 유대인들과 똑같은 외침을 외쳤을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바라바와 같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변명한다하더라도 우리의 속 마음은 바라바보다 더한 죄를 수도 없이 짓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외식하던 종교지도자들과 별반 다름 없는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그런 죄악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바라바를 대신해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모습과 같습니다. 바라바와 같은 악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은 친히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누군가 여러분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면 여러분들은 그 은혜를 잊을 수 있을까요? 아마 평생가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다며 두고 두고 감사하고 기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신 죽어 준 것은 어떻습니까? 사람의 목숨과 바꿀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의 그 은혜는 정말 한량없는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도 이럴진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어 주셨다면 어떻습니까? 그 감동이 더 달라지지 않습니까? 그 모습을 봐도 황공해서 어쩔줄 모를 텐데, 그분이 우리가 무엇이라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셨다면 그 은혜를 우리는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생명을 주시고 의롭다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몸소 고생 당하신 예수님의 그 고난과 아픔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그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홍빛 같은 나의 죄를 위해서 친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그 희생과 아픔과 눈물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다시 한 번 회복하시고, 주님의 향한 열정을 회복하시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사이에 군인들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며 조롱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다시 군중들 앞에 데리고 나왔을때는 예수님의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아까 그 예수가 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처절한 모습을 사람들이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 줄 알았는지도 모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이렇게 때린 것으로 끝을 내려 한것처럼 보입니다. 빌라도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했다면 그렇게 매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그 하수인들은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합니다. 정말 잔인하고 완악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빌라도는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심문하며 자신에게 예수님의 생사여탈권이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말합니다. “나에게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말은 참 웃기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을 두려워하고, 비겁하며, 불의한 사람들과 한통속이 되어 불의를 행하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는 시류에 편승하여 여런 재판을 하고 대중에게 책임을 미루는 우유부단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하며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처단을 합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을 희생양 삼아 가이사에게 한건을 올리는 행색입니다. 유대인들은 가이사외에 는 왕이 없다고 소리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가이사가 자신들의 왕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가이사가 누구입니까? 유대를 침략해서 다스리는 원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끊임없이 유대인들을 약탈하고 빼앗아가며 조금만 대들어도 잔인하게 핍박하는 로마의 왕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심심하면 욕을 잔뜩 먹던 왕이었습니다. 그런 왕을 향해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한갓 자기가 보기에 아무 힘이 없이 끌려온 예수님을 향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십자가는 모순들이 모인 결정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죄악을 십자가로 해결하십니다.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의 사이의 벽을 예수님은 십자가로 허물어 버립십니다. 이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화해하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 한 가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서로 나뉘어서 분쟁하고 다투고 싸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모두 허셨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고 화평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적대하며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수와 같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서로를 향해 먼저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이어서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마디의 말에 상처 받을 수 있고, 하나의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아픔을 줄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서로 나뉘어져서 삿대질하고 싸우고 경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공동체가 아닙니다. 어쨋든 서로 사랑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라도 누군가와 마음이 틀어져 있다면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 미워하기 전에 그 사람이 우리 마음에 든일들도 많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 도움이 된 적도 많이 있지 않았습니까? 좋고 감사했던 일들을 떠올리게 되면 우리의 적대하는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뜨려지지 않을까요? 이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혹시라도 누구 때문에 마음이 다친 일이 있다면 여러분 마음을 내려 놓으시고 화해함으로 예수님의 그 십자가가 진정한 화해의 십자가가 되도록 하는 복된 고난주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바라바를 대신해서 죽으신 사건은 오늘 우리가 어떤 죄인이며 어떻게 죄용서를 받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큰 사랑에 감사하고 보답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화목케 하심을 기억하며 우리도 서로 사랑하고 하나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서로 사랑함으로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더욱 마음 깊이 새기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드립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이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고난주간 특별 새벽기도회 네째 날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하루를 경건하게 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오늘 들은 말씀처럼 우리가 바라바였음을 고백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일지 몰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우리였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심에 감사합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하여 죽어 주셨음을 우리가 기억하게 하여 주시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또한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해시킨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치게 한 사람들과 화해하는 참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주께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고난주간에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게 하여 주시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됨을 추구하는 우리 지세포제일교회 모든 권속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후원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터키에서, 카자스흐탄에서, 베트남에서, 필리핀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선교사님들 사역 하나하나마다 기름 부어 주셔서 우리나라가 그랬던것처럼 선교사님들을 통해 그 땅에 변화되고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주께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선교사 한 사람의 힘이 매우 연약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한 선교사님과 함께 하여 주셔서, 우리가 불가능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게 하여 주시고, 이를 통해 선교사님들의 사역의 지경이 더 넓어지고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영적인 부흥이 그 땅 가운데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후원하는 인천 번성교회와 하늘 영광교회를 축복하여 주셔서, 목사님들 가운데 건강을 더하여 주시고,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 땅을 복음화 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 각자 생업의 터전에서 일하며 나아갑니다. 주님께서 안전하게 지켜 주시고, 힘들때 새힘을 주셔서 주님 주신 힘으로 오늘도 하루를 잘 마무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이 많이 어렵고 힘들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성도들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여 주셔서, 오히려 어렵고 힘들때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간증할 수 있도록 주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붙들어 주실 주님을 의지하옵고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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