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합의 믿음
Notes
Transcript
설교제목 : 라합의 믿음
설교본문 : 히 11:31
2020-03-01
본문
(히11:31)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받아들이고 믿지 아니한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라합의 이야기는 여호수아 2장에 등장합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서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서 정탐꾼을 보내는 이야기와 함께 전개되는 이야기 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탐꾼(스파이)을 보내는 장면은
성경에 두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서 12명의 정탐군을 보낼 때였고
두 번째는 지금 여리고를 엿보게 하기 위해서가 두 번째 입니다.
두 경우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탐의 동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바란 광야에서의 정탐
민수기 13장에서 각 지파별로 한 명씩을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합니다.
(민13:1)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민13:2) 너는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 너희는 그들의 조상들의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곧 그들 가운데서 치리자를 한 사람씩 보내라, 하시니라.
그래서 지파별로 1명씩 12명을 가나안으로 보내서 정탐을 하게 합니다.
40일간 정탐을 하고 돌아온 이들은 보고를 합니다.
12명 중에 10명이 가나안이 땅이 좋긴 좋은데 거인들이 거하고 강한 민족이라 우리가 그 백성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만이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보고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의 표적과 이적들을 보면서 모든 체험을 했지만 이들은 오히려 옛 생활, 즉 노예생활 때를 그리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민14:1) 이에 온 회중이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그 밤에 울었더라.
(민14:2)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오늘날 기독교내 신자들이 체험을 아무리 많이 했다고해도 이집트에서 벌어진 10가지 재앙을 포함해 홍해를 건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받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를 채우는 체험을 한 이스라엘보다 더 한 체험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곧바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들이 보여준 믿음과 우리가 오늘 살펴볼 라합의 믿음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14:3) 어찌하여 주께서는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와 칼에 쓰러지게 하는가? 우리의 아내와 자녀들이 탈취물이 되리니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가족을 걱정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잠시 후에 보게 될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가족을 사지로 몰아 넣었습니다.
(민14:4) 서로 이르되, 우리가 대장 한 명을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하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이 원하는 대장을 세워 그를 따르려고 합니다.
잠시 후에 보게 될 라합은 자신의 국가 대장인 왕을 버리고 하나님을 대장으로 따르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민14:5) 그때에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집회 앞에서 얼굴을 대고 엎드리니라.
(민14:6) ¶ 그 땅을 탐지한 자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 옷을 찢고
(민14:7) 이스라엘 자손의 온 무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매우 좋은 땅이니라.
(민14:8) 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이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주께서 이 일을 기뻐하시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정해진 일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그분을 기쁘게하는 상태에 있어야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하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자 두 사람과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분의 때에 맞게 진행 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에 달려 있는 영적 싸움의 여정입니다.
신약 성도들은 이 땅에서 가나안의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얻게되는 신앙 성장의 여정입니다.
가나안의 풍요로움에 눈뜨지 못하고 구원받기 이전의 삶을 그리워한다면 이런 사람은 광야에서 다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로 살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훈련받은 내용은 말씀을 듣고 말씀을 붙잡는 훈련과 제사를 드리는 훈련 만을 받았을 뿐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순종하는 훈련을 받을 준비를 한 것입니다.
(민14:9) 오직 너희는 주를 대적하여 반역하지 말며 또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양식이니라(they are bread for us). 그들의 방어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신약 성도들이 해야 할 것도 주를 대적하지 말아야 할 것과
이 땅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민14: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매 주의 영광이 회중의 성막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 앞에 나타나니라.
성경대로 올바로 행하려고하면 신앙이 미숙한 사람들이 올바로 행하려고 하는 사람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사람을 높이지 말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목사의 부인을 특별한 호칭으로 부르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이 돌로 치려고 합니다.
웃기는 짜장이라고 하는 분들도 계시기도 합니다.
(민14:11) ¶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격노하게 하려 하느냐? 내가 그들 가운데서 보여 준 모든 표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아니하려 하느냐?
(민14:12) 내가 역병으로 그들을 쳐서 그들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너로부터 그들보다 더 크고 강한 민족을 만들리라, 하시니라.
