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붙잡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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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약속을 붙잡는 믿음
본문 : 고후 1:20
2020-03-08
(고후1:20)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분 안에서 예가 되고 그분 안에서 아멘이 되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느니라.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약속은 예가 될 수 없습니다. 그분 안에 있지 않은 약속에 아멘을 하면 안됩니다.
아무 말에나 “아멘!!”
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약속에 근거한 믿음 생활이 되어야 하고 기도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약속되지 않은 것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은 의미 없는 신앙생활이 됩니다.
약속되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붙잡고 행하는 것은 무의미한 종교생활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구하는 것이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를 아는 것이 효과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입니다.
목사가 한 약속을 하나님이 한 약속으로 믿으면 안됩니다.
성경을 보지 않고 게으르게 신앙생활을 해서 속으면 자신이 속은 것입니다.
약속
약속은 하나님이 하실때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때 그 약속은 믿을만한 것입니다.
사람의 약속은 언제 변할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붙잡아야 할 것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셔서 한 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민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분께서 이르셨은즉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요?
(롬3:4)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참으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지어다. 이것은 기록된바, 이로써 주께서 주의 말씀하신 것에서 의롭게 되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시리이다, 함과 같으니라.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는 주님의 말씀으로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심판하실 때 주님께서 이기실 것입니다.”(쉬운성경)
하나님은 우리의 지략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순수하게 단순하게 믿고 순종하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요구하고 계십니다.
약속하시는 분은 하나님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하겠다고 선언하시면 그것이 약속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이 약속을 붙잡고 순종하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질때 주님과 함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훈련을 계속 시키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붙잡은 약속
아브라함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고향을 떠나는 결심을 하고 행동을 옮깁니다.
하늘로부터 온 주님의 음성에 순종한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나온 음성을 듣고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창12:1) 그런데 전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12:2) 내가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 네가 복이 되리라.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더라.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이것이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 새끼 손가락을 걸고 같이 하는 약속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약속을 말씀대로 순종하고 지키면 주님이 제시한 약속을 다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100% 순종을 잘 하지 않아서 한 번에 갈 길을 몇 십번 돌아서 가게 만드는 일을 계속 합니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아 훗날 상속 재산으로 받게 될 곳으로 나가면서 순종하였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으며
(창12:4) 이처럼 아브람이 주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떠나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은 롯을 데려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부분 때문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낭비해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창12:5)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와 자기 조카 롯과 하란에서 그들이 모은 그들의 모든 소유와 또 그들이 얻은 혼들을 데리고 가니라.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긴 했지만 롯의 식솔과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롯과 갈라선 후 가나안 땅을 확정짓게 됩니다.
(창13:18) 그때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기고 가서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평야에 거하며 거기서 주께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라함은 약속에따라 자신에게 주신 것에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올바로 알고 주님을 섬긴다면 우리는 그분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것을 받았을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길가다 예쁜 여자 한 명 꼬시고 감사합니다. 그러고
고돌이 치다 돈따고 주님 감사합니다.
이런 경배와 찬양을 드리면 안됩니다.
주님이 주신 약속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 이야기로 가보겠습니다.
“여호수아”라고 하면 떠오르는 첫 인상은 강한 군대와 장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여호수아를 본받자는 찬송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위인전을 기록해서 사람을 본받도록 한 책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를 본받아야 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초점이 있는 책이 아닙니다.
가나안 = 천국 이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가나안이 천국이라면 전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가나안에서의 전쟁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순종해야 하는지는 배우게 되는 과정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이미 주시기로 한 땅입니다.
그러나 그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과 들어가서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 얻게 되는 기쁨과 승리는 순종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규칙을 어기면 실패의 쓴 맛을 봐야하고 정직하지 못하면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가나안은 인간의 힘으로 점령해서 얻을 수 있는 땅이 아니라 순종으로 얻을 수 있는 땅입니다.
(수1:1) 이제 주의 종 모세가 죽은 뒤에 주께서 모세의 섬기는 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모세는 건강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신34:7) ¶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가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어둡지 아니하였고 타고난 힘이 줄지 아니하였더라.
모세는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의 임무를 마쳐야 했던 것입니다.
(민20:2) 회중을 위한 물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함께 모여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니라.
(민20: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고 이 악한 곳으로 데려왔느냐? 이곳에는 씨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또한 마실 물도 없도다, 하니라.
