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주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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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난 종려주일에 들었던 말씀이 우리에게는 이 한주간을 담대함으로, 당당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한 주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으나,
우리에게 닥치는 많은 상황들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선포하며 이 한주간을 살아와보니,
결국엔 오늘도 예배하며 찬양하며 기도하며 이번 한 주간도 ‘은혜’였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영향권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누구보다 더욱 담대하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시험과 문제들도,
당황하지 않고,
‘그래! 이것이 나를 위해 준비해주신 일이지!’
‘그래! 하나님이 나에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을 내 앞에 주신 것이지’
라고 믿으며, 결정하고, 담대하게 이번 주간을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우리의 삶은 무엇이었습니까?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내 주변을, 그리고 우리의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하셨습니다.
마치 바울을 심문하던 아그립바왕이 변화시켜, 바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 가운데, 매일 새롭게 변화시켜주시는 삶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은혜의 순간들을 맛보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권 아래 새롭게 되는 기쁨으로,
이 한 주간을 살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해 이뤄지는 일들을 살펴보며,
말씀을 통해서 이뤄지는 기적의 일들을 말씀을 통해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빌라도 법정에 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 법정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웠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법정에 세운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행악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여기는 율법에 어긋나고, 자신들의 믿고 있는 신앙을 흔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다.
라고 하는 말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무리들에게 가버나움 회당에서 이런 말씀을 전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늘 말씀 요한복음 6 장에 보면,
구약의 모세를 이야기를 예화로 들으셨었는데,
모세가 광야에서 하늘의 만나를 받아 먹은 것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신 것이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과 무리들이 자신들에게도
광야같은 이 땅을 살아갈 생명의 떡을 달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었기에 굶어죽지 않고 광야 생활을 벗어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6:35 (NKRV)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너희들이 찾는 ‘생명의 떡’,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큰 혼란이 옵니다.
자신들이 율법에서 읽어오며 느껴왔던 메시야의 모습이
이런 모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상하게 여깁니다.
요한복음 6:40 (NKRV)
40 내 아버지의 뜻(하나님의 뜻)은 아들(나를!!!)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믿음과, 영생, 그리고 부활을 설명하시며
가버나움에서 마지막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것이 너희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나, 예수 그리스도를 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님 스스로 메시아임을 밝히시며, ‘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고,
죽음이 끝이 아닌, 영원한 생명,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어떤 두려움도 없이 당당하게 전했습니다.
그러자 모인 무리들과 유대인들은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모습에,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들은 무리들과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7:20 (NKRV)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예수 그리스도를 귀신 들렸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 가운데 생각해보면,
예수님처럼 등장하는 모습은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모습인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가 귀신에 들려 이런 행각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세운 질서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를 잡아서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대제사장 가야바를 거쳐서
빌라도 법정에 세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든 죄를 씌워서 죽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유대법으로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 pass——
요한복음 18:31 (NKRV)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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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에 고발하는 것입니다.
빌라도 법정에 끌려온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요한복음 18:37 (NKRV)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
그러나 빌라도 입장에서는 어떤 정치적인 영향을 받을만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어떤 법으로도, 어떤 죄 값을 치룰 내용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18:38에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19:4에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로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19:6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말하며,
유대인들과 함께온 무리들에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념에, 그리고 신앙에, 자신들이 믿어왔던 율법을 보더라도 이렇게 메시야가 등장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혼란의 상황을 가져온 예수님을,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함을 훼손하였기에,
지금의 말로 이야기하면, 신성모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의 손으로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을 그냥 죽일 순 없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끝까지 빌라도에게 요청합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우리 법대로하면 예수님은 그냥 죽을 목숨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저 자를 우리 법대로하면 그냥 죽을 목숨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유대법 아래 살아있는 사람을 합법적으로 사형시킬 수 있는 법이 없기 때문에, 로마법에서 사형시킬 수 있는 총독 빌라도에게 계속 요청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선택을 줍니다.
요한복음 19:10 (NKRV)
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이정도면 빌라도는 스스로 의지로 예수님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특별한 죄가 보이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맞춰서 죄를 씨우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어쩌면 예수님에게 듣고 싶은 대답이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잘못했다. 유대 사람들을 힘들게 했고, 그래서 이제는 안그러겠다.’
그렇게 말하면, 놓아 줄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번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힘듦,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표현하는 특별한 담대함으로 지금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9:11 (NKRV)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나의 상황, 내가 지금 이렇게 붙잡혀 있는 상황,
그리고 억지 죄로 엮겨서 모욕 당하고 있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 상황을 당황하지 않으시고, 분노하지 않으시고,
담대하게 맞이하는 것은,
바로,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이 상황을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이런 일도 없을 것인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하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공생에 기간동안
자신의 미래를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때 생각하며 힘들어하셨습니다.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마음의 갈등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드리며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렸습니다.
요한복음 15:25 (NKRV)
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고, 그것도 누군가의 아무 이유 없이, 예수님을 미워하였고,
그 예언은, 성경에 기록된 것이요. 성경 말씀대로 행하고자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렸습니다.
요한복음 18:32 (NKRV)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하나님 말씀에 기록된 대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에 이르게됩니다.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고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숨 거두시기 직전에,
요한복음 19:28 (NKRV)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예수님의 고난은 말씀의 성취이자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말씀대로, 그 말씀이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의 죄로부터의 해방을, 더 나아가서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기 위해서,
서두에서 살펴봤던 요한복음 말씀처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실리리라” (요한복음 6:40)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하기 위해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이루시기 위해,
결국 하나님이 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린 것입니다.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마치 지금의 상황을 언잖게 말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이루실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실 일이다.
이 땅에 온 백성을 위해서 이루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상황을 담대하게, 당당하게 임하리라!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주관적 다스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주관하시고 역사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임을 믿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우리의 모든 것,
‘위에서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모습, 여러분들의 상황,
‘위에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로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담대하게 십자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 앞에서, 함께 모인 무리들 앞에서,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까지…
당당하게 임하셨습니다.
‘위에서 주셨기 때문에, 위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담대히 받을 수 있습니다. 담대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이,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에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으로부터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영향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걷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위에서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난의 길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고난을 담대하게 받아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몸소 보인 믿음의 결과는 우리에게 부활의 역사, 구원의 역사, 영생의 길을 만드셨습니다.
이번 주간 고난 주간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고난 주간이 주는 의미는
‘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에 응하기 위해서 이 길을 걸었노라’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응하면,
부활의 역사, 구원의 역사, 영생의 길을 허락하십니다.
위에서 허락하신 은혜를 누리며, 담대하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
1.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의 상황, 나의 관계, 나의 환경속에서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를 매 삶 가운데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어떤 결정을 앞두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담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