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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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죽음의 의미
본문 : 롬 5:12
2020-07-26
(롬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우리가 죽음을 말할때 영적인 죽음과 육적인 죽임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적으로 올바른 정의는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표현은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표현입니다.
육신적인 죽음이 따로 있고 영적인 죽임이 따로 있다는 논리는 성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두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입니다.
1. 죽음은 죄의 삯으로 옵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나"
사망은 죄의 댓가로 주어진 것입니다.
죄의 댓가는 죽음으로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는 말씀은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2. 죽음을 이길 권능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전8:8) 영을 다스리는 권능이 있어 영을 머무르게 할 사람이 없고 죽는 날에 권능을 가진 사람도 없으며 그 전쟁에서는 면제받는 것도 없나니 사악함도 자기에게 넘겨진 자들을 건져 내지 못하리로다.
죄는 어떤 사람보다도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음을 이길 권능이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압도할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가능한 것입니다.
(요10:17)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내 생명을 다시 취하려고 그것을 내놓기 때문이라.
(요10:18) 아무도 그것을 내게서 빼앗지 아니하며 내가 스스로 그것을 버리노라. 내게는 그것을 버릴 권능도 있고 그것을 다시 취할 권능도 있노라. 나는 이 명령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생명을 취하거나 버릴 권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의 능력을 넘서서는 분이십니다.
(신24:16) 자녀들로 인하여 아버지들을 죽이지 말며 아버지들로 인하여 자녀들을 죽이지 말라. 각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내 죄는 나를 향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죄는 여러분에게 향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죄는 아버지를 향하고 아들의 죄는 아들 자신을 향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물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하25:4) 그들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고 모세의 책에 있는 법에 기록된 대로 행하였더라. 거기서 {주}께서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들로 인하여 아버지들을 죽이지 말며 아버지들로 인하여 자녀들을 죽이지 말라. 오직 각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죽는다고 할때 무엇이 죽는 것일까요?
(롬7:24)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오늘 구원받으셨나요?
(롬8:9)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분의 사람이 아니니라.
(롬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해 죽었으나 성령은 의로 인해 생명이 되시느니라.
여러분이 오늘 구원을 받으셨다면 여러분 안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이 들어와 계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구원은 받았지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의 몸은 여전히 사망이 지배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이미 죽음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자마자 우리의 몸은 죽음으로 향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첫째 사망은 우리의 몸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행5:5) 아나니야가 이 말을 듣고 쓰러져 숨을 거두매 이 일들을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이 임하더라.
(행5:10) 이에 즉시 그녀가 그의 발 앞에 쓰러져 숨을 거두니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그녀가 죽은 것을 보고 그녀를 들고 나가서 그녀의 남편 곁에 묻으니
위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은 그들의 몸이 영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들의 몸은 병들거나 사고로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 있던 영이 그들의 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19:3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식초를 받으신 뒤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신 뒤 숨을 거두시니라.(gave up the ghost)
(요19:40) 그때에 그들이 예수님의 몸을 가져다가 유대인들이 장사지내는 방식대로 그 향품들과 함께 아마포에 쌌더라.
(요19:41) 그런데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었고 그 동산 안에는 결코 사람을 둔 적이 없는 새 돌무덤이 있더라.
(요19:42) 그러므로 그들이 유대인들의 예비일로 인해 예수님을 거기에 두니 이는 그 돌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더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결코 짓지 않으셨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삯으로 죽음을 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일은 "영을 내어드렸습니다./ gave up the ghost"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예수님의 몸을 떠나면서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육신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으로 나누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죽음에서 영이 몸을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이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나타나고 영적으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눅23:46) ¶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는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시니라.
영이 아버지께 돌아가고 몸이 무덤에 묻히는 것이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디모데 전서 5장에서
(딤전5:6) 쾌락에 빠져 사는 여자는 살아 있으나 죽었느니라.
성경은 성경적인 삶을 살지않고 죄를 쫓아 사는 여자에게 살아 있으나 죽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죽었다는 의미가 육체적인 의미로 말하고 있지 않고 있고 영적인 의미로 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쾌락에 빠져 사는 것은 육신적인 현상만도 아니고 영적인 현상만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어떤 경우에도 죽음이 삶의 끝이라고 언급한 곳은 없습니다.
존재의 끝이라고 된 곳도 없습니다.
사라지고 없어진다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여러가지의 경우를 올려 놓고 말씀을 탐구해 볼 것입니다.
