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크게 드러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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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주님을 크게 드러내자
설교본문 : 빌 1:20
2020-12-13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내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나니
Christ shall be magnified in my body, whether it be by life, or by death.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나니
(빌1:12) 그러나 형제들아, 내게 일어난 일들이 도리어 복음을 진전시키는 기회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원하노라.
(빌1:13)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결박당한 일이 온 궁궐 안과 다른 모든 곳에 드러나게 되었고
(빌1:14) 주 안에 있는 형제들 중의 많은 이들이 내가 결박당한 일로 인해 확신을 갖게 되어 두려움 없이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빌1:15) 참으로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또한 어떤 이들은 선한 뜻으로 하나니
(빌1:16) 저들은 내가 결박당한 일에 고통을 더할 줄로 생각하여 성실하지 않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나
(빌1:17)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워진 줄 알고 사랑으로 하느니라.
(빌1:18) 그러면 무엇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치레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나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참으로 기뻐하리라.
(빌1:19) 너희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공급해 주심을 통해 이것이 나의 구원으로 바뀔 줄 내가 알므로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내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나니
설명>
(빌1:12) 그러나 형제들아, 내게 일어난 일들이 도리어 복음을 진전시키는 기회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원하노라.
"그러나 형제들아, ... 너희가 알기를 내가 원하노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것이 성령님의 뜻입니다.
모든 설교자가의 마음이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내가 보는 것과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조명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노라"라는 표현은 나의 의지와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가 설명하고 전하려고 하는 것을
듣는 사람들이 내가 보는 같은 방향에서 보는 것이 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설교자의 마음이고 복음 전도자의 마음입니다.
부모 마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내가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같은 마음으로 보고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가 알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택은 자신의 의지로
모든 사람은 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의지가 있습니다.
그 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특정한 방향이 있더라도
성경이 우리에게 바라는 방향이 있다고 하더라고,
또는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원하는 결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이 해줬으면 하는 방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그들이 결정할 수 있도록 영향을 행사하는 일들을
여러 방면으로 할 수 있을 뿐 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자신의 삶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인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의 의지와 뜻 만을 제어 할 수 있을 뿐
다른 사람의 뜻을 제어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예정론을 부정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의지가 있고 우리 사람도 각자의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자신이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설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우리의 의견과 견해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전하는 의견들 듣고
그들이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시는 길을 따를 지를 결정하는 것은
듣는 사람 각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내게 일어난 일들이 도리어 복음을 진전시키는 기회가 된 줄을”
빌립보서 기록자인 바울에게 일어난 일은 무엇일까요?
그는 사슬에 묶여서 감옥에 갖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이 이해하길 바라는 그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쇠사슬에 묶이고 감옥에 가게 된 일은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확실이 복음을 위해서 유익이 따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이 복음을 진전시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된 것때문에 복음이 진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망할 수 있었던 바울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께 불평을 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행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원망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저를 지켜 보신 것처럼 많은 일들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한 일이라면 신실했습니다.
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하십니까?"
우리의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바울은 충분히 하나님께 원망하고 화를 낼 법해 보입니다.
바울은 충성을 다해서 주님을 섬겼는데
그 결과가 감옥과 쇄고랑인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의 생각과 같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상황에 놓이게 하셨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생각한 바울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바울은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헌신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종으로 섬기는 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각에 떠오르는 생각대로 자신을 맡기지 않고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왜 이런 상황을 허락하신 것인지를 주의깊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노력으로 한 가지 이유를 알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주변을 둘러보고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 곳에 놓이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왜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놀라운 일에 사용하고 계시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고자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빌1:13)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결박당한 일이 온 궁궐 안과 다른 모든 곳에 드러나게 되었고
바울은 내가 결박당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궁궐 안에 복음을 알릴 수 있겠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궁궐 사람들이 시장에 와서 나의 복음을 들을 일이 없습니다.
이들은 거리의 설교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거리로 나올 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도행전 17장의 마르스 언덕의 설교가 이루어질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직접 목격한 증인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바울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냥 속으로 분노와 원망 만을 키워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좀더 한 발 더 들어가서 보겠습니다.
