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 안에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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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육신 안에 있다는 것
본문: ​​롬 7:5-6
2020-05-17
​​
(롬7:5) 우리가 육신 안에 있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들의 활동이 우리 지체 안에서 일하여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였으나
​​(롬7:6) 우리를 붙들던 것 안에서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율법에서 구출되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고 글자의 낡은 것 안에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
​​(롬7:1) 형제들아, (내가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법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를 지배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7:2) 남편 있는 여인이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법에 의해 그에게 매여 있으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녀가 자기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롬7:3) 그런즉 만일 그녀가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간부(姦婦)라 불릴 터이나 그녀의 남편이 죽으면 그녀가 그 법에서 해방되나니 그러므로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지라도 간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결혼의 문제는 남자든 여자든 동일하게 적용해서 봐야합니다.
남자 이야기는 없다고 남편은 여자가 살아 있어도
다른 여보를 만나도 된다고 적용하면 안될 것입니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 하여 죽게 되었나니 이것은 너희가 다른 분 곧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분과 결혼하게 하려 함이요, 또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율법에 대 하여 죽게 되었나니”
​​4절을 보면 내가 구원받은 자인데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 분명이 생명을 얻어서 살아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또 죽었다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를 보면 아내가 자신의 남편이 죽으면
자유롭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이 말씀은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가 죽은 남편이기도 하고
살아 있는 아내이기도 합니다.
​​아주 어렵고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
​​나는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옛 생활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살았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롬7:5) 우리가 육신 안(in the flesh)에 있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들의 활동이 우리 지체 안에서 일하여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였으나
​​“우리가 육신 안에 있었을 때”
여기서는 우리가 구원받기 전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롬7:6) 우리를 붙들던 것 안에서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율법에서 구출되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고 글자의 낡은 것 안에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
​​로마서 7장과 8장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 큰 방향을 놓치게 됩니다.
​​
​​
5 ​​“우리가 육신 안에 있었을 때”
​​
​​우리가 전통적으로 육신 안에 있다는 의미를
죄를 짓고 있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룩하지 못한 것을 하거나 성경적으로 비난 받을 일을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육신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대조적으로 누군가 찬양을 하면서 기뻐하고
말씀을 전하면서 감동을 주는 설교를 한다면 우리는 그가 “영적이다.”
또는 “영안에서 행한다 / 성령 안에서 행한다”라고 표현을 하게 됩니다.
​​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성경적으로 충분히 설명된 표현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
​​ 위 구절에서 “우리가 육신 안에 있었을 때”라는 표현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실제로 살아있는 육신의 몸을 입고서 살아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육신 안에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기도 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상태를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
​​(몬1:16) 이제는 종으로서가 아니요 오히려 종 이상의 사랑하는 형제로서니라. 특별히 내게 그러하거늘 하물며 네게는 육신 안(in the flesh)에서나 주 안(in the Lord)에서나 얼마나 더 많이 그러하랴?
​​
빌레몬서 소개
​​빌레몬서는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혀 있을 때 쓴 옥중서신에 속합니다.
서신의 수신자인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고 이 종은 주인의 돈과 물건을 훔쳐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 후 과정은 알 수 없지만 오네시모가 로마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과 알게 되었고 바울은 오네시모가 주님의 복음 사역을 할 충분한 열정과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 오네시모는 감옥에 있던 바울에게 필요한 일꾼이 되어 바울을 돕는 일을 하고 시중드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서신서를 통해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종으로서 뿐 아니라 형제로서 다시 용서하고 받아 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
“육신 안에서” “주 안에서”
​​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육신적으로 주인과 종의 관계였던 것을 이제 형제의 관계로 받아 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오네시모가 거듭난 지체로서 주 안에서 형제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빌레몬서의 한 구절인 1장 16절에서
아주 중요한 단서를 얻게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 실질적인 육신을 입고 그 안에 있고,
또한 침례를 통해서 주 안에 있는 두 가지 상황을 모두 갖고 있는 것입니다.
​​
​​ 바울은 실질적인 몸을 입고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 그리고 또한 주 안에서 자신의 속사람 또는 영적인 사람을 사용해서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
​​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돕는 다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 몸을 가지고 교회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우리의 속사람을 이용해서
혼의 구원을 위해서,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그리고 발전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 안에서 서로 돕는 방법 중에 하나 입니다.