열 두 정탐군을 보낸 동기는 불신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뱉어 내는 말을 보면 이들은 이미 마음 속에 가득찬 불평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이집트로부터 구원을 받았지만 이집트에서의 쾌락과 즐거움을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집트에 있었을때 이들은 노예였고 그들이 보고 멋있어 했던 것들은 자신의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쾌락이라는 것은 허무한 즐거움 입니다.
자기것도 아닌데 마치 자기 것이 될 것같은 생각에 쾌락의 기대치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예생활을 더 가치있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강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넌 민족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표적과 이적이 더 필요했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과 정탐꾼 12명중 10명의 부정적인 보고때문에 이들은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는 고난을 겪어야 했고
믿음의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게 됩니다.
여호수아 정탐꾼
반면에 여호수아의 정탐군은 전략적 선택인 측면이 있습니다.
엿보려는 임무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지만 전략을 세우기 위해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그 전략 안에는 라합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하는 하나님의 전략도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과 섭리가 작동한 정탐인 측면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을 만남
이러한 유사한 하나님의 섭리는 신약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로 반드시 가야한다고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요4:4)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하겠으므로 And he must needs go through Samaria.
동사가 “must”입니다.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지가 표현된 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이 땅을 통과해야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땅은 앗수르가 점령한 후에 혼혈 정책으로 타민족과 혼혈된 사람들입니다.
혼혈이 되었다는 것은 그냥 이방 여자나 남자를 데려온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두 민족의 종교가 합쳐진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사마리아 땅은 유대인들이게 경멸의 대상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갈 수 없어서 그들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따로 두고 제사를 드렸을 정도로 유대인들과 섞이지 못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땅에 예수님이 의지를 가지고 지나가야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의도한 계획이었습니다.
그 장면으로 계속 가보겠습니다.
(요4:7)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 길으러 오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마실 물을 내게 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4:8) (이는 그분의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도시로 갔기 때문이더라.)
이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과 단 둘이 마주있는 상황을 만드신것 같습니다.
이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얼마나 떨렸을까요?
그리고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 가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기회는 항상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 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찾아가지 않으십니다.
(요4:9) 그때에 사마리아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어찌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시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이 여인의 상태는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낮은자세를 취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실까요?
강한 손으로 물리치십니다.
(벧전5:5) 너희 젊은 사람들아, 이와 같이 장로에게 복종하고 참으로 너희가 다 서로에게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5:6)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정하신 때에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끌어안을 준비를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향해서 손을 내밀어 안을 준비를 하십니다.
(요4:25)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분이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분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리이다, 하매
(요4:26)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네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요4:27) ¶ 이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와서 그분께서 그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으나 아무도,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녀와 말씀하시나이까? 하고 말하지 아니하더라.
(요4:28) 그때에 여자가 자기의 물 항아리를 버려두고 자기 길로 가서 도시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하되,
베드로와 형제 안드레도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을 따를때 자신의 손에 잡고 있던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내가 하던 일을 다 하고 주님을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던 일을 다 버리고 주님이 주님의 말씀이 가장 우선 순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4:20) 그들(베드로 안드레)이 즉시 자기들의 그물들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르니라.
(요4:29) 와서 지금까지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보라. 이분은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4:30) 이에 그들이 도시에서 나와 그분께로 오더라.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와서 자신이 메시아이고 그리스도라고 직접 알려주신 사건입니다.
이 여인이 무엇이 다른 사람과 달라서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 일이 생긴 걸까요?
이 여인은 메시아의 등장에 관한 소식을 들었고 그 소식을 듣기만하지 않고 믿음의 소망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자신이 겸손함을 잃지 않고 낮은 자세를 취하자 주님이 찾아 오셨고 그 여인을 생명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들었던 소식, 메시아의 등장을 들은 사람은 이 여인 뿐이었을까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믿음으로 간직한 사람은 많지 않은 것입니다.
여호수아 2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수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은밀히 정탐하려고 시팀에서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는 이름의 창녀의 집에 들어가 거기 머물더라.
우리는 외 이 정탐꾼들이 창녀 라합의 집에 들어 갔는지 알수 없습니다.
성경도 이 부분에 긴 설명을 할애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여인을 만난 일에 더 관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신분을 정확히 집고 있습니다.
그냥 라합도 아니고 창녀 라합이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용실 라합도 아니고, 양장점 라합도 아니고, 창녀 라합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몸을 파는 여자입니다.