여러분이 구원을 받고 세상과 결별하고 홍해를 건너며 죽음의 침례를 지나고 나면 여러분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광야로 나온 것입니다.
세상에서 즐기던 즐거움, 여러분이 우상처럼 여겼던 모든 문명의 이기로 부터 여러분이 거룩하게 분리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훈련의 장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분의 일하심을 발견하는 사람은 영적인 눈이 뜨이는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광야에서 불평불만만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민20:7) ¶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민20:8) 너는 막대기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더불어 집회를 함께 모으고 너희는 그들의 눈앞에서 반석에게 말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물을 내리니 너는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그들에게 주어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게 할지니라, 하시니
(민20:9) 모세가 그분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주 앞에서 막대기를 취하니라.
(민20:10) 모세와 아론이 반석 앞으로 회중을 함께 모으고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반역자들아, 이제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야만 하랴? 하고
(민20:11) 모세가 손을 들어 그 막대기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풍성히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20:12) ¶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서 나를 거룩히 구별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므로 너희는(모세와 아론)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가나안 점령을 코 앞에 두고 모세가 죽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입장에서는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참모로서 모세가 백성들일 이끄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가까이서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수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것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을 모든 곳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나니
Every place that the sole of your foot shall tread upon, that have I given unto you, as I said unto Moses.
시제가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주었다고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통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완성형 시제의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출3:7) ¶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난을 분명히 보았고 또 그들이 그들의 작업 감독들로 인하여 부르짖는 것을 들었나니 내가 그들의 고통을 아노라.
¶ And the LORD said, I have surely seen the affliction of my people which are in Egypt, and have heard their cry by reason of their taskmasters; for I know their sorrows;
“보고”, “듣고”, “알고”
하나님께서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이들을 살피고 계심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이들을 400년이 지난 이제야 구출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출2:23) ¶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이집트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속박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속박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그들의 소리가 올라와 하나님께 이르니라.
그들의 기도가 상달되어 들으셨기 때문일까요?
물론 기도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응답받을 수 있었던 더 근본 원인은 다른데 있습니다.
다음 절입니다.
(출2:24) 하나님께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듣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따라 행하고 계시는 것을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때에 맞추어서 이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했기때문에 구출해 주신 것이라는 것에만 초첨이 되어 있으면 정확한 이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구출해 주시는 것입니다.
(수1:8) 너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밤낮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모든 것에 따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네 길을 형통하게 하며 또한 크게 성공하리라.
율법 책은 하나님이 선언하신 약속의 책입니다.
이 약속들을 되새기고 그 약속에 따라 행하고 기도하는 것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가나안도 약속으로 주어지는 땅입니다.
인간이 전략을 세워서 총과 칼로 싸워서 빼앗는 땅이 아닙니다.
약속을 붙잡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주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영적 싸움에 임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것을 믿고 영적 싸움에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약속 주님도 잊지 않으셨죠?
저는 그 약속만 믿고 갑니다!!!
느헤미야의 기도
느헤미야는 포로로 끌려간 타국에서 이스라엘 고향소식을 묻고 접하게 됩니다.
(느1:3) 그들이 내게 이르되, 포로로 사로잡힘을 면하고 거기에 남아 있는 남은 자들이 그 지방에서 큰 고통과 치욕을 당하며 또한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벽의 문들은 불탔나이다, 하니라.
이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느1:8) 간청하건대 전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옵소서. 이르시기를, 만일 너희가 죄를 지으면 내가 너희를 민족들 가운데로 널리 흩으리라.
(느1:9)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내게로 돌아와 내 명령들을 지키고 행하면 너희 중에서 하늘 맨 끝 지역에까지 쫓겨난 자들이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내가 택한 곳으로, 거기로 데려오리라, 하셨나이다.
느헤미야는 지금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이 하신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밑도 끝도 없이 막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가게 해 주세요! 왜?
취업하게 해 주세요! 왜?
병 낫게 해 주세요! 왜?
(느1:10) 이제 이들은 주께서 주의 크신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느1:11) 오 주여, 간청하건대 이제 귀를 기울이사 주의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기 원하는 주의 종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원하건대 이 날 주의 종을 형통하게 하사 이 사람의 눈앞에서 주의 종에게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하였나니 나는 왕의 잔을 드는 자였느니라.
애국심 일반화 오류
느헤미야가 자기 민족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해서
오늘날 신약 성도들이 자기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애국주의적 기도를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느헤미야의 기도를 그런식으로 적용하면 안됩니다.