(창2:7)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창1:27)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호흡을 넣었더니 살아있는 혼이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몸이 있지만 호흡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몸에다 하나님의 호흡 즉 영을 불어 넣으시니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들었고 여자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드시는 것을 멈추시고 둘 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남성이 하나님의 형상일까요? 아니면 여성이 하나님의 형상일까요?
“형상”이라는 의미를 육체적 모양에만 한정한다면 하나님의 속성을 올바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살전5:23)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께서 나를 보존해 주신다고 할때 “나”는 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만도 아니고 혼만도 아닙니다. 영, 혼, 몸 모두가 함께일때 “나”입니다.
하늘 어딘가에 여러분은 혼만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여러분이 아닙니다.
장례식장에 놓여 있는 여러분의 몸은 온전한 여러분이 아닙니다.
영 혼 육이 함께 어우러 졌을때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고 나입니다.
(요일5:7)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거울에 보이는 여러분의 모습은 온전한 여러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여러분의 몸일 뿐입니다.
그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무언가가 함께 들어가 있는 내가 바로 나입니다.
(창1:26) ¶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단수)께서 우리가(복수)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 세분이 함께하는 형상으로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한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졌다면
동일한 삼위일체의 형상이 우리에게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몸만 있다면 아들 하나님만 계신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그냥 영으로만 되어 있다면 성령 하나님만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영, 혼, 몸이 다 있고 하나님도 세 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거울에 보이는 나는 몸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지금 교회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영과 혼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내 영은 이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고 내 혼은 그 말씀을 받아들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죽음은 성경적으로 몸과 혼과 영의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죽음은 그 어느 것의 끝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전3:18) 내가 내 마음속으로 사람들의 아들들의 상태에 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드러내시리니 이것은 자기들이 짐승임을 그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3:19)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일어나는 것이 짐승들에게 일어나나니 곧 한 가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나느니라. 이것이 죽는 것 같이 저것도 죽나니 참으로 그들이 다 한 숨을 가졌도다. 그러므로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날 것이 없나니 이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기 때문이로다.
(전3:20) 모두가 한 곳으로 가나니 모두가 흙에서 나와 모두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거니와
(전3:21)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누가 알리요?
(전3:22) ...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내가 깨닫노니 ...
전도서는 계속 "해 아래"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저자가 해 아래 서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짐승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짐승이 죽고 영이 떠나고 몸이 땅에 묻히는 것이 사람과 별다른게 없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인간이나 짐승이나 똑같다고 본 것입니다.
강아지가 살았을때는 꼬리도 흔들고 애교도 부리고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반갑게 달려듭니다.
그것은 그 안에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과 사람의 공통점은 이들이 죽으면 이들의 몸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사람의 영은 하늘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은 땅으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살아있는 혼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과정에서 그 어떤 창조물에도 살아있는 혼을 주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직 사람에게만 살아있는 혼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때 살아있는 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창조물을 만들때는 살아있는 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적이없습니다.
날짐승을 만드셨고 고래와 동물들을 을 만드셨지만 그들에게 살아있는 혼이라고 언급한 적이 없으십니다.
사람에게만 하나님께서 직접 호흡을 불어 넣으시고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죽으면 영이 어떻게 되나요?
우리의 영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몸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혼은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어떤 사람은 하늘로 가게 됩니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혼을 잃으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느냐? 혹은 사람이 무엇을 주어 자기 혼을 대신하게 하겠느냐?
여러분이 죽으면 몸은 땅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의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에게는 몸과 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는 영과 몸이외에 혼이 있는 것이고, 여러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세가지가 하나로 한 사람이되는 것이고 하나님도 세가지가 하나로 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죽음은 몸의 마지막도 아니고, 혼의 마지막도 아니고 영의 마지막도 아닙니다.
이 세가지가 분리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죽음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심리치료사나 정신과 치료사나 음악치료사들이
여러분을 위해서 해주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의 영을 돕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명상호흡을 하고 명상 치료를 하는 것들은 여러분의 느낌이나 기분을
좋게 해서 여러분의 삶을 돕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나요?
바로 여러분의 혼을 구하는 일입니다.
죽음으로 여러분의 몸이 땅으로가고 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여러분에게 남게 되는것은 “혼”뿐 입니다.
그 “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면,
이 땅에서 여러분의 영과 몸의 만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여러분의 혼의 구원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온 세상을 가진다고 해도,
여러분이 어떤 영적인 체험을 했다고 해도,
여러분의 기분이 하늘을 날라 갈 것 같다고 해도,
여러분의 몸에 왕자가 새겨진다고 해도,
여러분의 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은 형벌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아담은 죄를 지었고, 이 세상에서 첫 번째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죽음이 바로 덮치지 않았습니다.