(빌1:14) 주 안에 있는 형제들 중의 많은 이들이 내가 결박당한 일로 인해 확신을 갖게 되어 두려움 없이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놓이게 된 이유를 깊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또 알게 된 것은 다른 형제들이 나로 인해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신들의 대표적인 리더가 기꺼이 감옥에 갔다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헌신되지 못한 신앙생활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을 것이고,
나도 바울 처럼 감옥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담대함을 갖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신실하고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모습이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에 자신이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우리의 신약성경은 다소 부피가 줄어 들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바울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옥중 서신서라고 하는 것이
바울이 감옥에 있을때 기록된 것입니다.
감옥에서 서신서를 작성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도 그가 감옥에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었다면
내용의 깊이나 질이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주님이 허락하신 뜻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자하는 열정이 있다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바울처럼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다양한 동기와 이유
15절 부터는
사람들 마다 예수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15절부터 18절까지 예수그리스도를 선포하는
8가지 방법과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1:15) 참으로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또한 어떤 이들은 선한 뜻으로 하나니
“시기와"
예수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사람들이 동기와 이유가
항상 올바른 이유에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유가 올바르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잠23:17) 너는 마음에서 죄인들을 부러워하지 말며 종일토록 주를 두려워하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다룰때
생기는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육신은 세상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성령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삶을 살아야 할 새로운 이유가 생겼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르쳐주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도 여전이 육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선포할때
무언가 우리를 유혹하게 됩니다.
즉 죄인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삶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 반대가 되는 경우는 찾아 보기 힘듭니다.
세상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기적이나 표적들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을 가지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들은 전부 불의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은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고 그들이 사모하는 것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있는곳은 모든 이런 것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속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화평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기쁨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 가능한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아야 볼 수 있는 것들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육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극복해야 할 이슈가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속받지 못한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 육신은 하나님께서 바꿔주실때까지 바뀌지 않습니다.
이 육신은 여전히 세상을 더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육신은 여전히 죄를 갈망하고있고 불의한 것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육신은 악하고 사악하고 불경건합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동기를 확인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있다는 확신을 놓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동기를 순수하고 의롭게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인을 부러워하는 유혹에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들이 사는 삶을 부러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배웠고 교회를 통해서 배워서
죄라는 것은 사망을 가져오고 멸망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1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부러움에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그들의 혼을 이겨오기 위해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보기에 더 좋은 삶을 사는것 같기 때문에
질투심에서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네가 가지고 있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시샘과 부러움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가진 것이 더 좋다는 어린아이 싸움 같은 마음에서
말을 할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빌1:15) 참으로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또한 어떤 이들은 선한 뜻으로 하나니
" 다툼으로"
또 다른 이유로 다툼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유가
다투고 싸우고 논쟁하기 위해서 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기로 전하는 것은 올바른 동기가 아니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쁜 동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하다가 자신의 확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억울해하고 쉽게 논쟁하고 말씨름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전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다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딤후2:24)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말아야 하며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
(딤후2:25) 스스로 반대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
(딤후2:26) 이것은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찾게 하려 함이라.
주님을 섬기는 일은 다툼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다투거나 싸워서는 안되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싸움의 동기를 제공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여러분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태도가 싸움의 여지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에게 싸움의 여지를 주는 순간 그들은 똥물이라도 퍼부을 기세로
조롱과 독설로 여러분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주의 종들에게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온유함으로 전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드럽게 가르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당신과 다투러 온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싸우고 싶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혼을 이겨와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구원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주님을 믿길 원하는 것입니다.
거듭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빌1:15) 참으로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또한 어떤 이들은 선한 뜻으로 하나니
"선한 뜻"
우리는 올바른 의도와 동기를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지옥으로 가는 길을 멈추고 예수님께로 돌아서게 만들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능히 지옥에서 건지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유일하신 분
예수님을 알게 해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그들과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뜻으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빌1:16) 저들은 내가 결박당한 일에 고통을 더할 줄로 생각하여 성실하지 않게 다툼(contention)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나
“다툼으로” 하지 말라
(유1:3) 사랑하는 자들아, 공통의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쓰려고 모든 열심을 내던 차에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달된 믿음을 위해 너희가 힘써 싸우라고 너희에게 써서 권면할 필요를 느꼈노니
"힘써 싸우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1:6에서는 다툼으로 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위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굳건하게 담대하게 주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이러한 확고한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른 태도로 올바른 영을 가지고 전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싸우는 태도로 전해서는 안됩니다.
