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곁에 있던 사람들(막 15:3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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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현진건이라는 소설가쓴 운수좋은날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어느 날, 인력거꾼 김 첨지에게 행운이 불어닥칩니다. 그는 아침 댓바람에 손님을 둘이나 태워 80전을 벌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며칠 전부터 앓아 누운 아내에게 그렇게도 원하던 설렁탕 국물을 사줄 수 있으리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를, 1원 50전으로 불러 세운 학생 손님까지 만났기 때문이다. 엄청난 행운에 신나게 인력거를 끌면서도 그는 아내 생각에 내심 마음이 켕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님 하나를 흥정하여 또 한차례 벌이를 한 후, 이 '기적'적인 벌이의 기쁨을 오래 간직하기 위하여 길가 선술집에 들렀습니다.
얼큰히 술이 오르자, 김첨지는 아내에 대한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 술주정을 하면서 미친 듯이 울고 웃습니다. 마침내 취기가 오른 김첨지는 설렁탕을 사들고 집에 들어왔는데, 집에 무서운 정적이 감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내의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이의 젖 빠는 소리만 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문을 왈칵 열고 들어간 김첨지는 아내를 향해 주야장천 누워만 있을 거냐면서 아내를 발로 찹니다.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자 달려들어 머리를 흔들며 아내를 향해 말을 하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러다가 흰 창이 검은 창을 덮은 눈을 보게 되자, 그는 닭똥같은 눈물을 흘립니다. 김첨지는 죽은 아내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벼대며 이렇게 중얼 거렸습니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이렇게 이야기는 마무리 됩니다.
김첨지는 정말 오랫만에 자신에게 찾아온 운수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정말 비통한 날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와 반대로 소위 정말로 재수 없는 날을 맞이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그는 구레네 사람으로서 시골에서 올라와 그곳을 지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두개의 기둥으로 구성됩니다. 이 당시 십자가의 가로 기둥은 라틴어로 ‘파티블룸’이라고 불렀고, 세로 기둥은 ‘스티펙스’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했을때, 완전히 조립된 십자가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들은 타피불룸 즉 가로 기둥만 지고 형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미 세워져 있는 세로 기둥에다가 끼워 맞췄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십자라기 보다는 영어모양 티자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로마 군병은 피지배국 사람에게 강제로 부역을 시킬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시몬은 구레네 사람이었습니다. 구레네는 오늘날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북동부에 위치했던 도시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밖에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유월절 절기가 되어 예루살렘에 찾아왔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그의 피부색이 검었을 것이고,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로마 군인의 눈에 띄었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시몬에게 있어서 이 날은 재수없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재수 없는 일 중에 제일 참기 어려운 일이 있다면 내가 걸리지 않기를 원하는 일에 뽑히는 일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이면 내가 걸려서 쪽팔리는 일을 해야 한다면 정말 재수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구레네 시몬에게 있어서 이 날은 정말 재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내가 잘못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면 얼마나 창피하고 재수 없는 일이겠습니까? 그런면에서 시몬에게 이 날은 정말로 재수 없던 날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시몬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마 십중팔구 골고다 언덕에 올라오기까지 불평하고 투덜거렸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요, 이것이 정말 그에게 있어서 나쁜 일이었을까요?
시몬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것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을 따르던 열두 제자들은 그곳 골고다 언덕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던 베드로 조차도 그곳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재수없게 그 자리에 뽑힌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십자가를 지도록 선택받은 시몬은 복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서 그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날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재수 없는 날이 아니라, 가장 재수 좋은 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를 예수님 대신 진 이 사람의 이름이 시몬이고 그가 구레네 출신인것을 알 수 있을까요? 뒤에 설명되는 두 아들의 이름이 이 의문을 풀게 해 줍니다. 마가가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또 마가복음을 읽는 독자에게 이 이름을 밝혔다는 사실은 이 두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은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당시 개종은 아버지가 믿으면 온 가족이 함께 믿는 형태였습니다. 두 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 시몬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시몬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재수없음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는 불평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며 그는 변화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을 직접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시몬에게 있어서 이 날은 가장 재수 없는 날이 아니라 가장 재수 좋은 날이었고, 하나님의 오묘한 은혜를 맛본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찾아온 고난과 시련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더 깊이 알게 되었다면 그 시련은 시련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간증들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정말 잘 나갔는데, 실패하고 주님께 돌아왔다! 건강이 갑자기 안좋아졌는데 이를 통해 다시금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회사에서 승승장구했는데,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져서 예수님을 만났다와 같은 간증 말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때로 우리에게 정말 재수 없는 날, 때로는 가장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우리에게 주님께 돌아올 수 잇는 양약이 될 수 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두번째로 백부장은 예수님이 숨지시는 것을 보고 “진실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로마 황제가 하나님으로 불리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백부장은 자신이 그동안 숭배해오던 황제가 아니라 바로 저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요? 39절은 분명하게 “그렇게 숨지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을 보고 이렇게 고백했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골고다 언덕에 있는 로마 백부장은 성전 휘장이 찢겨지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온 땅에 어둠이 임한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이 일을 통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친것과 마지막으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신 것을 통해, 백부장은 힘없이 처량하게 죽어가는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서 의연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신 후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평화롭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 영웅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로마인이 보기에도 굉장히 명예로운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이 명예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기억해 본다면 그의 이러한 평가는 꽤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첫번째 ‘사람’이 바로 이 로마 백부장이라는 점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거나 고백되는 경우는 네번인데요,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사람’ 가운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은 백부장 밖에 없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찬송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셨을때 참람하다고 하며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고, 예수님을 모독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놀라운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정치적 메시아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동안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한 로마 백부자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백부장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 봤을 뿐입니다.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습니다. 마가가 백부장이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라고 설명한 것 역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생생한 증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마가는 전하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볼 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오늘 본문 43절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사복음서에서 모두 등장하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아리마대는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가 살던 곳인 ‘라마다임소빔’과 동일한 지명으로 추측되며, 예루살렘으로부터는 북서쪽으로 약 32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이었는데, 공회원은 이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에 소속된 사람을 뜻합니다.
요셉이 이렇게 저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빌라도에게가서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할 수 잇었습니다. 한편 마태는 그가 부자였다고 소개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자신의 무덤을 갖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또 마태는 요셉을 예수님의 제자로 소개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산헤드린 공회 의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경우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유대인이 두려워 이 사실을 숨겼다고 말합니다.
또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칭찬을 받은 사람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물은 서기관과 아리마대 요셉 두 사람뿐입니다. 여기서 ‘기다리다’라는 말의 헬라어 의미는 ‘환영하다’, ‘맞아들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사모했으며, 그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예수님에게서 발견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은 해가 지기 전까지 처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부탁한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자칫 요셉되 예수님과 한통속으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세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제잗르은 모두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버리고 십자가의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십자가 현장까지 갔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좇는 사람을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요셉이야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부장
아리마대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