이 여인은 율법에 허락되지 않는 죄를 지어서 먹고사는 여자입니다.
이 여인이 이 전쟁에서 본인과 가족이 구원을 받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여러분이 죄인이기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녀인 여인도 전쟁에서 육적 생명을 구원받았을 뿐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세대안에 들어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수2:2) 어떤 이가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보소서, 오늘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 몇 사람이 지역을 탐지하러 여기로 왔나이다, 하거늘
(수2: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이 온 지역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하매
여리고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는 상대가 안되는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전문 군인들이 아닙니다.
여리고 군대는 잘 훈련된 군대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생활을 하면서 예배드리고 제사드리는 훈련만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스파이가 들어왔다는 소식은 여리고성 사람들을 술렁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여호수아 2장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을 보면 정탐꾼이라는 등장인물을 사용해서 이야기가 전개되기는 하지만 이야기가 급속하게 라합이라는 인물로 집중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정탐꾼 즉 스파이로 여리고에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금방 들킨것도
이상하고 앞뒤 정황없이 군대가 라합의 집으로 바로 찾아간 것으로 봐서
나머지 이야기는 전개의 중심에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는 전적으로 라합을 위한 이야기로 구성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2: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데려다 숨기고는 이같이 이르되,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수2:5) 어두워서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그 사람들이 나갔으니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급히 그들을 추격하라. 너희가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니라.
(수2:6) 그러나 그녀가 이미 그들을 집의 지붕으로 데리고 올라가 자기가 이미 지붕에 가지런히 쌓아 놓은 아마 줄기로 그들을 숨겼더라.
지금 기생의 행동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0년간 광야를 떠돌던 오합지졸의 사람입니다.
이들이 여리고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라합은 이들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라합은 자신의 국가에 배반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을 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란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세운 모세를 버리고 자신들이 대장을 따로 세워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소리쳤던 것과 비교해 보면 대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군인들이 들이 닥치는 상황은 참으로 두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따돌리고 정탐군을 숨겨주는 것입니다.
다윗이 작은 돌을 들고 골리앗 앞에 서는 것과도 같은 상황입니다.
(수2:7) 그 사람들은 요르단에 이르는 길로 여울까지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그들을 추격하는 자들이 나가매 그들이 곧 성문을 닫았더라.
(수2:8) ¶ 그들이 눕기 전에 그녀가 지붕에 올라가 그들에게 이르러
(수2:9) 그 사람들에게 말하되, 주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너희의 두려움이 우리에게 임하였고 또 이 땅의 모든 거주민이 너희로 인하여 기력을 잃었나니
(비교)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보여준 믿음과 비교해 보기
(삼상17:46) 이 날 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게서 네 머리를 취하고 또 이 날 블레셋 사람들 군대의 사체를 공중의 날짐승들과 땅의 들짐승들에게 주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온 땅이 알게 하겠고
(삼상17:47) 또 주께서 칼이나 창으로 구원하지 아니하심을 이 모인 온 무리가 알게 하리라. 전쟁은 주께 속한 것인즉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시리라, 하니라.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잘 믿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고백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이방 여인이고 창녀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아주 미천한 여인의 고백입니다.
신명기로가서 하나님께서 앞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신2:24) ¶ 너희는 일어나 이동하여 아르논 강을 건너라. 보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족속 시혼과 그의 땅을 네 손에 주었은즉 그와 전쟁하며 싸워 그 땅을 소유하기 시작하라.
(신2:25) 이 날 내가 온 하늘 아래 민족들로 하여금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소문을 듣고 떨며 너로 인하여 고통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고 불신의 세월을 40년간 광야에서 보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생여인을 통해서 이 약속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 약속을 어떻게 믿고 있었을까요?
이 여인은 이스라엘 공동체도 아니었습니다.
10절에 답이 있습니다.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수2:10)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주께서 너희를 위해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르단 저편에 있던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진멸한 일을 우리가 들었노라.
(수2:11) 우리가 이 일들에 관하여 들을 때에 곧 우리 마음이 녹았고 또 너희로 인하여 어떤 사람에게도 더 이상 용기가 남지 아니하였나니 주 너희 하나님 즉 그분은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 하나님이시니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롬10:17)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
여러분도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 복음을 들었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식을 들음으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들은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솔로몬이 구한 지혜는 잘 듣는 마음과 귀를 구한 것입니다.