말싸움 하는 태도로 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적개심을 느끼게 전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욕하는 사람에게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벧전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고
우리는 복음을 전할때, 올바른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옳지 않는 것들에 타협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 취하길 원하시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의롭게 순수하게 그러면서
강하고 확고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드럽게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빌1:16) 저들은 내가 결박당한 일에 고통을 더할 줄로 생각하여 성실하지 않게 다툼(contention)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나
"성실하지 않게"
성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억지로 하거나 건성건성 불량한 마음과 태도로 사람을 대해서는 안됩니다.
(빌1:17)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워진 줄 알고 사랑으로 하느니라.
(빌1:18) 그러면 무엇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치레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나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참으로 기뻐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선포되는 방법을 두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겉치레로 하는 것, 2. 진실로 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섰을때 내가 복음을 전하던 모든 순간이
진실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드러나길 원합니다.
진실하게 전하는 것이 어떻게 전하는 것일까요?
사랑으로, 선한 뜻으로 그리고 진실하게
잘못된 방법은 뭘까요?
겉치레로 전하는 것, 성실하지 않게 하는 것,
논쟁하듯이 하는 것, 시기심으로 하는 것,
우리는 복음 전할때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올바른 태도로 전해야 합니다.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나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참으로 기뻐하리라.”
성령님의 관점을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시기심으로 하든 다툼으로 하든 진실한 마음으로 하든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런 수고를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조차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마음의 동기를 알 수 없습니다.
(고전4: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판단을 받거나 사람의 판단으로 판단을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니라. 참으로 나는 내 자신을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고전4:4) 나는 판단 받을 아무것도 스스로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이로써 내가 의롭게 되지는 아니하였나니 오직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주시니라.
(고전4:5) 그러므로 주께서 오실 때까지 때가 이르기 전에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분께서 어둠의 감추어진 일들을 빛으로 가져가 드러내시고 마음의 의도들을 드러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리라.
빌립보서의 이야기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동기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동기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동기를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야 우리의 어둠의 감추어진 일들이
빛으로 가져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만이 마음의 의도를 드러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렘17:9) ¶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성경은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의도도 스스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렘17:10)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들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
여러분의 마음의 의도를 아실 수 있는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른 방법으로 전하고 싶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방법대로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139:23) 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고 나를 시험하사 내 생각들을 아시옵소서.
(시139:24) 또 내 안에 어떤 사악한 길이 있는지 보시고 나를 영존하는 길로 인도하소서.
우리는 성경 말씀과 내마음의 상태를 비교하면서
내가 말씀의 기준에 합당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지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구하고 말씀에서 구해서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올바른 동기로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주님께 묻고 성경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권위 아래 있고 교회의 지도자의 권위 아래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좀더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특히 젊은 형제자매들일 수록 좋은 지도자의 권위 아래서 훈련받는 것이
너무도 유익할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때 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야기 하거나 죄를 이야기하거나
죄인들의 삶을 부러워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올바른 말씀의 선포가 아닙니다.
동기야 어떻게 되었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거리설교를 하든 너튜브 동영상 설교를 하든
공개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 방법이 겉치레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말씀을 선포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을 알리는 것은 기쁜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방법에 대해서 서로를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자신의 길에서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자신의 삶에서 주님을 높이고 전하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바울이 받은 구원
(빌1:19) 너희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공급해 주심을 통해 이것이 나의 구원으로 바뀔 줄 내가 알므로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면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공급해 주심으로 해서
이것이 나의 구원으로 바뀔 줄 내가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복음을 전하는 것, 2. 주님이 기뻐하는 것,
3. 너희가 기도하는 것, 4. 예수님의 영께서 공급해 주는 것,
이 네 가지를 통해서 자신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는데,
바울은 지금 쌩뚱맞게 다른 조건들을 제시하면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신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요?
성경에는 지금 언급한 혼의 구원 말고 다른 구원이 있을 수 있나요?
성경에서 언급한 다양한 구원
네 성경은 혼의 구원말고 다른 상황에서
“구원”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롬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기록된바, 시온에서 구출자가 나와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돌이키리니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는 이야기입니다. 혼의 구원이 아닙니다.
