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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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설교
#설교/성산청년부
반갑습니다. 성산 청년 여러분,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을 함께 봉독함으로 설교를 시작하기 원합니다. 함께교독하고, 마지막은 합독하겠습니다.
[사53:4-9]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ㅎㅎ 종려주일을 무엇이냐? 잠깐 설명하자면, 부활절 한 주 전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날을 기념하기 날이 종려주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TMI로 조금 덫붙이자면, 종려주일 이후에 교회가 지키는것이 고난주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예수님을 기억하는 주간으로 보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시간을 보내는 주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고난받은 왕”입니다.
왕!! 이라고하면 다들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조선시대 의 임금, 혹은 중국으로 넘어가면 황제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왕하면 딱 떠올리는 것이 절대권력,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그에 반하는 반역죄는 3대가 멸하는 형벌을 받을 정도로 왕의 권력은 막강했습니다.
이처럼 왕은 절대권력을 가지고,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에 있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여느왕처럼 군림하지 않고, 누구보다 낮아지셔서, 고난을 받으신 분이 계십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그 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본문은 이사야라는 구약의 선지자가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에게 복음(새언약)을 선포하는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에게 회복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이사야서에서 메시아 즉 구원자에 대한 예언을 자주합니다. 오늘 본문 또한 메시아에 대해서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사53:4-5, 새번역]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여기서 우리가 집중해서 볼 것은 "그" 와 "우리"입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나오는 "그"는 우리가 받을 고통을 대신 받고, 그는 우리가 당할 슬픔을 당하고, 그는 징벌을 받고, 고난을 당합니다. 그리고 또 그는 찔리고, 그는 상하고, 그는 징계를 받고 채찍을 맞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고통을 내어주고, 슬픔도 당하지도 않고, 우리의 허물과 죄악의 값을 받지 않으며, 오히려 평화를 누리게되고, 우리의 병 나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통을 대신 받는 건 무엇일까요. 우리가 실제로 겪는 고통과 슬픔을 직접 당하셨다는 것 입니다. 여기 본문으로 따지면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이 받아야할 슬픔과 고통을 "그"가 대신 받는 다는 말 입니다.
이 말을 지금 우리(에)게 적용해보겠습니다. 신약의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이 받을 고통과 슬픔을 모두 대신하여서 "그"가 대신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사소한 슬픔과 고통부터, 아주 커다란 슬픔과 고통까지말이지요. 우리는 삶 속에서 크고작은 고통과 슬픔을 겪습니다. 사소하게는 출근길 버스를 놓치는 일을 겪기도 하고, 회사 혹은 학교를 다니다 인간관계의 슬픔을 겪기도합니다. 맘에 안드는 상사가 있고, 맘에 안드는 동료가 있습니다. 또 조별과제 하는데 잘 안따라오는 애들, 나의 어떠한 능력만을 보고, 혹은 나의 외모나, 영향력을 보고 나의 인격을 보지 않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 때문에 아파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또 예를들면, 엄중하게는 죽음이 주는 고통이 있습니다. 가까운 가족의 죽음, 친구 혹은 지인의 죽음등은 우리 삶에서 큰 고통과 슬픔을 마주하게합니다.
우리는 인간관계 뿐 아니라, 수많은 곳곳에서 크고 작은 슬픔과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런 고통과 슬픔을 대신 짊어진자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뭡니까? 대신 짊어졌으니 우리게 그런 고통이 이제 없는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겪는 슬픔이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대신 겪은 슬픔과 고통은 우리가 겪였어야 할 "완전한 절망"입니다. 완전한 절망은 소망이 없습니다. 끝나지 않는 고통속에 영원히 사는 것이죠. 끔찍하겠죠. 사랑이 없고 나를 사람으로 조차 여겨주지 않고, 능력만 보는 곳, 죽음으로마저 끝나지 않는 끊임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것이 그가 대신 짊어진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런데 소망이 되는 것은 이런 “완전한 절망”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가 대신 겪었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한 절망 즉 영원한 죽음에 들어서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있겠지만 소망이 생기게 된것입니다.
인간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소망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망에 갇혀서 소망을 잃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우리가 겪는 고통을 이겨냅니다. 그리하여 때로는 인간관계에서 실패하지만, 그 실패가 영원한 실패가 아니요, 죽음으로서의 이별을 겪지만 영원한 이별이 아니게 되는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그”가 대신 고통을 당하시고, 그가 대신 슬픔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정리하자면 우리는 영원히 고통받아야했고, 소망이 없는 완정한 절망가운데 놓여야 했지만 우리를 대신한 “그”로 인해 우리는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사53:6-9, 새번역]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여기서 양이 나옵니다. 양의 특징은 눈이 어두워서 목자가 없이는 이동할 수 도 없고,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잘 살아갈 수 가 없습니다. 양은 멍청하고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자기주장은 정말 강한 동물입니다.
이런 모습이 인간인 우리와 정말 흡사해서 구약에서는 줄곧 양을 인간에 비유를 합니다.
