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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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본문 : 약 2:17-18
2020-06-14
(약2:17)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
(약2:18) 참으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 네 행위가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 뿐 입니다.
여러분도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믿음으로 의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을 왜 이런 구원의 방법에 모순처럼 다가오는 것일까요?
행위를 보이라고 하고
행위가 없으면 그것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접근은 매우 합리적인 방법으로 제기되는 의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그 문제를 오늘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 믿음의 문제는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의문을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의 사람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 받게 된 것은
그가 선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그의 행실이 선했기 때문에 그를 의롭다하지 않으시고
그가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언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는 하나님이 받아주실만큼 의롭고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그 소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하늘나라에 갈 만큼 선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뿐입니다.
1.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고 구원을 받던가
2. 아니면 거절하고 자신의 죄값을 치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말씀 몇 구절 찾아 보겠습니다.
(롬4:3)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느니라.
(갈3:6)이것은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4:6) 이것은 또한 다윗이 행위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를 인정하시는 사람의 복된 일을 묘사하여
(요3:16) ¶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11장에는 구약의 의인들이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시편 32편과 시편 51편은 다윗이 죄인임과 하나님의 긍휼로 죄가 지워졌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의미와 행위로 믿음을 보여달라는 의미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로마서 4장에서 시작해서 그 의미를 풀어가기 보겠습니다.
(롬4:1)그러면 육체에 관한 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발견했다고 우리가 말하리요?
(롬4: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4:3)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느니라.
(롬4:4)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만일 내가 스스로 충분히 의로워서 하늘나라에 갔다면,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하늘에 스스로 왔으니 나는 하나님께 빚진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아주 훌륭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자랑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고백하고
주님이 아니고는 나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때문에 죽으시고 묻히시고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여겨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이전에는 가질 수 없었던 의로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아주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아브라함이 영원히 죽지 않을 영생을 얻게 만들어준 의의 문제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둘 사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창15:4)보라,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사람은 네 상속자가 아니요, 오직 네 배 속에서 나올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더라.
(창15:5)그분께서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아가 이르시되, 이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셀 수 있거든 세어 보라, 하시며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씨가 그와 같으리라, 하시니라.
(창15:6)아브람이 {주}를 믿으니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시고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주님이 하신 약속의 말을 믿은 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전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필요한
“의로움”이 그에게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뭔가 믿어야 할 뭔가를 말씀해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브라함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충분한
의로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제 네가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이제 선을 행할 수 있는
완전한 상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날 밤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둘 만의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날의 대화를 즐기고 있었던 사람도 하나님과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말씀하신 대상도 아브라함 한사람이고
아브라함에게 의롭다고 말씀해 주신 분도 하나님 한 분 뿐이셨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단 둘 사이에서 일어난 일 입니다.
그 대화에 그 어떤 다른 사람도 있지 않았습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 한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렇게 둘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마음으로 믿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 속 그 믿음을 보고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말씀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말씀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지
신약 성도인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믿어야 할 말씀은 복음이고 그 복음의 내용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시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고 그분을 여러분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면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어떤 교회를 다시든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던
여러분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직장에서든, 병원에서든, 길에서 든, 이 복음을 듣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게 된다면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과 여러분 개인의 관계에서 그 순간 확정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가 아닌 자신의 종인 하갈 사이에서 아기를 만들게 됩니다.
이런 방법이 사용되는 것은 주님 앞에 아주 나쁜 것입니다.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로 뭔가를 하는 것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의지로 도와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 하나님 경멸주의는 인간이 버리지 못하는 아주 나쁜 습관 중에 하나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해 주셨는데 아브라함은 믿음이 부족해서 이 말씀을 비웃기까지 합니다.
(창17:15)¶ [하나님]께서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로 말하건대 너는 그녀의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라. 그녀의 이름이 사라가 되리라.
(창17:16)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어 그녀로부터도 네게 아들을 주리라. 참으로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리니 그녀가 민족들의 어머니가 되고 백성의 왕들이 그녀에게서 나리라, 하시니라.