​​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몸/육신 안에서나 성령 안에서
두 가지 모습으로 다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몸 안에 사는 삶
​​“육신 안에서”의 첫 번째 의미를 살펴 보겠습니다.
육체적 몸 안에서 사는 삶으로, 또는 몸 안에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어떤 일
​​
​​ (고전7:28) 그러나 네가 장가를 가도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처녀가 시집을 가도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들에게는 육신 안에 고난이 있으리라. 오직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
결혼이라는 것은 각 사람의 영적 삶에 영향을 주는 문제이지만
사실은 육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육체로 이어지는 문제고 서로의 감정이 이어지는 문제입니다.
​​
만약 누군가 나는 육신의 정욕을 제어할 수 없어서
결혼을 해야겠다고 한다면 잘 한 결정이겠지만,
결혼 자체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 때문도 아니고 아내 때문도 아닙니다.
결혼한 남자도 여자도 여전히 육신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는
계속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 해결은 성령님과 함께 함으로 얻을 수 있고
예수님과 확고한 동행만이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고후10:3) 비록 우리가 육신 안(in the flesh)에서 걸으나 육신을 따라(after the flesh) 싸우지 아니하노니
​​(고후10:4)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통해 강력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느니라.)
​​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영적인 전쟁에 참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영적인 전쟁에 참여할 때
우리의 육신을 벗어버리고 참여할 수 없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 몸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싸우지는 않지만 여전히 육신 안에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싸움도 여전히 우리가 육체 안에 있는 상태로
싸움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에서 일어나는 현상
우리가 육신 안에 있다는 것은 육신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나 현상을 담고 있는 것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후12:7) 계시들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게 육체 안(in the flesh)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사 나를 치게 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동시에 육체 안에서 사탄이 주는 고통과 핍박이 육체에 가해지고 있고
그것을 육체를 통해서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in the flesh)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동시에 나는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고, 동시에 나는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실제로 나의 몸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이 몸을 입고 살아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동일한 옛 몸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는 이 몸으로 옛 생활을 했지만
구원받고 난 후에도 동일한 옛 몸을 가지고 새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가 어떻게 이 옛 몸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느냐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휴거가 되고 이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고 죄가 없는 상태가 된 뒤에는 우리가 성도의 삶을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되지 않은 옛 몸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문제는 쉽게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6:12) 육신으로(in the flesh) 잘 보이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받지 아니하려 함이니라.
유대인들은 몸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런 행위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습니다.
이런 행위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지금 성경의 예는 할례를 가지고 유대인들을
다시 율법의 통제아래로 되돌려 놓으려는 상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배중에 열심히 아멘을 외치고
교회에 올 때 최고의 경건한 옷차림을 하고 교회에 오는데
여러분의 마음 속에 교회에 대한 불만과 쓴뿌리가 있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겉으로는 저는 교회에 불만이 없다고 하고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겉으로는 정말 경건한 모양을 다 갖추었다면 어떨까요?
교회에 와서 봉사도 열심히 해서 다른 성도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서
보기와 다르게 집에서는 가정을 파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육신안에서 성령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빌1:21)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니라.
(빌1:22) 그러나 내가 육체 안(in the flesh)에 산다면 이것이 내 수고의 열매이니라. 그럼에도 내가 무엇을 택할지 알지 못하노니
(빌1:23)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느니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
(빌1: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안(in the flesh)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해 더 필요하니라.
​​
24절에서 육체 안에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 안에 있다는 것이
반드시 죄를 짓는 일로 등치 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요1:1)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And the Word was made flesh,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가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육신을 통해 드러나도록 살다가 가셔야 합니다.
(딤전3:16)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in the flesh)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예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안에 나타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육체 안에 드러나신 것이
죄를 지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 참고: 개역개정 성경은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요일4:3)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in the flesh)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그 영이니라. 그것이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그것이 지금 이미 세상에 있느니라.
“육체 안(in the flesh)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이자 마지막 이시고 알파와 오메가 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이분은 마리아의 배속에 자신의 몸을 준비하시고
그 육신 안에 들어가셨고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거니셨던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육신 안에서 죄를 지은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는 의미가
결코 그분이 죄 가운데 거니셨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in the flesh)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려 하심이라.