라합이 들었다면 가나안 땅 사람들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듣는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에대한 소문은 많은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라합 이 여인에게만 임합니다.
라합은 도와준 댓가로 자신과 가족의 구원의 손길을 청합니다.
바란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이집트로 돌아가려 했던 것과 비교가 됩니다.
(수2:12) 그러므로 이제 청하건대 내가 너희에게 친절을 베풀었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 집에 친절을 베풀 것을 주를 두고 내게 맹세하며 내게 참된 증표를 주고
(수2:13) 또 내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과 자매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자를 살려 두며 우리의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 내라, 하니
(수2:14) 그 사람들이 그녀에게 응답하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아니하면 우리 생명으로 너희 생명을 대신할 것이요, 주께서 우리에게 그 땅을 주실 때에 우리가 친절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접하리라, 하매
(수2:18) 보라,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너는 우리를 달아 내린 창에 주홍색 실로 된 이 줄을 매어 두고 네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과 네 아버지의 온 집안을 네 집으로 데려오라.
주홍색 실
출12장에서 피의 색을 붉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세서 세 군데에서 주홍색 실이 사용됩니다.
1. 성막을 지을때
성막을 만들라고 설계도를 모세에게 주실때
주홍색 실을 넣어서 성막을 연결하여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이 성막은 온전하게 지어질 성전의 모형이고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성막을 만들때 반드시 주홍색 실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출26:1) 또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아마 실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로 짠 열 개의 앙장으로 만들며 정교한 솜씨로 만든 그룹들을 수놓아 앙장들을 만들지니
(출26:2) 한 앙장의 길이는 이십팔 큐빗이요, 한 앙장의 너비는 사 큐빗이며 앙장들이 각각 한 치수를 갖게 할지니라.
(출26:3) 또 다섯 앙장을 서로 함께 연결하고 또 다른 다섯 앙장을 서로 연결하며
2. 제사장 옷을 만들때
제사장 옷을 만드는데 주홍색 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잇습니다.
(출28:5) 그들은 금실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고운 아마 실을 취할지니라.
(출28:6) ¶ 그들이 정교한 솜씨로 금실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가늘게 꼰 아마 실로 에봇을 만들되
(출28:7) 에봇의 두 어깨 조각을 에봇의 양 끝에 연결하여 이로써 그것이 같이 연결되게 할지니라.
3. 나병환자가 나았을때
레위기 14장
(레14:48) 그 집을 회반죽으로 바른 뒤에 제사장이 와서 그 집을 살펴보니, 보라, 그 병이 그 집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병이 나았은즉 제사장은 그 집을 정결하다고 선언할 것이요,
(레14:49) 그는 그 집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주홍색 실과 우슬초를 취하고
(레14:50) 그 새들 중 한 마리를 흐르는 물 위에서 질그릇 안에서 잡고
(레14:51) 백향목과 우슬초와 주홍색 실과 살아 있는 새를 가져다가 죽인 새의 피와 흐르는 물에 그것들을 담가 그 집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
(레14:52) 그는 새의 피와 흐르는 물과 살아 있는 새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주홍색 실로 그 집을 정결하게 하되
(레14:53) 그 살아 있는 새는 도시 밖의 빈 들판에 놓아주어 그 집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그리하면 그 집이 정결하게 되리라.
(레14:54) 이것은 온갖 종류의 나병에 관한 법으로서 곧 버짐과
(레14:55) 의복의 나병과 집의 나병과
(레14:56) 종기와 딱지와 반점이
(레14:57) 언제는 부정하고 언제는 정결한지 가르치기 위한 것이니 곧 나병에 관한 법이 이러하니라.
구약에서 나병이 가진 상징은 죄인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다른 모든 병은 의사에게 보이도록 되어있지만
유일하게 나병만큼은 제사장에게 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병환자와 같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오실 예수님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수2: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나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무죄하리라. 누가 너와 함께 집에 있든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가 우리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수2:20) 만일 네가 우리의 이 일을 입 밖에 내면 네가 우리로 하여금 서약하게 한 맹세에서 우리가 벗어나리라, 하니
(수2:21) 그녀가 이르되, 너희 말대로 되리라, 하고는 그들을 보내어 떠나가게 하고 주홍색 줄을 창에 매어 두니라.