(창17:17)그때에 아브라함이 얼굴을 대고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인 사람에게 아이가 태어날 수 있으리오? 구십 세인 사라가 낳을 수 있으리오? 하고
창세기 18장에서 주님과 두 명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했고
아브라함은 그들을(그분의 능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창 20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머무는 곳의 주인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아내를 포기하고 다른사람에게 넘겨주기까지 합니다.
창 21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종인 하갈때문에 관계가 불편해지자
자신의 몸종 하갈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내쫓아 냅니다.
수십년가 아브라함의 삶은 처참한 상황에서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해서는 안될 일들을 계속하게 됩니다.
만약 하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인지를 묻는 다면 뭐라고 답할까요?
- 자신을 내쫓은 아브라함을 결코 좋게 이야기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의 부인인 사라에게
당신은 참 좋겠어요. 남편이 인물도 좋고 재산도 많고 거기다 믿음도 좋다고 하던데,
- 자신을 자기 살자고 다른 남자에게 팔아넘긴 남편을 ...?
만약 숙소의 주인에게
아브라함 저분 괜찮죠?
사회적 지위도 있으시고 재산도 있으신데, 교회도 잘 다닌다고 하던데..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인지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요?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인 아브라함을...?
-아마도 나는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나는 적어도 아브라함처럼 아내를 누이라고 속에서 다른 남자에게 팔아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 아마도 내가 저사람보다 백배 더 착하게 살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4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롬4: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그에게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만일 아브라람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의 삶은 앞에서 언급한 추악한 모습의 삶은 없었어야 합니다.
(롬4:3)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느니라.
아브라함의 삶은 아주 추악한 모습 그대로 지만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지 않는 아주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섰을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 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약속의 말을 했고, 너는 내 말을 믿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의로 여기겠다고 한 말과
너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한 내가 한 말을 지킬 것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이 내용을 서로 잘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섰을때
그 약속이 주어질 것을 소망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지켜 본 사람 중에
아브라함이 선한(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브라함 자신은 스스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든데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그사람이 지금 술취해 있고, 뭔가 불만으로 가득차서 분노하고 악한 말을 쏟아내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의 아내가 아닌 다른여자와 술마시고 히히덕거리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나는 초등학교때 구원받은 사람이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물론 그 사람이 초등학교때 구원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한들 여러분이 그것을 보고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고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런 상태에 있다면 차라리 구원받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여러분이 구원받은 사실을 말하면 오히려 여러분의 거룩하지 않은 상태 때문에 하나님이 비판 받고 모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 성경학교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데 여러분은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만 저에게 중요하지 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까지 고민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실이 물론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하지만 여러분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 사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구원받은 사실만을 가지고 살기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모습을 통해서 여러분의 주변사람들이 구원받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도 중요하게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느날 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싶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 것이 다른 사람도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만들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어떤 사람이 악마처럼 살면서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런 사람이 믿는 예수님을 믿고 싶으시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도 예수님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정말 지지리도 못나고, 못된 사람인가 보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저런 사람이 믿는 예수 알고 싶지도 않고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아브라함이 16장 부터 저질렀던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의 이웃이나 직장 동료가 알고 있다면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이 그들에게 좋게 여겨질 수 있을까요?
오히려 하나님을 욕먹이게 되지 않을까요?
만약 교회에서 “여러분의 드러나는 행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만 사랑한다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면 괜찮을까요?
구원받는 여러분의 삶이 세상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살고 있다면..
남편은 가장이라고 집에서 큰 소리만 치고,
아내에게 폭행과 폭언을 가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지 않고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 왔는데, 아내는 자식하고 다른 방에가서
자기 남편 험담을 늘어 놓으며 자녀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권위는 눈꼽만치도 가르치지 않고 살면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전하면
그들이 여러분의 삶을 알고 있는데 그 복음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구원받은 성도라고 선언했다면
주변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일정 수준의 기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을 만큼의 의로운자로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면 그런 사람처럼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그들도 그런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고 싶지 않을까요?
아브라함이 의로운 삶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가 영생을 얻게 된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영생을 얻게 된 것이 그의 삶이나 행위로 이루진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로 가보겠습니다.