그리고 육체 안에 있다는 것은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벧전3:18)
예수님은 지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후
많은 방법으로 우리를 돕고 먹이고 살펴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을 위해서 해주실 수 없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지 않고는 해줄 없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제가하기 위해서 죽으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고,
얼굴은 찢기셨고,
자신의 등은 채찍으로 갈라지셨고,
온 몸은 맞아서 멍이드셨습니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감당하신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 입니다.
주님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미 39권의 성경책을 주셨습니다.
왕국을 세우기 위한 것이아닙니다.
구약을 통해서 왕국을 세우셨습니다.
그분의 권능과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이런 능력은 창조에서 이적과 표적을 통해서 이미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은 우리의 죄로인해 죽기 위해서 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삶을 성경으로 기록해 주셨고
그 기록을 통해 우리도 육신 안에서 거룩하게 사는 본을 어떻게 보이셨는지
알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이
십자가에 달리는 한 장면만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더러운 죄인과 33년 반을 같이 보내셨습니다.
주님의 긍휼함이 없었다면
죄가 하나도 없으신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살고 거닐 수 있었겠습니까?
(벧전2:21) 참으로 너희가 심지어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나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가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벧전2:22)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벧전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고
이렇게 사시다가 십자가로 향하신 것입니다.
(롬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율법이 … 능히 하지 못하는 것”
로마서 8:3에서 율법이 능히 알지 못하는 것
(For what the law could not do)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시대부터 과거로 교회 이전시대까지도 율법의 영향아래 있을 때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여러분의 죄값을 대신 지불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여러분을 대신해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즉 율법은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만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해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나요?
예수님은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단 한번도 죄에게 굴복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입증하신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다는
변명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유혹을 이겨내셨고 죄를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육신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육신을 입고 선한 일도 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육신의 위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육신 안에 있다는 것은 “위치”와 관련이 있기도 합니다.
(골2: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육신적(in the flesh)으로 내 얼굴을 보지 못한 모든 자들을 위해 얼마나 큰 싸움을 싸우고 있는지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골2:5) 내가 육신으로는(in the flesh)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의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바라보느니라.
저와 여러분은 영으로는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있을 때는
육신적으로는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질서있게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장소에 모이게 되면
우리는 육신으로 서로를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으로는 떠나 있다는 말에서 “육신으로”라는 표현은
우리가 서로 다른 장소에 있다는 의미 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상태
“육신으로 있다/in the flesh” 라는 표현은 구원받지 않은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롬8:8) 그런즉 이와 같이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느니라.
(롬8:9)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분의 사람이 아니니라.
위 구절에서 “육신 안에/in the flesh”라는 표현은 구원받지 않은 상태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육신 안에 있다가
구원을 받으면 육신 안에 있는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안에만 있는(in the sprits)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후에는
육신을 입고 성령 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이 구절을 잘못 인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은 받았지만
성령은 받지 못했다는 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기 위해서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따로 적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다른 구절을 보겠습니다.
(엡2: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엡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엡2: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그 뒤에 선한 행위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먼저 선한 행위를 하고 나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먼저 받고 난 뒤에 선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전에는 선을 행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었습니다.
구원을 받으면 성령님께서 들어오시고
그분을 통해 선을 행할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구원을 받았어야지 선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선한행위가 먼저 따라올 수 없는 것입니다.
(엡2:11) 그러므로 기억하라. 너희는 지나간 때에 육체로는(in the flesh)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하는 할례를 받아 할례자들이라 불리는 자들로부터 무할례자들이라 불리던 자들이라.
누군가 구원받기 전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의 육신을 갖고 있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의 육신을 갖고 있던
구원을 받게되면 그 후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구원받았다면 그는 육신적으로는 여전히 이방인 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해서 이방인이 이방인이 아닌것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여전히 육신적으로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육신적으로 유대인이라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의 시각에서 보면 이들은 더 이상
이방인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더 이상 육신 안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는
더 이상 육신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신분은 유효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는
더 이상 이방인이라는 신분은 유효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더이상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의 통제 아래 있다는 의미
마지막 용례로 “육신 안에 있다”는 의미는 죄의 통제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설명을 먼저 해보겠습니다.