라합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오합지졸의 히브리 민족의 정탐꾼의 약속을 믿고 주홍색 줄을 창밖으로 내리고 기다리는 심정은 보통사람 같으면 조마조마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마 라합의 믿음은 담대했을 것 같습니다.
6장에 가서야 드디어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는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전쟁이 일반전쟁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그래도 한 번 보겠습니다.
(수6: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으로 소리를 내지도 말고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마침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고 하는 날이 오면 그때에 너희가 외칠지니라, 하니라.
(수6:11) 이와 같이 주의 궤가 그 도시를 한 번 돌고 에워싼 뒤에 그들이 진영으로 돌아와 진영에 머무니라.
(수6:12) ¶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매 제사장들이 주의 궤를 메니라.
(수6:13) 일곱 명의 제사장은 주의 궤 앞에서 숫양의 뿔 나팔 일곱 개를 들고 계속해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사람들은 그들 앞에서 가며 후위대는 주의 궤 뒤에 가고 제사장들은 가면서 나팔을 불었더라.
(수6:14) 둘째 날에도 그들이 도시를 한 번 에워싸고 진영에 돌아왔으며 그들이 엿새 동안을 이와 같이 행하니라.
(수6:15) 일곱째 날에 그들이 날이 샐 무렵에 일찍 일어나 같은 방식으로 도시를 일곱 번 에워쌌는데 그 날에만 그들이 도시를 일곱 번 에워쌌더라.
(수6: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주께서 도시를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수6:17) ¶ 도시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주께 저주를 받을 터이나 오직 창녀 라합과 그녀와 함께 집에 있는 모든 자는 살리니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녀가 숨겼느니라.
…
(수6:20)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매 백성이 그렇게 외치니라.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납작하게 무너져 내리므로 백성이 각각 곧장 자기 앞으로 나아가 도시로 올라가 도시를 점령하고
(수6:21) 도시 안에 있던 모든 것을 진멸하되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과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진멸하니라.
(수6:22) 그러나 여호수아가 그 지역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창녀의 집에 들어가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녀와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을 데리고 나오라, 하매
(수6:23) 정탐한 청년들이 들어가 라합과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과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을 데리고 나오고 그녀의 모든 친족을 데리고 나와서 이스라엘 진영 밖에 두니라.
(수6:24) 그들이 도시와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을 불로 태웠으나 다만 은과 금 그리고 놋과 쇠 기구들은 주의 집의 보고에 두었더라.
(수6:25) 여호수아가 창녀 라합과 그녀의 아버지 집안과 그녀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려 두었으므로 그녀가 이 날까지 이스라엘 안에 거하나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그녀가 숨겼기 때문이더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돌고 마지막에 나팔을 불고 크게 외치니 모든 성벽이 납작하게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의 집에 주홍색 줄이 늘어뜨려 내려진 벽은 무너지지 않은 것입니다.
라합의 믿음은 오직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에대한 철저한 믿음입니다.
국가에대한 충성보다 더 위에 있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의 종교적 신념, 정치적 이념 신념, 도덕적 신념,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그런 개념의 수준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 앞에 납작 엎드려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낮추고 자신에게 담겨있는 지식을 꺼내서 하나님과 담논하는 교만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창녀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교만한자에게는 구원을 주시지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을 더 높이는 자를 구원해 주시지 않습니다.
구원 받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는 자, 교만한 자는 광야에서 맴돌다 생을 마감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을 하는 것보다 그들에게는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교만으로 전쟁에서 이길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는 자는 겸손한 자입니다.
겸손자의 믿음만이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찾아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는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히11:31)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받아들이고 믿지 아니한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약2:25) 또한 이와 같이 창녀 라합이 사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다른 길로 보냈을 때에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수6:25 “이 날까지”는 문자적으로는 여호수아가 기록된 시점을 말하기도 하겠지만 영적으로 적용하면 라합은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와 영원한 생명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라합이 구원을 받고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가는 것 , 이것이 구원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통해 이방인에게까지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