(약2:14)내 형제들아, 사람이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위가 없으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느냐?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약2: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2:16)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떠나가라. 너희는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 하고는 몸에 필요한 그것들을 너희가 그들에게 주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느냐?
(약2:17)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
여러분이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여러분이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난 뒤에
나는 하나님을 믿는 다고 말로만 고백하는 것이 여러분의 결혼 생활에 무슨 유익을 줄 수 있나요?
여러분의 믿음의 고백으로 여러분의 우정에 유익을 줄 수 있나요?
여러분의 주변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나요?
여러분이 나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유익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여러분의 삶은 사탄의 삶과 다를게 없다면 여러분과 하나님을 향한 비판 말고 뭐가 유익할 수 있을까요?
(약2:18)참으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 네 행위가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느니라.
야고보서 2장은 로마서 4장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은 하나님께서 "네가 믿는 것을 내게 보여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게 드러내고 자신이 믿는 것을 하나님께 보여드린것입니다.
하나님은 "음~ 네가 믿는 것이 맞구나 네가 믿으니 너를 의롭다 여기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은세상 사람들이 구원 받은 성도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네가 믿는다고 하는 것을 내게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믿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나는 네 마음 속을 볼 수 없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라고 주장 한다면,
내가 그것을 볼 수 있게 그 믿음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당신이 기독교인인지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한다고 내가 하늘나라에 가거나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늘나라에 가지 못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이 교회에 오는 것을 망설이는 이유를
우리가 제공하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일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의 삶이 그들과 별다른 것이 없다면,
그들이 보기에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닌다면
그들이 보기에도 교회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과 별다를게 없이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다닌다면,
당신들이 아내나 남편을 무시하는 거나
내가 내 아내나 남편을 무시하는 거나 다른게 없다고 느끼게 만들고 있다면
과연 세상 사람들에게 나와 함께 주님을 믿는 신앙생활을하자고
말할 수 있으까요?
교회를 다닌 다는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 이외에
세상사람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면,
우리의 그런 삶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오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 주님앞에 부끄럽지 않으신가요?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으신가요?
세상 사람들이 내가 사는게 당신의 삶보다 더 나은것 같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면 부끄럽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굳지 우리 교회에 와야 할 이유를 느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술을 끊는다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나라 백성이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가 최소한 지켜야 할 삶의 기준이 있지 않을까요?
최소한 우리가 변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겁니다.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만큼의 기준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장 동료나 친구들이
성도인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약2:19)네가 한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믿으니 잘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마귀도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적어도 마귀보다는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결혼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자녀들도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육신의 자유를 만끽한다면서
육신적 욕망이나 채우고 돌아다닌다면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
마귀를 따르는 세상 사람들도
"나도 당신 만큼은 믿습니다"라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게될 상황이라면
여러분이나 세상 사람이나 다 마귀를 쫓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입술의 고백만 가지고
여러분 중에 누가 진정 구원을 받았고 누가 구원을 받지 않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느 목사가 멋진 설교를 한다고
그 사람이 진정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의 말의 꾸밈으로 속기도 합니다.
어떤 성도가 멋지게 간증을 한다고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감쪽같이 속을 수 있습니다.
TV속에 연애인들이 화면에 보여지는 모습은 멋지고
부부가 멋지게 사랑하고 잘 사는것 같이 보이는데
얼마 안있으면 이혼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말로만 듣거나 화면으로만 봐서 저사람이 진짜 잘사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말로 연기로 잘꾸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구원을 받았다면
그에 합당한 행위로 뭔가가 여러분에게서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을 알겠지만
다른 사람은 당신의 마음과 말을 확인해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삶이고 행실입니다.