여기 육신적으로 이방인에 속한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생적으로 죄를 지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육신은 죄를 짓는데 망설임이 없고 죄를 짓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는 결혼을 해서 가정도 가지고 있고
그는 점잖게 옷을 입고 사회 생활도 하지만
여전히 육신적인 문제를 안고 죄의 통제 아래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는 더 이상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현실의 삶에서 이 사람은
여전히 이방인이고
이전과 같은 욕구와 열망과 습관과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성령님이 그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육신적으로 살지
아니면 성령 안에서도 살지를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없었던
내면의 다툼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삶 전체에 거쳐서 이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육신 안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 안에 있으면서
어떻게 영에 속한 사람처럼 사는냐 하는 것입니다.
(롬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게 되었나니 이것은 너희가 다른 분 곧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분과 결혼하게 하려 함이요, 또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내 형제들아”
구원받은 형제를 향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게 되었나니”
그냥 죽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너는 나 한테 죽은 자식이야!!!
이런 표현입니다.
이 구절의 목적은 구원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 맺는 삶을 살기위한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7:5) 우리가 육신 안(in the flesh)에 있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들의 활동이 우리 지체 안에서 작용하여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하였으나
“우리가 육신 안에 있었을 때” : 우리가 구원받지 않았을 때
내가 구원받기 전에는
나는 죄로 가득한 것들을 아주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해왔습니다.
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범한 죄들로 인해 그 댓가로 사망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는
주님은 이제 내가 영적인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행하길 원하십니다.
이런 일들의 결과와 열매는 생명이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롬7:6) 우리를 붙들던 것 안에서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율법에서 구출되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고 율법 자구의 낡은 것 안에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고”
/ we should serve in newness of spirit
“should” 받드시 마땅히 섬겨야 합니다.
왜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까요?
왜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걸까요?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싸움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그들이 성령을 쫓아 사는 것이 자동적으로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치 구원받기 전에 잘못된 것을 따르는 것이
너무도 자동적으로 일어났던 것처럼 말이죠..
구원받은 후에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걷기 위한 교리와 가르침을 따르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절제하지 않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육신적인 일을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원래 그런 면이 있어요 허… 허… 허…”
“나는 원래 성경이 그래요. 허… 허… 허…”
“저는 원래 잘못을 인전하는 것을 잘 못해요.. 허… 허… 허…”
“저는 원래 정직하지 못한 면이 있어요.. 허… 허… 허…”
“저는 원래 여자만 보면 음행을 참지 못해요.. 허…”
“저는 원래 술을 보면 그냥 못지나가요. 허…”
그 결과로 구원받은 사람이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겨야 하는데
마땅히 해야 할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벧전4: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 안(in the flesh)에서 고난을 당하셨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는 이미 죄를 그쳤나니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예수님이 하셔야 할 부분이 있었다면,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벧전4:2) 그런즉 그는 자기 육체의(in the flesh)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들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리라.(should live)
“육체의 남은 때를 …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리라”(반드시 마땅히)
(벧전4:3) 우리가 색욕과 정욕과 과음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한 우상 숭배 속에서 걸어 이방인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한 것이 우리 삶의 지나간 때로 우리에게 족하도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과거에는 육신 안에서 육신적으로 했던 일을
이제 그쳐야 합니다.
죄에 이끌려 살던 삶은 이제 이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접근합니다.
구원받으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면 당신의 죄가 깨끗하게 되고
구원을 받고 하늘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받게 하고 교회에 참석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죄를 사랑하고,
술마시길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고, 클럽에가서 밤새도록 춤파티를 좋아합니다.
교회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직장 생활하다보면 술 한 두잔은 어쩔 수 없죠!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남자의 본능이니 어쩔 수 없죠!
이제 구원 받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나머지 인생을 그저 육신의 욕망을따라 계속 편안하게 사셔도 된다고
이야기 하거나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그대로 교회에 성도로 받아주고
숫자를 늘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아야만 합니다.
구원받았다면
여러분은 옛 삶을 끊어내야 합니다.
과거의 육신에 속한 삶, 죄의 지배아래 일어났던 모든 행위를
반드시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 안으로 들어와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삶을 성령 안에서 살아나가야 합니다.
왜 이런 단계에 오는 사람이 적은 줄 아시나요?
그것은 이런 싸움은 많은 갈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은 주변 사람들과 가족들과
새로운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제 매일의 삶에서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야 합니다.
육신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것인지 아니면 옛 사람처럼 그대로 살것인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은 과거의 불법과 정욕에서 죽게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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