가인도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죄를 지었지만
그에게 죽음이 바로 덮치지 않았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죄가 처음으로 드러난 사람은 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처음으로 죽은 사람은 의로웠던 아벨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죽음의 권능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된 혼은 아벨이었습니다.
이 땅을 떠난 첫번째 혼은 의로웠던 아벨이었습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욱 뛰어난 희생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의롭다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에 대하여 증언하시느니라.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여전히 말하고 있느니라.
이 땅에서 처음으로 이 땅을 떠난 혼은 의로웠던 아벨이었습니다.
아벨의 혼이 죽음으로 이 땅을 떠난 첫 번째 혼입니다.
아벨은 믿음 안에서 떠난 첫 번째 혼입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죽음이라는 의미가 징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희생물도 받으셨고 아벨도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벨은 자신의 수고와 행위로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고와 일로 헌물을 드리지 않았고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벨을 살해했습니다.
아벨은 인간의 죄 때문에 죽었지만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으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여러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예수님의 피로 여러분의 혼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죽는 것을 막하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죽음은 어떤 끝이 아니고 죽음은 하나님의 형벌이라고만 볼 수도 없습니다.
어쨌든 죽음은 죄의 삯인 것은 맞습니다.
여러분이 첫번째 죽음을 맞이하고 여러분의 몸과 혼과 영이 분리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러번 구원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암이 걸렸는데 하나님께서 1년 남은 제 인생을 5년이 넘도록 연장해 주셨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뻔 했는데 저를 죽음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이런 유형의 간증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의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 회복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가인은 육신적인 죽음을 면했지만
그는 살인자고 지옥에 간 사람입니다.
육체적 죽음을 한 번이상 경험한 사람도 있습니다.
나사로, 유두고, 도르가 자매, 나인성 과부의 아들, 이들은 모두 두 번 죽었던 사람입니다.
육신적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계2:11)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에게 해를 입지 아니하리라.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
성경에는 두 번째 죽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죽음이 있다는 것은 첫 번째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죽음이 (몸은 흙으로, 영은 하나님께로, 혼은 어딘가로)영 혼 육의 분리라고 한다면, 이것으로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첫 번째 죽음이후에 우리는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죽게 되면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불못으로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든 안믿든, 상관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로 하실 일 이시기 때문입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다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
몸은 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여러분의 몸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라나 오직 한 분만이 여러분의 혼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 뿐 아니라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조차도 더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에 보내실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누구나 다 죽습니다. 죽는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만이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지옥에나 가라고 욕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은 우리를 지옥에 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우리에게 몸이 죽는 것 말고 더 중요한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죽는 것은 여러분의 종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몸이 죽는 것은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지옥과 하늘로 바뀌는 지점인 것입니다.
(눅16:22)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지고 그 부자도 죽어 묻히게 되었더라.
(눅16:23)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이들의 몸은 땅에 묻힙니다.
(눅16:19) ¶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지내더라.
(눅16:20) 또 나사로라 하는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헌데 투성이로 부자의 대문에 누워
(눅16: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하더라. 또한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더라.
이 내용은 결코 비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때는 비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이것이 비유다 아니다 결정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이 비유인지를 직접 말씀해주십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믿으시면 됩니다.
주님이 비유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그 이야기에 다른 주장을 덧 데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읽는 내용을 실화로 읽고 믿으셔야 합니다.
(눅16:22)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지고 그 부자도 죽어 묻히게 되었더라.
(눅16:23)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부자는 묻혔고 지옥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묻히기도 하고 지옥에 있기도 하는 것은 왜일까요?
부자의 몸은 묻힌 것이고 부자의 혼이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부자의 몸은 멋지고 비싼 관에 넣어서 묻혔을 것입니다.
비싼 수의도 입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혼은 지옥에 있습니다.
(눅16:24)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가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도록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나이다, 하거늘
어떤 사람은 지옥에가있는 부자는 몸이 없는데 어떻게 말을 하고, 보고, 느끼고 하느냐고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몸을 가지고 계시지 않지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지금 지옥에 있는 한 혼이 고통을 느끼고 말을 하고 의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죽은 후에 부자의 생명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의 무대가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눅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아들아, 너는 네 생전에 너의 좋은 것들을 받았고 그와 같이 나사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
부자는 이 땅에서 좋았던 삶을 마치고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났지만 다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눅16:26) 이 모든 것 외에도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하는 자들이 갈 수 없고 거기서 오려 하는 자들도 우리에게 건너올 수 없느니라, 하니
어는 누구도 지옥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어떤 종교적 행위를 한다고해서 죽은 사람의 혼이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없습니다.