세상은 구원받은 여러분에게서 뭔가 다른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약2:20)그러나, 오 허무한 사람아, 행위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
(약2: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드릴 때에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약2: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약2:23)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 하시는 성경 기록이 성취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느니라.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뭔가 하기를 요구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에게 너의 아들 보다 내가 더 우선순위에 있는 것을 보이라고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에 순종했고, 그의 순종의 행위는,
그의 아내가 보았고 그의 종들이 보았고, 그의 아들이 보았고, 그의 이웃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것은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이미 선언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들 둘 이외에는 이 믿음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일곱 장이 넘어가면서 아브라함은 순종의 행위를 했고
그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의가 전가되었다고 했고,
로마서 4장에서 의가 전가되었다고 했고,
야고보서에서 전가된 의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되었을때
그가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불렀다는 걸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5장에서도 그렇게 부르신 적이 없고
창세기 22장에서도 그렇게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눈으로 보고 난 후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언급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은 하나님의 관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른 형제 자매들이
여러분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보여주십시오!!
당신은 구원받으셨나요?
-네
당신은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계시나요?
-...
당신의 삶은 주님을 위해서 드려지고 있나요?
-...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성경에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 다 적혀있는데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요?
교회 스티커를 자동차에 붙여놓고 난폭운전을 하고
창문을 열고 다른 사람에게 폭언을 한다면
그런 모습을 본 사람에게 그 사람이 전도지를 나누어 준다면
그 사람이 교회 다시는 사람들을 어떻게 볼까요?
여러분이 구원받은 성도로서 거룩한 삶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면,
코로나19의 발생으로 많은 사람이 자기 주머니가 비어가는 것을 걱정할때
구원받은 성도는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가져가시는 분도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변함 없이 열심히 거룩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1. 세상 사람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친구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2. 더이상 술마시러 가자고 여러분에게 권하지도 않을 것이고
3. 더이상 여자를 끼고 술마시는 곳에 가지고 권하지 않을 것이고
4. 일요일에 여러분의 시간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5.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 하지 말았어야 하는 일 모두 모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에게
하나님은 죄를 싫어 하십니다. 정직하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도 거짓말 밥먹듯이 하던데.. 뭐”
하나님은 오직 주님 만이 경배 받으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높이시면 안됩니다.
“교회에서도 목사를 하나님 처럼 섬기고 목사 부인이 좌지우지 다 하던데”
하나님께서 술취하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전에 교회 장로 몇사람이 식당에서 맥주 마시는거 봤어…”
우리가 세상 사람으로부터 비판받지 않으려면
그에 합당한 행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의 삶을 보고…
낮은마음침례교회 사람들은 뭔가 다른거 같은데…
하나님은 잘 모르지만,
그 사람들 하는거 보면 하나님이 있긴 있나봐!
저 교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귀찮아 하는 것도 먼저가서 수고하고 도와
회사에서도 일을 시키면 누구보다 열심히 해서 회사에서 인정받는데…
(약2: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드릴 때에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약2: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약2:23)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창세기15장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시는 성경 기록이 성취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느니라.
"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느니라."
의로 인정하신 것은 창세기 15장이지만 친구라 불리게 된 것은
역대하 20장 이사야 41장에 가서야 불리게 됩니다.
(대하20:7) 주는 우리의 하나님 곧 전에 이 땅의 거주민들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이 땅을 주의 친구 아브라함의 씨에게 영원히 주신 분이 아니니이까?
(사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씨야,
창세기 22장 10절로 가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잠깐 요약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만나서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이 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내가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99세가 되어서야 첫 아들을 갖게 됩니다.
아내는 89세가 되어서 첫 번째 아기를 낳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그 나이에 일어 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아이가 이삭입니다.
하나님은 이 아이를 통해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와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네 아들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치기를 원한다”
“나는 그 아이를 죽음에서 일으킬 것이다”
이제 이 이야기를 그의 아내에게 설명하고
그의 종들에게 설명하고
주변 동료에게 설명하고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그가 받은 믿음의 말씀대로
그 아이를 제단에 눕혀 놓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칼을 손에 들고 아들을 죽이려 하자
주의 천사가 그 손을 멈추라고 합니다.
이제 알았다고 합니다.
이제 그의 믿음은 하나님만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창22:10)자기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더니
(창22:11){주}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므로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22:12)그가 이르되, 네 손을 그 아이에게 대지 말라. 너는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곧 네 유일한 아들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내가 이제 아노라, 하니라.