(행27: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작지 않은 폭풍이 우리를 덮치매 우리가 구원받으리라는 모든 희망이 그때에 사라졌더라.
(행27:31)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머무르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배의 파선에서 구원받는 이야기 입니다.
병에서 놓임을 받는 것도 구원이라고 하고
감옥에서 나오는 것도 구원이고
빌1:19에서 바울이 구원받아야 할 곤경이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묶였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침례요한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침례인 요한은 하나님의 확실한 종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전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침례를 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태어난 남자 중에 제일 큰 자라고 칭찬해 주신 사람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칭찬까지 받은 사람이지만
침례인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때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마음에도 뭔가 의심이 드는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라면 왜 나를 이렇게 감옥에 놓이게 하셨는가?
예수가 진정한 그리스도라면
그에게 침례를 주고 그의 길을 예비한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그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분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걸까?
하고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놓인 처지를 보면서 그의 영은 하나님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주님과 다투기 시작합니다.
침례인 요한의 의심
침례인 요한에게 생긴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께 강하게 붙들려 있던 자신의 마음이,
주님께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마음이,
흔들리며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침례인 요한과 같은 처지에 놓인 바울
사도 바울도 지금 침례인 요한이 겪었던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결박당한 상태에서도 선한 것을 찾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될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주님께 의심을 품을 수도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등을 돌릴 수도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연약한 그릇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유혹과 시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책략에 빠져서 그가 준것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로부터 온것들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도록 잘 방어를 해야 합니다.
마귀의 공격에 대항해서 잘 싸워야 합니다.
마귀의 존재를 의식하고 싸워야
우리가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는 내 앞에 마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들이 언제든지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그런 공격이 들어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선포되는 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가 지금 놓인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길은
바로 이런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자신이 놓여진 상황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낙담하지 않는 길은 바로 이런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 힘든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런 상황에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는 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크게 되셔야 합니다.(높여지셔야 됩니다.)
복음은 계속 전해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청중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해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도 바울과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도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이 일들 위에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낙담하고 주님께 등을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이상의 것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뒤에서 자신의 선한 뜻을 위해서 하시는 일이니
믿음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내가 감옥에 있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크게 되는 것이 나에게 악한일이 일어나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선포가 멈추지 않고 전진하고 그분이 더 커지는 것이
내가 처한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우리의 처한 상황이
마귀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도록 잘 방어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배신했다고 생각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런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강한 확신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내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나니
이 말씀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한 소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지금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좋은 영적상태를 유지하고자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땅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은 자신의 편안함을 위함이 아니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님을 만난 이후의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가 크게 드러나게 하는데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고
주님이 영광을 받게 하는 것이고
이 땅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삶이 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짧은 삶이 끝나고 나면
여러분이 이 땅에서 조금 불편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 위험에 처했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해서 했던 일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데려오기 위해서 수고 했던 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크게 만들기 위해서 수고했던 일
이런 일들이 결국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과 고난을 겪으면서 이런 문제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의 삶을 훨씬 더 유익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시험과 고난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선한 뜻을 의심하고
다가오는 문제를 두려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훨씬 유리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예수님을 위해서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불법을 저질러서가 아닙니다.
세금을 내지 않아서 간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상관없지만,
우리가 세상의 법을 어긴 문제로 감옥에 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이 도박을 하거나,
목회자들이 교회 돈을 불법으로 유용하거나,
교회에서 교회재산 때문에 몸싸움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분을 선포하다가 감옥에 간 것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이런 마음의 자세는 성도들이 갖춰야 할 좋은 자세입니다.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나니"
그리스도를 높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 일까요?
그리스도를 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확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돋보기가 그 현상입니다.
돋보기로 보면 더 커보이고 더 자세히 보이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어려운 상황과 고통의 순간을 지나면서도
그가 주님께 더 단단히 붙어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주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선포하는 일에
더 기쁨을 누리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더 큰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더 자세히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소유한 예수가 누구기에
이 사람이 이토록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걸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가 나가서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이 돋보기를 들로 예수님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사람은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도 욕하지 않고 선한 말로 대응을하지?
어떻게 저 사람을 저런 억울함 속에서도 평안을 유지 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모욕을 받고도 분노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여러분이 돋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님이 더 잘 보이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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