일단 지옥에 갔다면 절대로 지옥에서 낙원으로 옮겨질 수 없습니다.
죽은 조상을 위한 예배나 헌금이나 기도는 아무 쓸데 없는 것입니다.
(눅16:27) 이에 그가 이르되, 그러므로 아버지여, 간구하건대 아버지께서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소서.
(눅16:28) 내게 다섯 형제가 있사오니 그가 그들에게 증언하여 그들 또한 이 고통 받는 장소로 오지 않게 하소서, 하거늘
(눅16:29)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대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저들의 말을 들을 것이니라, 하매
(눅16:30) 그가 이르되, 아니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그들에게 간다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 하니
인간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인할 수 없는 많은 증거와 증언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눅16:31) 그가 그에게 이르되, 그들이 모세와 대언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날지라도 그들이 설득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하고 계시는 말씀의 취지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너희들이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에 달렸을때 내 앞에 서있었고, 사흘뒤에 내가 동산 안에 있는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이것을 보고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너희가 성경에 기록된 나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내 생각에는 교회는 이래야하고 저래야한다고 말하고
종교는 어때야 한다고 여러분의 수많은 사람의 수많은 의견을 이야기 하면서
기록된 성경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지옥으로부터 건져낼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는 음향시설이 좋아야하고 교회는 상담실이 있어야하고 수많은 필요를 이야기 하지만 정장 주님이 명령하시는 말씀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되는 교회를 만드는데 역행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자가 내 가족에게 누군가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을 보내서 그를 이곳에 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그들이 내가 준 성경을 믿지 않는다면 나도 그를 지옥에서 건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빌1:21)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니라.
(빌1:22) 그러나 내가 육체 안에 산다면 이것이 내 수고의 열매이니라. 그럼에도 내가 무엇을 택할지 알지 못하노니
(빌1:23)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느니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
(빌1: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해 더 필요하니라.
바울은 내가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나는 여전이 이 몸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죽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된다면 나는 이 몸을 벗어버리고 떠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내가 이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땅에 남아서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몸을 벗어버리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고 그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죽음 즉 첫 번째 사망은 결코 삶의 끝이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 사망인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우리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혼이 구원받은 상태에서 이 땅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살고 있다가
언젠가 여러분의 혼이 지금의 몸을 떠나게 되면, 물론 잠시 동안이지만,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살다가 죽으면 여러분의 혼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구원받은 사람의 끝도 아닙니다.
(계6:9) 그분께서 다섯째 봉인을 여신 뒤에 내가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간직한 증언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자들의 혼들을 보았는데
(계6:10) 그들이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오 거룩하고 진실하신 [주]여, 주께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사 우리 피에 대한 원수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는 일이 얼마나 더 지속되리이까? 하더라.
(계6:11) 그분께서 그들에게 각각 흰 예복을 주시며 또 그들의 동료 종들과 형제들도 그들처럼 죽임을 당해 그 수가 찰 때까지 그들이 아직 조금 더 안식해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더라.
누가복은 16장의 지옥 이야기가 실제가 아니라 비유라고 말하는 분들에게 지금 상황도 비유인지 묻고 싶습니다.
위 구절에서 죽임 당한 혼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혼들은 큰 음성으로 외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몸이 주는 어떤 유익도 없이 혼 만으로 어디선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옥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 천당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없는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주님과 함께하는 부활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지옥에서 지각을 가지고 목이 마르기도한 혼이 등장합니다.
하늘에는 죽임을 당한 혼이 있고 이 혼들은 제단 아래에 있으며 이들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닙니다.
(잠11:30)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나무니 혼들을 얻는 자는 지혜로우니라.
"혼을 얻는 자"
"몸을 얻는 자" 아닙니다.
"영을 얻는 자" 아닙니다.
"혼을 얻는 자" 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은 여러분의 "혼"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몸은 영원히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롬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의 몸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몸이 죽으면 혼과 영은 각각 자기가 가야 할 곳으로 가게 됩니다.