"이제 아노라/Now I know”
(창22:13)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보라, 뿔이 덤불에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자기 뒤에 있으므로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자기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 헌물로 드렸더라.
원래는 이삭이 죽임을 당해야 한느데 그를 죽음에서 건져내시고 이삭은 죽음에서 옮겨놓고
이삭 대신에 양이 번제 헌물로 드려졌습니다.
이 양은 예수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모든 죄인을 사망에서 옮겨 놓으시고 예수님이 대신 죽으시는 장면을 예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22:14)아브라함이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이 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 하느니라.
"{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 하느니라."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를 본 사람이 누구일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창세기 16장-21장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를 본 사람이 누구일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를 본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보았습니다. 집에 있던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보았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와우~ 아브라함은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구나!
저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니 그의 믿음이 정말 대단하구나!
여러분들은 모두 성령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입으로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과정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친구나 가족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당신이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것을 믿나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 이외에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음을 믿으십니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따르고 그분을 당신의 구원자로 믿으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나중에 말고 지금 그 부르심에 응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글쎄요.. 그게.. 음… 나중에… 제 가족중에 절에 나가시는 분이 계셔서… 제 가족중에 성당에 나가시는 분이 계셔서…”
그럼 사람들은 이런 저런 변명을 합니다.
오늘 밤 여러분이 이불 속에서 무릎을 꿇고 주님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죄에서 구원해 줄 것을 구하면 하나님이 곧바로 여러분을 구원해 주십니다.
더이상 사망과 지옥이 여러분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주십니다.
구원은 아주 간단하고 쉽게 이루어집니다.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이후에 여러분의 일상은
어제와 다를게 없는 일과가 반복됩니다.
여러분이 직장에서 짜증을 내고 일합니다.
여러분의 짜증과 거친 표현과 격한 감정으로 주변 사람이 상처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동료와 직상 상사나 사장의 뒷담화를 늘어 놓고 욕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하루를 보내던 여러분의 구원의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을 번제 헌물로 드리려고 했던 것은
그일이 그가 보기에 옳은 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가 하기를 원하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일을 순종으로 행하고 난 뒤에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뭔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주변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서 보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요구했던 비밀스러운 기도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통해서 변화된 그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비밀스러운 곳에서 하나님과 가졌던 기도의 순간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제공해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친척이나 직장 동료들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분의 변화된 삶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된 삶이 여러분을 구원받게 만들거나
구원을 유지키거나 하는 일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변화된 삶이 드러나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진다면
그 변화로 인해서 당신의 변화된 삶을 보는 사람들의 혼이
구원받을 수 있게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로 인해 그들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저 마귀와 같은 삶을 사는 또다른 그리스도인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교회와 세상에 이미 충분한 피해를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만 있는 교회는 이미 충분히 있습니다.
설교는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별로 민감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하고 싶은데로 하면서 교회를 다닙니다.
말씀이 하지 말라는 것을 불편하지 않게 마구 해댑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을 때 혼자 하나님께 매일 회개만 합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오늘도 부끄러운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사람은 여러분이 혼자 기도하는 모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여러분이 저지르는 비성경적이고
어리석고 악한 행동들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2장에서 그가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사람들”에 의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온전하게 이루고자하는
구원의 그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구원이 가져올 완전한 그림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통해 완전하게 이루고자하는 그림은
여러분을 칭의로 구원하는 것과
의롭게 된 여러분이 그리고 의를 행할 수 있게 된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의로움을 선함을 인정받게 되는 것을 포함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선함을 스스로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끊임 없인 완전해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선함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인정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식당을 차렸는데 스스로 맛집이라고 써붙인다고
여러분의 가게가 맛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와서 먹어보고 맛집이라고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맛집을 추천하려면 가서 먹어보고 추천해야
다른 사람이 설득력 있게 들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은 결코 우리의 구원과 모순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일대일 관계 속에서
여러분의 구원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교회에 참석해서 주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주 안에 형제 자매된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알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거룩하지 않은 삶때문에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데 걸림돌이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교회와 하나님을 비판하고 모독받게 해서는 안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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