이런 양과 같은 우리들이 자기가 가고자 하는 것을 끝까지 행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정작 혼자서 할 수있는 건 없는데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여김으로 주인의 말을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에 따른 댓가를 본인 스스로 지는 것이 아니라, 아까 고통과 슬픔을 가져가신 "그"에게 지운다고 말합니다.
"그"는 계속 자신이 잘못해서 굴욕을 당하거나, 자신이 잘못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댓가를 받은게 아니라, 자기주장이 강했던 이들의 죄의 댓가가 되어서 죽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앞에서 보았던 4-5절의 내용과 유사합니다.
자신의 죄를 위함이 아닌 양의 죄의 댓가를 대신 치루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본문속 “그”는 우리가 정말 많이 듣고, 배운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메시아 곧 구원자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이죠.
완전한 절망에서 소망을 주신 분, 자기주장이 강한 양을 위해 대신 죗값을 지불하신 그 분은 사실 "왕"이셨습니다.
절대권력중 진정한 절대권력을 가졌지만, 그 분은 그 힘으로 누군가를 강압적으로 다스리시기 위해서 오신 왕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는 왕과는 다르게 더욱 낮은 곳으로 가는 왕이셨고, 자신의 잘못도 아닌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의 잘못을 대신 짊어지는 왕이셨습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쥐면 자신의 유익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서비스를 받기를 원하고, 갑의 입장이 되고 싶어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 상대를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설교를 통해서 바라본 이 왕은 그 어떤 왕 보다 높은 분이시며, 결코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셔서 기꺼이 고통의 자리에 가시는 분이십니다.
왕이신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과 슬픔은 또한 실재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오셔서 직접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삼위의 하나님중 성자하나님 이신 분입니다. 이 성자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 이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때 성부하나님과 함께하셨고 함께 말씀으로 이 만물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무한한 분께서 유한한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삶을 직접 살아내셨다는 것은, 그분도 이 타락한 세상을 살아내시면서 직접 고통을 경험하셨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저 전능자 전지자가 고통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는 것을 뛰어넘어 직접 겪으시며 경험하시었기에, 우리의 고통을 실재적으로 공감하고 위로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위 말씀은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 더 있습니다. 정말 정말 하이라이트인 고통의 절정, 아니 어쩌면 고통이라는 단어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것도 정말 말도안되는 일이지만, 더욱 말도 안되는 일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오늘 본문이 말했듯 그가 우리의 모든 것을 대신해서 받은 심판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저주를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받으시는 것이죠. 아까 본문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원래는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우리였어야 합니다. 그 고통을 짊어지고, 그 슬픔에 그 징계아래 놓여야 하는 자는 바로 나여야 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니까요… 죄라고는 없으신 무오하신 분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우리가 지은 죄 우리가 지을죄 우리의 원죄를 모두 가져가셔서, 짊어지신 것이 십자가 입니다.
이성이라고는 모르셨던 분이 우리의 음란함 때문에 강간범이 되셨고, 거짓말이라는 것을 모르셨던 분이 우리의 유익 때문에 사기꾼이 되셨고, 시기, 질투라는 것을 모르셨던 분이 우리의 질투심때문에 살인자가 되신 사건이 바로 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는 그저 내 입으로 가볍게 부를 수 있는 사건이 전혀 아닙니다. 인간의 직관을 역설적으로 바꾸는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가 있었음으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알게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 사실이고, 이것이 사랑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결정과 헌신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너무 가볍게만, 혹은 너무 많이 들어서 고리타분한 내용이었습니까?
혹은 십자가는 나와 동떨어진 하나의 성경의 이야기는 아니였습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예수님의 처절한 희생이 담긴 우릴 향한 복된 소식입니다.
비유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매우 추운 겨울날 한 나그네가 먼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배가 고프고 추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친절한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면서 "내가 당신을 위해 맛있는 음식과 새 옷, 따뜻한 목욕물과 침대를 준비해두었으니 이 열쇠를 가지고 들어가서 씻고 음식을 드시고 주무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나그네가 "나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빵인데 이런 열쇠가 무슨 소용이입니까"라고 말하면서 열쇠를 내던지면 어떨까요? 사실 열쇠를 받으면 다 받는 것입니다. 열쇠를 거절하면 모든 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은혜와 새 생명의 비밀이 십자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나그네 처럼 내가 당장 바라는것이 아니니까, 그냥 무시하고, 갈 것입니까?. 아님 그와 반대로 그 열쇠를 들고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에 거하며, 그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아갈 것입니까?
왕이신 예수님은 완전한 절망을 죽이시고, 소망이 되신 분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양 같은 자신의 백성을 위해 기꺼이 댓가를 치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에게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고 크고 작은 삶의 고통가운데 있으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은 절망을 죽이시고 그러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여전히 양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다시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그러한 양을 사랑하셔서 모든 값을 대신 치르신 분이십니다.
우리 함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따분하고 나와 크게 상관없는 십자가가 아니라 나의 음란함, 욕심 시기 질투를 위해서 대신 지신 사랑의 십자가를 붙드길 소망합니다.
여호와께 돌아가자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길 원합니다.
공동체를 놓고 기도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양과같이, 자기 밖에 모르던 우리지만, 자신을 모두 내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교회를 또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길 소망하면서 기도하길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