(약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성경은 혼의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혼을 구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몸을 건강하게 오래 살게하는 비밀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서점에 가면 바디바이블 이라고 성경을 통해서 건강한 몸을 가지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책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마케팅 방법을 비판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여러분이 오늘 죽으면 여러분의 혼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놓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분들은 여러분이 자신의 건강에 투자한 시간과 돈과 노력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를 성경말씀의 질서에 따라 항상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도 필요없고 교회도 필요없고 깊은 산속에가서 물소리 새소리 들으면 건강을 챙겨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수십년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하면서 단 1년을 살다가 가는것보다 의미있는 것인지 살펴보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각자의 상황에 맞게 스스로 평가해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결정에 쉽게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깊은 산골로 들어가는 사람을 비난하고 못가게 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각자의 신앙여정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가이드 라인을 제공을 해 주는 것이지만
결론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산속에 들어갔다가 스스로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돌아 올 수 도 있고
그곳에서 다른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알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보다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는 것에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책들로 인해서 성경의 이야기가 초점이 혼이 아닌 몸으로 이동되면 속는 것입니다.
(히10:38)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어떤 사람이 뒤로 물러가면 내 혼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히10:39) 그러나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르는 자들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믿어서 혼의 구원에 이르는 자들에게 속하느니라.
이 땅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주신 아버지의 말씀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하늘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 있습니다.
둘째 하늘은 태양과 달과 별이 있는 곳입니다.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여러분의 혼이 구원을 받았다고해서,
그것으로 여러분의 몸이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몸도 무덤에 있습니다.
베드로의 몸도 무덤에 있습니다.
요한의 몸도 무덤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죽었을때 그들의 혼은 그들의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 어는 부자가 있습니다.
이 땅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삶을 따라 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의 돈과 재력은 그를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가 첫 번째 사망을 맞이하면
다른 모든 사람들 처럼 무덤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자의 혼은 곧바로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지옥은 감옥입니다.
그곳은 부자가 선고받은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계시록 20장에서 내가 그 죽음을 보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있다고 합니다.
계시록 20장 11절로 가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록된 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의미없이 내생각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따르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계20:11) 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물러가고 그것들의 자리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계20:12)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그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
죽었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었다고 그들이 잊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들이 다시 왕좌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들을 죽었다고 하나요?
죽음 영, 혼, 몸이 분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창세기부터 계록까지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가 하늘에 가기 위해서 우리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말씀한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불못뿐 입니다.
여러분의 행위로 심판을 받는 다면 그 결과는 지옥과 불못 뿐입니다.
(계20:13) 바다가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매 그들이 각각 자기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았고
(계20:14)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는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둘 째 사망는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내 아들을 통해서 은혜로 베푼 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종교를 섬겼다.
네 행위로 섬긴 일들의 심판결과는 영원한 사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두 번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끝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계속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한 번의 사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보겠습니다.
(요3:16) ¶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 그들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냥 죽지 않게 해주겠다거나, 멸망하지 않게 해주겠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전4:13)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살전4:14)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을진대 그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려오시리라.
우리가 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우리가 찬양대에서 찬양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침례 세례 다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선행을 많이 했기 때문에, 우리가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묻히심과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읽고 따르지 않을까요?
(살전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곧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결코 잠자는 자들보다 앞서지 못하리라.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구원받은 사람이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데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말이 무슨 의미 일까요?
무엇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일까요?
죽은 사람의 혼은 지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영은 하나님께로 이미 돌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완성된 사역과 그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하심을 믿고 있다면 첫 번째 사망에서 우리의 몸은 땅으로가고 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돌아가고 우리의 혼은 주님과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럼 첫번째 사망 후에 구원을 받은 나의 혼이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면
우리의 부활이 왜 필요한 걸까요?
그것은 죽음이 우리를 이기고 삼킨 것을 다시 돌려 놓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이 없는 상태로 돌려 놓기 위해서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다시 하나가 되게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은것이 아니라 살아있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죽은 상태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정의 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교통사고로 잠시후면 죽을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죠.
그가 구원을 받고 하늘나라에 갈 수있는 방법이 행위로 인한 것이라면
우리는 곧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병원 침대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일어나서 고아원에가서 선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렵게 사는 사람의 집에 도배를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선행을 베풀 수 도 없고 그는 물을 받아서 침례를 받을 수도 없고 그는 지금 계좌 이체로 교회에 헌금을 낼 수 도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시간의 문제일 뿐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 옆에 바짝 다가가 앉아서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신 하나님 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때문에 죽으셨다가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이 그분의 피값으로 지불되었습니다.
이제 그분을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잠시 후 주님 품에 안기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중에 같이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복음이 생명임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구원은 그분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는 죽어가는 그 순간에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고 주님과 함께 낙원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결코 종교로 사람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 그 구원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듭나면, 다시 태어나면, 둘째 사망에 놓이지 않게 됩니다.
거듭나면 한 번은 죽지만 영원히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기회는 오직 여러분이 호흡이 달려 있는 동안 뿐 입니다.
단 1분이라도 호흡이 붙어만 있다면 그에게 생명이 주어질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