히브리 민족을 하나님의 택함받은 민족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성취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애국주의로 적용하면 안됩니다.
신약 성도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국가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것도 교회의 모임을 폐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고 교회가 잃어버린 혼을 구하는데 국가로부터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대한 민국이 세계를 제패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든지,
일본이나 중국을 이기게해달라고 기도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성경의 약속에 없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복음화의 성시가 되게 해달라는 식의 기도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가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와 성도가 모두 해야 할 일이지 대한민국이 독점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약교회에 주어진 약속은 무엇이 있을까요?
(눅12:8) 내가 또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시인하려니와
(눅12:9)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신약의 약속은 나를 시인하면 나도 너희를 시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인정하면 나도 너를 인정해서 너희를 죄로부터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구한 것은 무엇인가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약속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드린 것입니다.
(시22:30) 한 씨가 그분을 섬기리니 주께서 그것을 한 세대로 여기시리라.
(시22:31) 그들이 와서 앞으로 태어날 한 백성(people)에게 그분의 의를 밝히 드러내되 그분께서 이것을 행하셨음을 드러내리로다.
예수님은 이미 약속된 한 백성 즉 교회를 탄생 시키기 위해서 십자가로 향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하고 구원받은 사람만으로 한 백성(민족)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누가복음
(눅22:41) 그들에게서 물러나 돌을 던지면 닿을 수 있는 곳으로 가사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눅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결국 예수님의 죽음으로 교회라는 한 백성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 교회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 죄인임을 인정하고
- 죄의 댓가가 사망이고 죽음 뒤에 심판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 회개하고,
- 복음을 받아들이고
-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 그러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고
-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여기에
- 구원받은 날짜를 알아야 구원을 받은 것이라거나
- 영접기도를 해야 구원을 받은 것이라던가
- 우리 마음에 레마의 말씀이 주어져야 구원이라든가
- 물침례를 받아야 구원이라든가?
성경에 주지 않은 약속을 만들어서 구원의 과정을 왜곡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특히 영접기도는 구원의 과정에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례도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간에 개인적인 문제로
강제로 영접기도를 시켜서 구원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약속하심
(요14:15)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명령들을 지키라.
주님이 명령하면 우리는 받드시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명령을 지키는 것이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할 터인즉 그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그분께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시리니
성령님께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고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믿으셔야 합니다. 기록된 약속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님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받았다면 성령님을 받은 것입니다.
(요14:17) 곧 진리의 영이시라.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나니 이는 세상이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아나니 이는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진리의 영이 들어와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은, 거듭난 사람은
(요14:18) 내가 너희를 위로 없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내가 살아 있으므로 너희도 살리라.
세상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이 없고 우리들에게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보게되고 그분과 함께 살게 됩니다.
성령님은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너희가 알리라.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우리는 아버지 안에 비로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요14:6)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종교를 통해서도 다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교리는 마귀의 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것은 마귀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위로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살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님을 무시하고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16절에 우리와 영원토록 항상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영원토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히 이루어지는 영존하는 삶에서 까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요일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이 증언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그분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었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주신 증언을 그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요일5:11) 또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니라.
만약 누군가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고
지금도 나를 보고 계시고, 내 이야기를 듣고 계시고, 내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고 계시는 주님께 기도하고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엡1:3)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으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물질적인 복은 약속하신 것 처럼 말한다면 “예”라고 하면 안됩니다.
“아멘”이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즉 신약성도들에게 해 주신 약속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일3:22)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것을 그분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고 그분의 눈앞에서 기쁨이 되는 그 일들을 행하기 때문이라.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것을 그분에게서 받나니”
아무거나 구하면 하나님이 다 주시는 걸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나머지 문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구하는 이것이 그분의 눈 앞에서 기쁨이 되는 일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분의 기쁨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행하고 그 가운데 필요한 것을 구한다면 주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안주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주님은 사실 기뻐하지 않는 일이라면 주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방법은 우리 안에 주님의 말씀이 거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보면 볼 수록 명쾌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 거한 다는 것이 무슨 신비한 영적 체험이 아니라 내가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나를 통해서 작동될때 나는 주님 안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주님께 구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합당한 것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히10:25)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되 그 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지금 국가를 위해서 기도하고 코로나19의 질병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면 바로 주님이 주신 말씀(히10:25)의 말씀을 붙들고
국가가 안정을 찾아서 교회의 모임이 폐하는 일이 없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